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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입양 딸-아버지 눈물의 상봉
천태종이 잡아준 나눔의 손길
절절한 혈육애는 30년의 세월을 뛰어넘었다.
“네가 정말 막내딸 인숙이냐. 너무 미안하구나. 정말 미안해.”
7월 29일 인천국제공항 입국장. 1975년 딸을 덴마크로 입양시킨 아버지 김종대 씨(66·인천 용현동)는 천태종 사회복지재단 후원으로 30년만의 상봉이 이뤄진 순간 사죄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잠시도 딸의 손목을 놓지 않은채 연신 “미안하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31살의 아이 엄마가 돼 덴마크인 남편 닐스 베스터 고우 씨와 고국을 찾은 김인숙 씨(32·피아 핸슨)도 “친가족을 만나 너무 행복하다. 한국에 오길 너무 잘한 것 같다.”며 아버지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오빠와 두 언니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58년 한국전쟁 때의 불발탄이 터지는 사고로 오른팔과 왼쪽 손가락 두개, 한쪽 눈을 잃은 아버지 김 씨는 41년전 앞을 못 보는 부인을 만나 가정을 꾸렸다. 김 씨는 벽돌공장과 항만에서 막노동을 하고 부인은 식당 잡일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했다. 세 명의 딸과 아들 하나를 얻었지만, 끼니를 때우기도 힘들었던 김 씨 부부는 막내딸을 해외로 입양 보냈다. 장애인 부부가 네 자녀를 키우기에는 너무 힘이 벅찼던 것이다.

“인숙이는 식사 때마다 ‘수지 안머(수제비 안먹어)’ 하면서 토라지기도 하고 뜨거운 국물은 불어달라고 떼를 쓰기도 했어요. 입양이 결정된 뒤에는 좋은 옷과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부모님의 말에 동네 어른들에게 자랑하기도 했었지요. 어머니는 그렇게도 막내딸을 보고 싶어 했지만, 90년 먼저 세상을 떠나 마음이 아픕니다.”

둘째 언니 인영(37) 씨는 30년전 상황을 떠올리며 또다시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냈다.

하지만 인숙 씨를 입양 보낸 뒤에도 김씨 가족은 어려운 삶을 살았다. 김 씨는 부두 하역일을 하다가 힘이 부치자 고물상을 운영했고, 고생 끝에 10년전 18평 낡은 아파트를 마련했다.

그 사이 인숙 씨는 덴마크의 양부모 밑에서 우리말은 물론 한국에 대한 기억을 잊은 채 지냈고, 덴마크인 남편을 만나 두 살 된 아들을 둔 어머니가 됐다. 인숙 씨는 “‘왜 날 입양보냈을까’ 하고 생각했지만 부모님을 원망하지 않는다. 이렇게 만나 가족이 늘었으니 더 없이 행복하다.”고 말했다.

이번 만남은 덴마크 대사관 등을 통해 사연을 전해 온 둘째 언니 인영 씨의 편지를 전해 받은 천태종 덴마크신도회 고태정·이미림 부부가 덴마크 정부에 도움을 요청해 이뤄졌다. 천태종에서는 이번 만남을 위해 인숙 씨 부부의 체류비와 여행경비 등을 후원했다.

한편 김인숙 씨 부부는 8월 2일 단양 구인사를 찾아 천태종 총무원장 운덕 스님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고 4일 출국했다.
박봉영 기자 | bypark@buddhapia.com |
2004-08-06 오전 11:2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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