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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초(慧草) 스님은 철저한 계행으로 수행자의 귀감이 되고 있다. 특히 태고종 법맥의 큰 줄기를 형성해 온 전 종정 대륜 스님과 덕암 스님의 수행가풍을 이어 태고종 종도들의 사표가 되어 왔다.
본지의 요청으로 혜초 스님은 종정 추대에 즈음해 특별 법문을 내려주었다.
◇분별심 사라지면 조화로운 세계 열린다
너와 나를 구분 짓는 일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내 것도 없고 네 것도 있을 수 없어요. 우리는 함께 모여 사는 중생(衆生)입니다. 공업중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화합하고 공경하는 삶을 살아갈 때 공업중생을 이룰 수 있는 조화로운 세계가 열립니다. 조화로운 세계는 분별심이 없는 세계입니다. 분별심을 버리면 처처가 부처일 따름이에요.
많은 사람이 어떻게 살 것인가를 묻습니다. 그때마다 청정하게 살라고 말을 합니다. 깨끗한 마음에서 좋은 생각과 성품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라 했습니다. 순간순간 청정할 때 행복은 찾아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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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큰나무가 되기도 전에 조그만 바람에도 쓰러지는 뿌리가 얕은 나무와 같습니다. 뿌리가 깊어야 큰 나무가 됩니다. 신심이 돈독하지 않으면 사법(邪法)에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화엄경>에 “신위도원공덕모(信爲道源功德母) 장양일체제선근(長養一切諸善根)”이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믿음은 공덕의 어머니가 되어 모든 선업의 뿌리를 키운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믿음일 때라야 여래의 싹을 키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른 믿음은 수행의 근본이 된다 하겠습니다.
모든 일에서 ‘나’라는 존재는 항상 우선합니다. 내가 있고 난 다음에 선악도 있고, 감정도 있고, 깨달음도 있습니다. 나를 위주로 모든 것이 시작되지요.
그러면 나라는 존재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몸을 이루고 있는 땅, 물, 불, 바람 4대가 나일까요? 아니면 눈, 귀, 코, 혀, 몸, 뜻 육근이 나입니까? 이 몸뚱이를 움직이는 뭔가가 있습니다. 그것이 내 생각과 내 몸뚱이를 조절합니다. 그런데 나를 움직이는 그것은 모양도 없고 색깔도 없고 맛도 없고 냄새도 없습니다. 나를 움직이는 주인공이 누구인가를 잘 살피고 관찰하는 것이 수행의 시작이라 할 것입니다. 그 답은 석가모니 부처님도 말로 해주지 않았습니다. 말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수행을 통해 스스로 깨치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많은 수행을 하더라도 그것을 찾지 못하면 헛고생일 뿐입니다.
이 세상에 나고 죽는 것이 인간의 일만은 아닙니다. 일체중생에게는 모두 오고 감이 있습니다. 하지만 오고 가는 것을 시작과 끝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태양이 하늘에 오르니 그것을 낮이라 하고, 저 너머로 기우니 밤이라 할 뿐입니다. 그 태양의 오고감을 두고 시작과 끝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처럼 오고감으로 시작과 끝을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이 곧 여래의 오고감입니다. 제행(諸行)이 무상(無常)하지만 본래면목은 변함이 없습니다.
고불미생전(古佛未生前)
응연일상원(凝然一相圓)
석가유미회(釋迦猶未會)
가섭기능전(迦葉豈能傳)
옛 부처 생기기 전에
일원은 뚜렷이 밝았도다.
석가모니도 말하지 못했거니
가섭이 어찌 전할손가.
요즘 젊은 스님들은 힘들게 수행하려 하지 않습니다. 공부를 해도 쉽게 성취하려고만 합니다. 겉핥기 공부는 깊이가 없어요. 깊이가 없으니 실천이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수행자는 신해행증(信解行證)을 가슴에 새겨야 합니다. 우선 신심이 깊어야 수행을 할 수 있습니다. 신심이 돈독하지 못하면 쉽게 포기하고 중노릇 제대로 하질 못해요. 또 불교를 바르게 이해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증은 신해행을 모두 갖추었을 때 저절로 따라오기 마련입니다.
