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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토(凍土)에서 떨고 있는 사람에게 봄을 가져다주는 것이야. 나무를 도울 생각이면 물과 비료와 햇빛을 주면서 그의 성장을 지켜보는 것이지. 내 역할은 그것을 절대 뛰어넘을 수 없어.”
백발 노 의사의 눈에 순간 힘이 서리더니 금세 ‘껄껄껄’ 웃음이 터져나온다. 웃음 앞에선 날카로운 눈매도 다무진 입술의 경계도 사라지고 만다. 그러나 호탕한 웃음 끝에 슬쩍 끼워넣는 한 마디가 있다. “그러니까 깨달은 사람만이 남을 깨우칠 수 있는 거지.”
한국정신치료학회 명예회장 이동식(85ㆍ동북정신과의원) 박사를 만났다. 환갑을 넘긴 저명한 대학교수들조차 그 앞에서는 연신 고개를 조아린다는, 한국 정신의학계의 거장이다. 한국사회에서 정신의학이라는 이름조차 생소할 당시부터 정신치료의 꿈을 다진 그의 정신의(精神醫) 경력은 63년. 가지 않는 길을 택하고 선택한 길을 소리없이 다져온 그가 60여년 경험을 토대로 이룩한 것은 바로 ‘도(道)정신치료’다.
“내가 나의 주인공이라는 자각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거야.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경지를 회복시키는 거지. 나에게 있어서는 내가 가장 존귀한 존재라는 자각을 이끌어내는 과정이야.”
그러나 정신질환의 환자들은 주체성을 구속하는 외부의 힘에 끄달리기 쉽다. 그는 환자가 주객일치를 이룰 수 있도록 환자의 마음속에 들어간다. 환자뿐만 아니라 환자가 자랄 때의 부모를 공감하고, 친구를 공감한다. 그리고 환자의 과거ㆍ현재 삶에 연관된 모든 사람들을 공감해 환자의 억압된 의식 발산을 이끌어 낸다.
그 같은 공감을 바탕으로 환자가 드러내지 않는 부분을 적당한 때에 지적하는 것이 ‘도 정신치료’의 핵심이다. 선사들이 제자의 망상이나 분별심을 제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는 직지인심(直指人心)으로 환자의 마음을 읽고 다스린다. 그가 “성숙한 치료자는 보살경지에 있다”며 치료자의 수도를 강조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는 그의 체험과 무관하지 않다. 이 박사는 우연히 대혜 선사의 <서장(書狀)>을 접한 이래 탄허 스님, 숭산 스님, 월운 스님 등과의 만남을 통하여 불교를 본격적으로 배우게 됐다. 그리고 정신과 전문의 후배들과 함께 경봉 스님을 친견한 후에는 환자치료와 중생제도의 근본이 다르지 않음을 깨달았다.
“경봉 스님을 만나 뵙고 한 말씀 청하니, ‘봤으면 됐지 얘기할 것이 뭐가 있냐’ 하시는 거야. 서양사람들이 말하는 관계라는 것은 개념화될 수 없고 오로지 지각될 수 있을 뿐이지. 그 지각이 바로 스님이 말씀하신 ‘목격’이었어.”
스님이 가르쳐 준 ‘무념의 경지’를 가슴에 새긴 이 박사는 이후 참선 수행을 통해 ‘걸림없는’ 치료자가 되고자 끊임없이 정진했다. 경봉 스님으로부터 ‘의사가 아니라 도인이 됐으면…’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근기가 남달랐던 그는 불교, 도교, 유교 등을 밀도있게 연구하면서 동양사상과 정신치료를 접목시키는데 몰두했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에서 180도 바뀌면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지. 이때 환자는 많은 억압된 감정과 생각을 표출하게 돼. 일단 이 감정들을 씻어내고 그 근원을 이해할 수 있으면 180도를 더 돌아 다시 시작한 위치로 돌아오게 되지. 이 때는 ‘산은 또 산이고 물은 또 물이다’야. 이때 사람의 인식이 크게 높아질 수 있어.”
서양에서는 19세기 말에 이르러서야 발견했다는 무의식과 인간의 마음. 그러나 이 박사는 “동양에서는 그것을 이미 2500년 전에 완전히 이해하고 치료 방법까지 명시해 놓았다”고 강조했다. 깨달음의 과정을 그림으로 그린 심우도(尋牛圖)만 보더라도 서양의 정신치료분석과 그대로 닮아있다는 것이 그가 제시하는 한 예다. 이 박사는 이 같은 연구를 거듭하면서 최고의 치료자는 부처ㆍ보살이고 최고의 목표는 정심(淨心)이며, 더불어 최고의 치료 방법은 ‘치료자의 정심’이라는 뜻을 명확히 했다. 그의 말이 빈말이 아니듯, 그가 주창한 도정신치료는 전세계 정신의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오는 8월에 열릴 학회 창립 30주년 국제포럼에도 내로라하는 세계적 거장들이 참석, 이 박사의 도정신치료법을 낱낱이 해부할 예정이라고 한다.
여든을 훌쩍 넘긴 그의 도전은 끝이 없다. 오전 10시30분부터 오후 6시까지 쉬지 않고 환자 진료에 몰입하는 한편, 늦은 밤과 주말에는 후학양성을 위한 모임에 ‘올인’한다. 이제 좀 쉬어도 되지 않을까 싶지만 “달마가 혜가를 만나기는 쉽지 않다”는 말로 대신하는 이 박사.
‘바깥모양을 취하지 말고(不取外相) 스스로의 마음을 돌이켜 비추라(自心返照)’는 그의 화두는 과연 언제까지 진행형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