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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져 가는 전통한복의 아름다움을 현대로 끌어내 무대에 올리는 디자이너 그레타 리(60ㆍ본명 이용주). 연극 영화에 관심이 있던 그가 무대의상에 재미를 느낀 것이 한복 디자이너로의 새 출발이었다. 그때가 27세, 군대를 제대한지 2년 되던 그 해에 무대의상으로 한복을 만들며 디자이너의 길에 들어섰다.
그때부터 그레타 리의 ‘화두’는 전통복식의 재현이었다. 정확한 고증작업을 위해 관련학자들과 교류도 갖고 끊임없이 연구하며 벽화와 장신구 등 자료 수집에 몰두했다. 조선시대 이전의 의상을 원형 그대로 재현해 내는 것. 오로지 그 한 가지 화두만을 가지고 작업해온 30여년의 세월과 집념이 지금의 그를 만들었다.
# 수행자 마음으로 의상 제작
그레타 리의 전통복식에는 다양함이 존재한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의 의상을 한땀 한땀 수행하는 마음으로 직접 만들어냈다. 자료도 빈약한 삼국시대와 고려시대 의상을 재현해 낸 그레타 리의 저력, 그 밑바탕에는 사찰 벽화가 있었다.
그가 수소문 끝에 직접 중국에 건너가서 구해온 <보저사 명대수륙화(寶 寺 明代水陸畵)>(산서성박물관 간)는 첫째가는 스승이었다. 사찰에 참배 온 귀부인에서부터 고관대작, 스님, 보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의상들이 불법(佛法)과 함께 벽화에 살아 숨쉬고 있었다. 사찰 벽화 속 인물화의 섬세한 표현에 마음을 빼앗겨 벽화 속 의상 재현에 몰두했다. 삼매에 들 듯 무아지경에 빠져 천을 제작하고 옷을 만들었다. 왕실에서만 사용하던 금실을 넣어 짠 금직은 주문 제작했다. 의상에 사용된 문양은 중국·티베트·우리나라 왕실과 사찰에서 발견된 불교문양에서 찾아냈다. 그렇게 그의 옷장에는 전통복식이, 그의 화두가 차곡차곡 쌓여갔다.
사찰 벽화 속 ‘보살’ 의상은 올해 부처님오신날 행사에서 마야부인 의상으로 재현됐다. 그레타 리만의 ‘불교’ 의상들은 스님들 사이에 입소문이 나 부처님오신날이 다가오면 여러 사찰에서 의상제작을 의뢰해 올 정도로 유명하다. 범패를 공연하는 법현 스님(동국대 국악과 교수)의 가사에 들어가는 문양도 중국에서 직접 작업해 들여왔다.
사찰벽화 외에 고구려 고분벽화 등도 그의 스승이었다. 퉁구스 의상전은 그에게 잊을 수 없는 작업 중 하나였다. 요ㆍ금ㆍ원ㆍ청ㆍ몽골ㆍ티베트의 전통 의상을 재현하는 작업을 위해 중국 몽골 등을 수십 번 드나들며 자료 수집을 했다. 사찰 사원들도 빼놓지 않고 둘러봤다. 1998년 9월 경복궁 민속박물관에서 열렸던 퉁구스 의상전에서 재현해낸 궁중의상과 장신구는 그가 학계의 인정을 받게 된 밑거름이 됐다.
각종 장신구를 수집하고 있는 그의 애장품 가운데는 염주도 수십점 있다. 중국 황실의 화려한 108염주에 마음을 빼앗겼던 것. 그의 집에는 인도에서부터 중국 황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소재의 염주들이 소중하게 모셔져 있다.
그레타 리와 불교의 인연은 그가 어렸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절에 열심히 다니셨던 할머니의 손을 잡고 절에 가본 것이 불교와의 첫 만남. 어린 시절 스님에게 받은 목불은 지금까지 집에 고이 모시고 있다. 중국 몽골 인도 등에서 모셔온 부처님도 여럿이다. 사찰벽화에서 영감을 얻어 작업을 하는 그에게 부처님의 품은 빡빡한 일상에서 벗어나 잠시 쉬어가는 쉼터이다.
# ‘용의 눈물’ 사극 의상의 한획
그레타 리가 작업을 한 드라마나 영화들을 나열하면 “아, 그 작품!” 하고 알 정도로 유명한 작품들이 많다. MBC 사극 ‘조선왕조 오백년’에는 5~6년 간 참여해 의상작업을 도맡아 해왔다. 이미숙 씨가 열연한 ‘장희빈’, 뮤지컬 ‘살짜기 옵서예’, 연극 ‘춘향전’ ‘마의태자’, 영화 ‘연산군’, 창극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에서 그의 의상은 극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그의 전통 복식이 빛을 발했던 작품은 단연 KBS ‘용의 눈물’. 사극 의상의 한 획을 그었다고 평가받을만큼 질적 향상을 보였던 그 의상들이 그레타 리의 손끝에서 피어난 작품들이다. 티베트에서 사찰 탱화나 족자 테두리를 장식했던 불교전통문양인 모란 당초문을 금직으로 전통복식에 옮겼다. 금직은 1997년 그레타 리가 처음 재현한 것. 당시 송광사 사리탑에서 금직 조각이 발견됐다는 뉴스를 듣고 ‘바로 이거다’ 싶어 당장 드라마 의상에 활용했다.
한복 디자이너 그레타 리는 매주 변신한다. 한복 디자이너로, 메이크업 디자이너로, 민속학ㆍ메이크업ㆍ의상학 교수로. “한 가지 장기로 살아남기 힘든 세상”이라며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경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레타 리. 패션쇼를 할 때도 모델들의 헤어와 메이크업을 직접 해낸다. 그야말로 토탈 패션이다. 후학 양성에도 열심이다. 한성대 의상학과 4학년 졸업작품 담당, 경희대 무용과 민속학 강좌, 한국체육대 무용과 메이크업 강좌 이렇게 세 가지 색깔의 강의를 맡았다. 각종 한복 관련 단체 5개를 모아 한복사랑협의회를 만들어 한복 알리기에도 나섰다. 10월 13~15일에는 제8회 ‘한복의 날’ 기념 행사도 마련한다. ‘한복의 날’도 그레타 리의 주도로 만들어진 날이다.
그의 왕성한 활동에는 든든한 두 아들이 큰 보탬이 되고 있다. 한복연구가의 길에 들어서 공부하는 두 아들 윤민(30)ㆍ문재(27) 씨와 함께 ‘전통복식 재현’이라는 화두를 함께 풀면서 한복 디자이너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