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고구려사 강탈 시도가 노골화되고 있다. 중국 정부의 외교부 홈페이지에서 고구려사가 한국 역사로부터 삭제됐고, 최근에는 ‘고구려사는 중국사의 일부’라는 지침이 일선 교육기관에 하달됐으며, 같은 관점에 입각한 대학교재가 출간되기도 했다. 2005년에 있을 교과서 개정에 이런 관점이 반영된다면 중국의 청소년들은 고구려사를 자국사로 인식하며 자랄 것이고, ‘고구려 영토의 완전한 수복’을 꿈꾸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이와 같은 중국의 전방위적 고구려사 강탈 움직임에 놀란 정부는 ‘조용한 대응’이라는 방침을 적극적인 대응으로 전환키로 했다.
이에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의 문제점은 무엇인지 살피고, 역사왜곡을 주도하는 동북공정(東北工程, 동북지역연구프로젝트)의 실체를 알아본다. 아울러 중국 내에 남은 고구려와 발해의 불교유적을 통해 이들 두 나라의 불교문화사적 의의를 확인해본다.
●위험천만 고구려사 왜곡
중국이 고구려사를 자국의 역사로 편입하려 애쓰는 이유는 무엇일까. 만주 역사에서 고구려사가 차지하는 위상과 그 의의를 이해하면 답은 절로 나온다.
고구려는 고조선, 부여를 계승해 만주와 한반도 북부를 약 7백여 년간 지배한 고대국가다. 고구려의 유민과 영토, 사람들, 그리고 문화·정신은 다시 발해로 이어진다. 즉 고구려사는 고구려의 광활한 영토는 물론 고조선·발해의 역사와 결부돼 있는 것이다. 따라서 고구려의 역사를 잃게 되면 우리는 고조선과 발해에 대한 권리 또한 주장할 수 없게 된다.
그 영향은 치명적이다. 우선 우리는 단군의 자손이라는 민족적 정체성을 잃게 된다. 또 우리 역사의 시원이 백제 이후로 내려가고, 활동 영역은 한반도 안쪽으로 축소된다. 불교사적 측면에서의 문제 또한 심각하다. 고구려는 삼국 가운데 최초로 불교를 받아들여 백제와 신라에 전해준 초전(初傳) 국가다. 따라서 고구려사를 빼앗기면 불교의 초전(初傳) 성지를 잃는 것이며, 찬란했던 고구려와 발해의 불교문화 또한 남의 것이 되고 만다.
고구려사가 우리에게 역사·문화·민족적 측면에서 의의가 크다고 한다면, 중국에게는 영토문제와 조선족 통합이라는 실리적 측면에서 의미를 가진다.
고구려사를 편입하면 중국은 만주 지역 지배의 역사적 근거를 확보하게 돼, 남북통일 이후 제기될지 모르는 간도 영유권을 둘러싼 시비로부터 훨씬 자유로워진다.
그 효과는 영토뿐 아니라 그 안에 살고 있는 조선족의 정체성에도 영향을 미친다. 중국에서 조선족들은 고구려인으로 통한다. 중국인들이 조선족을 욕할 때 ‘고구려 놈들’이라는 의미의 ‘꺼우리 팡즈’라는 말을 쓸 정도. 그런데 고구려사가 중국사로 편입된다면 조선족들은 자연스레 중화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게 될 것이다.
고구려사가 우리 것임은 엄연한 사실인데 뺏고 뺏기는 것이 가능할까? 이에 대해 역사학자 이이화 씨는 “세계가 고구려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인식하게 되면 그것이 바로 역사를 뺏긴 것”이라며 “고구려사를 뺏기는 것은 민족 자존심에 큰 생채기를 남기는 것으로 절대 용납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동북공정의 실체
동북공정의 정식명칭은 ‘동북 변강(변방을 의미)의 역사와 그에 따라 파생되는 현상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 프로젝트’다. 추진 주체는 중국사회과학원과 동북 3성의 공산당위원회 선전부가 조직한 ‘동북공정영도협조기구’며, 2002년부터 5년 기한으로 추진되고 있다. 여기서 동북이란 중국의 동북지역에 해당하는 길림·요녕·흑룡강성을 뜻한다. 동북공정 이외에도 중국은 외몽고 지구, 남사군도 등지와 관련해 유사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데 동북공정은 그 중 중국이 가장 공들이고 있는 프로젝트다.
동북공정의 목적은 한반도 정세 변화 속에서 동북지역에 대한 안정적 지배를 확고히 하는 데 있으며, 그와 관련 역사적 근거를 확보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즉 밖으로는 남북통일 후 야기될 수 있는 간도를 둘러싼 영토분쟁에서 논리적 우위를 점하는 한편, 안으로는 조선족의 동요를 사전 차단하려는 의도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다.
그러나 고구려사가 중국사라고 하는 주장의 근거는 설득력이 없다.
중국은 △고구려가 한사군의 하나인 현도군에서 출발했다는 점 △중국에 조공을 바쳐온 종속국이었다는 점 △멸망 후 대다수 유민이 중국으로 흡수돼 고려나 조선과 무관하다는 점 등을 근거로 제시한다.
