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고 느린 걸음이었다. 대구에서 출발, 부산에 도착하기까지 꼬박 8일이 걸렸다. 기차를 타면 1시간 30분이면 족한 이 거리를 하루 평균 20km씩 걸어온 파란 2004 대원들이 7월 6일 밤, 천성산 내원사 입구에 도착했다.
“직접 걸으며 고속철도로 인해 파괴된 현장을 느껴보고 싶었다. 힘들었지만 빨리 달릴 때는 볼 수 없었고 느낄 수 없었던 것을 체험한 소중한 시간이었다.”(준희, 중앙대 3)
파란 2004 대원들은 하루 10시간씩의 도보로 발에 물집이 생기고, 코피를 쏟고, 허리가 끊어질 듯한 통증에 시달리며, 고속철도 공사로 사라져갈 많은 생명과 그 속에 깃든 삶을 만났다. 수고한다며 계란을 삶아 건네는 아주머니, 숙소를 구하지 못한 대원들을 위해 공장을 내어준 어느 중소업체 사장님…
장대비 속 산행 강행 안전에 ‘초비상’
‘고속철 2단계 공사 반대, 천성산 살리기, 느림의 소중함’이라는 주제로 진행된 ‘파란 2004’에는 청년환경센터, 사회당 학생위원회, 서울대, 고려대, 부산대 등 대학생 환경동아리 등에서 140여 대원이 참여해 총 150km를 걸었다. 강행군으로 허리뼈가 휘어질 정도의 심한 부상을 입은 대원 등 단 7명만이 귀가했을 뿐 흐트러짐 없는 발걸음으로 뚜벅뚜벅 걸어 천성산 자락까지 왔다.
7일, 아침부터 오락가락 하던 비가 산행이 시작되자 장대비가 되어 대원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행사 진행을 맡은 기획단, 안전요원 등은 초긴장 상태였다. 그러나 빗 길에 미끄러지고 비에 젖어도 화엄벌을 향한 느린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화엄벌, ‘아름답다’ 청정국토 이뤄지길…
“산을 오르니 지율 스님 생각이 납니다. 세 번째의 단식, 43일간의 삼천배, 화엄벌까지의 삼보일배 등 힘들고 어려운 과정 속에서도 뜻을 지켜오는 힘이 천성산의 아름다움에서 나오는 것 같습니다.” 박해웅(부산대 3) 조직국장은 단식중임에도 대원들이 가는 곳마다 전화를 걸어 불편함이 없도록 챙겨주었던 지율 스님을 떠올렸다.
우거진 숲길을 걸은 지 3시간 남짓. 앞서가던 대원들이 탄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화엄벌이었다. 박민주(성균대 2) 대원은 젖은 몸, 아픈 다리를 잊은 채 화엄벌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너르게 펼쳐진 화엄벌을 오가는 바람결에 이리 저리 몰려다니는 안개의 촉촉함과 일렁이는 푸른 풀빛은 모두 생명이었다. “천성산을 살리자아~ 도롱뇽을 살리자~” 파란 2004 대원들의 푸른 울림이 화엄벌에 울려 퍼졌다.
스스로 산이 되고 생명이 되어 천성산을 내려온 대원들은 지율 스님이 단식에 들어가기 직전까지 포크레인에 올라앉으며 공사를 막아 온 개곡 마을로 향했다. 마을 주민들과 함께 하는 고사와 잔치가 준비돼 있었다.
속도에 매몰된 우리 자연 ‘우리가 살려야죠’
늦은 시간까지 마을 주민들과 한마당 잔치를 벌인 대원들은 다음날, 공사현장에서 이후 지속적인 연대로 함께 공사 저지를 위해 노력하겠다는 상징물을 세우고 부산역에 도착, 해단식을 가졌다.
“속도에 매몰된 삶의 모습, 태도를 바꾸는 것부터 시작해야죠. 걸으며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일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우리가 희망이 되도록…”
“자연의 소중함 잘 알릴래요”
어린이신문‘여럿이 함께’ 대원들 취재
“이번 행사에 사고나 어려움은 없었나요? 이번 행사를 하면서 얻은 생각은 뭐예요?”
개곡마을에 들어선 파란 2004 대원 한 사람이 어린이들에게 빙 둘러 싸여 질문 공세를 받고 있었다. 녹음기를 들고 녹음을 하는 아이, 사진을 찍는 아이, 수첩에 무언가 적고 있는 아이 할걸 없이 모두들 분주한 모습이다.
파란 2004 행사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달려온 월간 어린이신문 ‘여럿이 함께’ 김해 지역 기자단이었다.
“200개가 넘는 산에 터널이 뚫렸다고 해서 놀랐어요. 친구들이 자연을 소중함을 느끼도록 대학생 언니 오빠들의 활동을 잘 알릴래요.”(경미, 김해 임도초 6)
은솔이는 “오늘 취재한 오빠들처럼 대학생이 되어도 자연보호에 관심을 가지고 활동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어린이 기자단은 마을 잔치 시간에 “도롱뇽과 천성산을 지켜서 내년에 도롱뇽을 한번 만나고 싶다”는 인사말로 박수를 받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