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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없는 열 일곱 소년으로 정수직업훈련원에서 목공일을 배운 것이 1973년. 어느새 31년이란 세월이 흘러 ‘대한민국 목공예 명장 1호’의 명예를 지켜가고 있는 유석근(49, 공주신행단체연합회 수석부회장) 한목예사 대표가 그이다.
유 명장의 공방에 들어서면 그의 공예솜씨를 엿볼 수 있는 다양한 디자인의 소반(小盤)들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소반이란 음식을 담은 식기를 받치는 작은 규모의 상을 말한다. 소박하고 단순한 우리 문화를 대표하는 목공예품이다. 소반은 나주반과 해주반, 통영반, 충주반 등 지역에 따른 형태의 차이에 따라 그 명칭이 달라진다. 유 명장이 만드는 공주반은 전통의 목상감(木象嵌) 기법을 소반에 담은 것이다. 문양과 선의 아름다움에 탄복, 이를 복원하기 위한 일련의 작업이 그의 작품세계의 주를 이뤘다. 연꽃을 소재로 한 연화문(蓮花文)과 팔정도를 상징한 8각, 12연기를 상징한 12각문 등을 가장 큰 특징으로 한 그의 소반은 보는 이로 하여금 손으로 그린다 해도 따라하지 못할 만큼 정교하게 짜여져 있었다.
“느티나무를 깎아 못 하나 없이 끼어맞추는 정교한 작업(0.3mm 이하)을 할 때는 돋보기를 써야 할 정도로 집중해야 합니다. 만약 쓸데없는 망상이라도 할라치면 칼과 끌에 손가락을 다칠 정도니까요. 작품은 결국 내 얼굴을 만드는 것과 같아요. 집중 안할 수가 없죠.”
이렇게 심혈을 기울인 작품들은 발로 차거나 집어던져도 부서지지 않을 정도로 튼튼해서 수명이 최소 200년은 될 정도라고 한다. 유 명장의 작업에는 부처님 상호를 어루만지듯이 정성이 흠뻑 배어있기 때문이다. “좌선할 때는 온갖 번뇌망상이 치성하다가도 공방에만 들어서면 망상이 간 곳 없다”는 그의 말이 실감난다.
“작업할 때는 소반도 없고 나도 없고, 없다는 생각도 없죠.”
젊은 시절 동학사에서 철야참선 할 때, 1시간이 5분 정도로 느낄 정도로 참선삼매에 빠진 적도 있다는 그는, ‘일삼매’ 속에서 시간이 사라지는 체험을 종종 하고 있다. 주관과 객관, 나와 사물이 일체가 된다고 해서 ‘심경일여(心境一如)’, ‘물아일회(物我一會)’의 경지라고나 할까. 자기와 대상이 ‘한 물건’이 되는 이러한 경계를 유 명장은 날마다 경험하고 있다니 일상 속의 선수행과 다름없다.
유 명장의 작업시간은 아침 8시부터 오후 7시까지. 이렇게 몰두하는 작업시간이 이제 가장 편안한 시간이 되었다. 가족의 일이나 신행단체의 활동과 같은 번잡한 생각들이 씻은 듯이 사라지고, 어떤 때는 자신이 작업하고 있다는 생각까지 끊어질 정도로 무심(無心)이 된다. 그래서 간혹 전화 벨이라도 울리면 깜짝 놀라고, 손님이 찾아오면 작업이 중단되어 다시 이어서 일하는 것이 쉽지 않을 정도다. 장인의 삶 자체가 이렇다 보니 스님들은 늘 그에게 “거사님은 절에 와서 참선할 필요도 없겠다”는 말을 자주 하곤 한다.
유 명장이 사용하는 목재는 최소 수령 3백년 이상의 고목들. 50년도 살지 않은 그가 여섯 배나 나이든 나무를 다루다 보니 겸허해 질 수 밖에 없단다. 특히 어릴 때 아버지가 동네 느티나무를 향해 절하던 모습을 기억하면 500~600년 수령의 나무를 더욱 함부로 대할 수 없다. 금속이나, 흙보다 느낌이 좋다는 나무의 질감을 그는 어떻게 다루고 있을까. “욕심 낸다고 쉽게 다룰 수 있는 게 아니죠. 기교 안부리고 나무의 자연스런 결을 살려 절제해서 표현하려 하는데, 그게 더 어려워요. 화면을 꽉 채우는 것보다 ‘여백의 미’를 살리는 게 더 어렵죠.”
옛스러운 고졸미(古拙美)를 강조하는 그의 소반은 디자인 스켓치, 도면 작성, 마름질, 조각 및 대패질, 상감(목재 표면에 무늬를 새겨서 그 속에 같은 모양의 보석, 자개 등을 박아넣는 기법) 작업, 조립, 사포질, 옷칠 등 복잡한 과정을 거쳐 탄생된다. 기술과 외형상 전통을 크게 벗어나지 않지만, 문양과 디자인은 ‘신지식인(1999년)’ 답게 현대적인 이미지를 함께 담고 있다. ‘우리 시대의 문화재’를 지향하는 그는 전통을 이어가되 후세에도 이 시대의 창작품을 남을 수 있도록 독창성을 가미하고 있는 것이다. 흔히 말하는 발전적 계승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그는 우리나라 소반의 역사를 통사적으로 집대성하는 꿈을 갖고 있다. 이런 사명감에도 그는 여전히 겸손한 장인의 모습으로 살아가려 한다.
1988년 전국에서 300여명의 장인들이 출전한 대회에서 ‘목공예 명장 1호’란 영광스런 타이틀은 얻은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때 명장에 대한 욕심을 내었더라면 불가능한 일이었죠. ‘마음을 비운다’는 게 어떤 것임을 알게 되었지요.”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고 해야 할까. 그는 스승보다 1년 먼저 명장의 자리에 올랐다. “진정한 작품을 위해서는 손재주가 아닌 가슴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스승 제갈재호 씨의 말씀을 항상 가슴에 새겼던 그는 매 작품을 완성하고는 항상 최선을 다하지 못함을 반성한다. 스스로의 질책이 창조적인 작품활동을 위한 원동력이 되는 셈이다. “이 정도면 됐다는 생각이 한번도 든 적이 없어요. 70% 정도의 공정을 거쳐 이번에는 잘 나오겠다 싶어도, 또다시 ‘아, 여기는 이게 아닌데’ 하는 부분이 나오죠. 이런 오류가 계속 반복되고 있는데, 도공들이 마음이 들지 않는 도자기를 깨어버릴 때의 심정과 다름없죠.”
불교집안에서 성장한 유 명장은 불교를 배우면서 자신의 작품세계를 동시에 심화시켜 왔다. 20대 초반에 불교청년운동에 몸을 던진 그는 대한불교청년회 지도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대불청 충남지구회장 6년, 중앙수석부회장 3년 등이 그의 열성적이었던 신행 이력을 대변한다. 이런 가운데에서도 유 명장은 충남도 공예협동조합 이사장직을 10년여 동안 맡아 공예업체에 대한 기술지도위원과 각종 대회의 심사위원으로 활약해 왔다. 또 충청대학교, 공주전문대 등에서 전통공예와 가구디자인에 대한 강의를 맡아 후학들을 지도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공주신행단체연합회 수석부회장을 맡아 지역신행 활성화에 앞장서고 있다.
불교사랑, 전통사랑, 이웃사랑에 쏟아붓는 열정으로 개인의 경제적, 시간적 희생을 마다않는 그는 세간에 사는 우바새의 중도적 삶이 어떠해야 할 지를 몸으로 보여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