또 절에 여비 받으러 다니는 스님들이 있습니다. 어디서 왔느냐고 물으면 대부분 토굴에서 만행 나왔다고 하거든요. 심지어는 맘에 들지 않는다고 행패를 부리기도 합니다. 스님들이 이래서는 불교계에 희망이 없습니다. 만행을 잘못 알아도 한참 잘못 안 거예요. 만행이라는 것은 육바라밀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탁발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탁발이 스님들 배불리 먹으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탁발도 수행의 한 과정입니다. 그러니 만행과 탁발은 수행의 연속인 거지요. 수행을 할 때에는 목숨을 걸고 해야 합니다. 고행을 즐거워해야 비로소 불교를 알 수 있습니다. 편하면 도를 이룰 수 없습니다. 고행을 근본으로 삼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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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에서 살면서 부처님 덕에 밥 먹고 사는 것을 양잿물처럼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스님노릇 잘 하라는 말입니다. 참선으로 도를 이루든지, 경전공부를 잘해서 후학을 양성하든지, 의식을 잘해서 중생을 감화시키든지, 그것도 아니라면 풀이라도 뽑아 도량을 깨끗이 하든지, 제대로 된 스님이 되려고 노력하세요. 출가자는 인과를 잘 알아야 합니다. 출가자의 본분을 잊지 말고 정진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수행자는 바른 안목과 식견을 키워야 합니다. 세상과 스승을 바르게 보지 못하면 부처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바른 생각, 바른 행을 지닐 수 없습니다. 중생의 눈으로 보면 중생이지만, 부처의 눈으로 보면 부처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혜초 스님의 행장
◇계행 철저…禪敎 겸비한 태고종 역사 산 증인
혜초 스님은 스승인 전 종정 덕암 스님과 함께 청정비구의 몸으로 태고종에 남아 한국불교 제2종단으로 일군 태고종 역사의 산 증인이다. 1950~60년대 불교계가 ‘비구-대처’ 분규에 휩싸여 있을 때에는 금강산 유점사 서울포교당인 사간동 법륜사에 남아 종권 수호를 위해 뛰어다녔다.
그러면서도 스님은 철저한 지계와 수행으로 일관해 온 것으로 유명하다. 수십년간 법륜사 주지로 있으면서도 “물질을 가까이 하면 나태함이 찾아든다”며 재정에 관여하지 않았고, 지금도 매일 새벽 2시 <석문의범>에 있는 행수해와 사성례로 일과를 시작해 <금강경> <원각경> ‘보안장’ ‘법화경 약찬게’ ‘화엄경 약찬게’를 차례로 독송한 후 예불을 올린다. <아미타경> 독송과 참선 수행도 빠뜨리지 않는다. 스님이 태고종 스님들의 사표로 존경받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해인사 전문강원과 해인대학(현 경남대) 종교학과, 일본 화원대학 불교학과에서 수학하고 해인사, 선암사 선방에서 안거를 성만해 선교를 두루 갖췄다.
스님은 평소 종단 내외 큰스님에 대한 각별한 공경심으로 말없이 후학들에게 가르침을 베풀었다. 일흔 살이 넘은 나이에도 스승 덕암 스님이 원적하는 순간까지 곁에서 모셨다. 또 최근에는 40여년 동안 주석해 온 법륜사를 태고종 총무원이 입주할 한국불교전통문화전승관 부지로 기증하는 등 직접 모범을 보이기도 했다. 혜초 스님은 이후 태고총림 선암사 종정원에 주석하면서 가르침을 내린다.
혜초 스님은 종정 추대를 수락하면서 다음과 같은 법어를 내렸다.
일묵천하무이법(一默天下無二法)
태고청풍개화만(太古淸風開花滿)
월인천강경수청(月印千江鏡水淸)
청천백운만리통(靑天白雲萬里通)
일묵천하무이법이여
태고청풍이 활짝 피었구나
천강에 비친 달이 거울속의 물결까지 맑히니
푸른 하늘 흰 구름이 만리에 통했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