이에 대해 한국의 학계는 △고구려가 한사군을 축출해내며 성립한 국가로, 중국 왕조와 대결하며 대등한 수준까지 발전했다는 점 △조공 관계는 당시의 관행이며 교역의 한 방편이었다는 점 △고구려 유민의 대다수는 발해와 통일신라로 돌아갔다는 점 △중국 역사책인 <송사(宋史)>에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임이 명기돼 있다는 점 등의 사실(史實)을 근거로 맞서고 있다.
이와 같은 중국의 고구려사 강탈 시도는 고조선·발해사로 이어질 전망이다. 2004년 연구과제 가운데 ‘고조선의 역사와 발해의 귀속문제’가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발해 유적의 세계유산 등재를 위한 준비작업도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윤휘탁(고구려재단 연구위원) 박사는 “중국에게 국민 통합과 영토적 통합은 국가 존립에 직결되는 문제인데다 경제성장에 따른 중화주의의 부활로 패권주의적 색채가 더 강해질 것”이라며 “이에 감정적으로 대응하기보다는 중국과의 관계 등을 감안해 실리를 취할 수 있는 신중한 자세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중국 내 고구려·발해 불교 유적
고구려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전진(前秦)의 순도 스님이 고구려에 불경과 불상을 전한 372년. 375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사찰인 성(초)문사와 이불란사가 당시 수도인 국내성(중국 길림성 집안시)에 지어진다.
하지만 두 절의 위치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발굴 성과를 통해 미루어 볼 때 국내성 동쪽에 있는 동대자(東大子) 건물지가 성문사 터로 추정되고 있을 뿐이다. 동국대 문명대 교수는 “동대자 건물지에서 발굴된 석좌가 불상석좌대일 가능성이 있고, 함께 발굴된 연화문수막새와 귀면문수막새 등이 사원건축에 사용됐을 가능성이 크다”며 “절터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이 맞는다면 동대자 건물지는 우리나라 불교의 초전성지인 셈이다. 하지만 발굴 후에 공장 등의 건물이 들어서 더 이상 초전 성지의 자취를 찾을 수는 없게 됐다.
고구려의 불교는, 고국양왕이 391년에 불교를 신봉하라는 칙령을 내리고, 광개토왕이 392년에 평양에 9개의 절을 창건하는 등 왕실의 보호 속에서 일상생활로 빠르게 스며든다.
지난 7월 1일,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중국의 ‘고구려 왕국의 수도와 무덤군’에 포함된 장천 1호 고분의 예불도는 불교가 생활 속에서 어떻게 수용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다.
이 고분은 사원을 연상시키는 벽화로 구성돼 1970년 발굴당시에도 화제가 됐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무덤 안으로 들어가 고개를 쳐들면 바로 여래좌상과 눈길이 마주치도록 배치돼 있고, 여래좌상의 측면에는 부부가 오체투지로 배례 공양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보살과 연꽃, 비천, 기악천 등으로 장식된 천정부는 극락정토를 연상시킨다. 연꽃 속에서 머리를 내밀고 있는 어린아이들 모습은 연화화생을 통해 정토에서 새롭게 태어나고자 하는 염원을 보여준다. 삼실총, 오회분4·5호분 등 연화화생 표현이 나타나는 고분은 많다.
또 장천 1호 고분의 예불도는 고구려 초기 불상의 모습을 추정할 수 있는 단서가 된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초기 불상의 모습을 그림으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불도의 불상 모습을 근거로 할 때, 이와 비슷한 모습의 서울 뚝섬 금동불좌상이 고구려 초기 불상일 가능성이 높아진다.
한편 발해의 불교문화는 고구려의 것을 계승한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발견된 발해의 절터는 40여 곳으로, 주로 발해의 중심지역들에 집중돼 있다. 이 가운데 사찰 형태를 갖추고 있는 곳은 상경성(중국 흑룡강성 영안시)의 흥륭사가 유일하다. 하지만 청대(靑代)에 중건되면서 본래 모습을 많이 잃은 것으로 보인다.
불상은 대략 1천여 점이 발견됐다. 발해 불상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을 보여주는 양식은 전불(塼佛)이다. 틀빼기를 해서 구워 만든 전불은 상경성과 팔련성(중국 길림성 훈춘시)의 절터에서 많이 출토됐다. 둥글고 입체적인 형태를 띠고 있으며 고구려 원오리 절터에서 출토된 전불과 흡사해 고구려의 영향을 추측케 한다. 또 고구려 옛 영토 지역에 해당하는 팔련성에서는 이불병좌상(二佛竝坐象)이 발견됐는데, 같은 대좌에 자리한 두 불상이 바싹 붙어 있는 모습으로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형태다. 이불병좌상은 <법화경> ‘견보탑품’에서 석가·다보불이 나란히 앉아 설법하는 것을 도상화 한 것으로, 발해시대에 법화사상이 융성했음을 보여준다.
불교의 영향은 무덤 양식에서도 발견된다. 발해는 무덤 위에 건물을 짓는 풍습을 갖고 있었는데, 건물이 탑으로 바뀌어 독특한 형태의 양식을 보인다. 발해 번성기를 이끌었던 문왕의 딸인 정효공주의 무덤(중국 길림성 화룡현)이 그 대표적인 예다. 지금 온전하게 남아 있는 탑으로는 전탑 양식의 영광탑(중국 길림성 장백현)이 유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