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하지만 드러나지 않았던, 한국 비구니의 삶과 그 불교사적 의미에 대한 학문적 연구가 닻을 올렸다.
국내에서는 처음 열린 ‘한국 비구니’를 주제로 한 국제학술대회 ‘동아시아의 불교전통에서 본 한국 비구니의 수행과 삶’.
5월 20일부터 22일까지 3일간 한마음선원 안양 본원에서 열린 이번 학술대회는 한국 불교사에서 ‘주변’에 머물렀던 한국 비구니를 그 ‘중심’로 이동케 하는 학문적 토대를 마련한 역사적 전환점이기에 충분해 보인다. ‘한국 비구니’를 집중 조명한 첫 번째 국제학술대회로 한국 불교학을 연구하는 대표적인 서양 학자들과 동아시아 불교 연구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한국 비구니사를 정리하고, 그 속에서 새로운 주제의 논문을 다수 발표했기 때문이다.
또한 이번 학술대회는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maum.org)에서 생중계하고, 한국어와 영어로 동시통역돼 참석자들의 편의를 돕고 국제대회다운 면모를 보여주었다.
한국 비구니 주제 첫 국제학술대회
국내에서 한국 비구니에 대한 연구는 소수의 학자들에 의해 간헐적이고 산발적으로 이루어졌다. 1600년 한국 불교사에서도 비구 혹은 지배층 남성이 기록한 역사 속에 등장하는 비구니를 찾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이번 학술대회는 지난 2002년 3월 미국에서 열린 아시아 학회의 ‘한국 비구니에 대한 연구 : 학제간 연구의 전망’이라는 패널에 이어 국내 최초로 열린 비구니 주제 국제학술대회였다.
바바라 루쉬 교수는 이번 대회를 “한국 불교 역사의 물줄기를 바꿀 새로운 시대의 서막이고 혁명”이라고 말한다. 로버트 버스웰(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 교수 역시 “한국 여성들은 한국 불교 전통에서 가장 역동적인 힘이었지만, 그동안 그들의 목소리는 없었다”며 “이번 학술대회는 그들이 한국 불교에 기여한 것을 발견하는 자리”라고 설명했다.
서양 한국 불교학 연구 학자 총 망라
이번 대회에는 서양에서 한국불교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대거 참석했다. 최병헌(서울대) 교수도 “이번 대회는 로버트 버스웰, 존 죠르겐센(호주 그리피스 대학교), 헨릭 소렌슨(덴마크 코펜하겐 불교학연구소), 조은수(미시간 대학교) 교수 등 한국 불교를 전공한 대표적인 학자들이 총 망라돼 더 의미 있다”고 평가했다. 이외에도 박진영(아메리칸 대학교), 박포리(아리조나 주립대학교), 김영태(동국대), 최병헌(서울대), 김영미(이화여대) 교수와 혜원 스님(동국대 교수)은 모두 한국불교 전공자들이다.
한국 불교학계에 이미 널리 알려진 로버트 버스웰 교수는 보조 지눌 전문가로 1974년 송광사에서 출가해 구산 스님 아래에서 5년간 수행하기도 했다.
존 죠르겐센 교수는 한국 불교와 함께 단군, 유교 연구를, 헨릭 소렌슨 교수는 근현대 한국불교를 연구했다.
흥미로운 주제, 새로운 논문들
이들은 이번 학술대회에서 시대별, 주제별로 다양하고 새로운 논문을 쏟아냈고, 적극적인 논평도 이어졌다.
박포리 교수는 ‘현대 한국 비구니 사찰의 설립에 대한 고찰’에서 정화를 기준으로 비구니 승단의 형성에 대해 살폈다.
박 교수는 “비구는 대처-비구 간의 분쟁이 끝난 1970년대 이후에도 종권 다툼을 계속하고, 최근까지도 문중간의 주도권 싸움으로 끊임없는 분쟁에 에너지를 소모한 반면 비구니는 자신들만의 교육, 수행 시스템을 설립하는데 주력해왔다”고 평가했다.
비구에 비해 훨씬 열악한 상황에 놓여있었지만 비구니들은 개인의 혜택을 도모하기 보다는 공동 수행을 향상시키는데 주력했다는 것이다. 박 교수는 “이렇게 설립된 비구니 사찰에서 비구니들은 자신의 교리 공부와 선 수행을 비구승에게 의존하는 비율이 점점 줄어들고, 결국은 자족적인 그룹이 됐다”고 밝혔다.
논평을 맡은 죠르겐센 교수는 “이 같은 독립적인 생활양식이 지금의 비구니 사찰을 이끌어낸 동력”이라며 “비구니 존재의 중요성은 종단에서도 다루어야 할 중요한 문제”라고 말했다.
이번 학술대회에서는 한마음선원장 대행 스님에 대한 논문도 4편이나 발표돼 눈길을 끌었다. 특히 혜선 스님(동국대 선학과 박사과정)은 ‘대행 스님의 수행관’에서 대행 스님의 수행관을 ‘주인공 관법’이라고 규정하고, 수행의 단계와 특성을 살폈다.
이에 대해 로버트 버스웰 교수는 “대행 스님의 수행관에서 주인공과 믿음의 상호작용은 보조 지눌의 ‘회광반조(廻光反照)’에, ‘세 번 죽음’은 보조 지눌의 ‘정혜쌍수’의 가르침과 맥을 같이 한다”고 논평했다.
또 청고 스님(한마음국제문화원)은 ‘대행 스님의 함이 없이 하는 도리’에서 대행 스님이 자주 사용하는 ‘함이 없이 한다’는 표현에 대해 고찰했다. 이에 대해 죠르겐센 교수는 “보다 객관적인 자세를 취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죠르겐센 교수는 “정신분석학이라는 과학적 사고로 종교를 설명하기는 어렵다”며 “철저한 근거를 제시해야 과학교육을 받은 세대에게 다가갈 수 있을 것”이라며 향후 연구에서 보완해 주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한편 기독교 목사의 딸인 동시에 대표적인 신여성이었던 김일엽 스님(1896~1971)이 불교에 귀의한 삶을 통해 불교의 근대성을 고찰한 박진영 교수의 ‘김일엽:한국 불교와 근대성의 또 하나의 만남’은 학술대회 참가자들이 가장 관심을 보인 논문 가운데 하나였다.
박 교수는 “작가, 여성운동가, 여승 등 김일엽의 다양한 삶은 불교적 사고양식이 근대성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철학적 근거를 제공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고 주장했다.
또 박 교수는 “김일엽이라는 여성의 경험을 불교와 근대성에 대한 담론에 포함시키는 것은 근대 한국불교를 폭넓게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요소”라고 덧붙였다.
무엇을 남겼나
이번 학술대회는 그동안 불교사에서 소외됐던 비구니 역사를 발굴, 한국 비구니 승단의 사회적 위상에 대한 학문적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 개최됐다. 이번 대회에서 발표된 연구 성과들은 이날 논평자들의 지적사항 등을 수용해 계속적으로 연구되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6월에 있을 세계여성불자대회를 비롯해 향후 비구니 연구에서 이번 대회의 연구 성과를 공유한다면, 보다 깊고 넓은 한국 비구니에 대한 연구가 가능할 것이다.
또 이번 대회에서는 비구니 연구에 비구스님들의 관심과 참여가 절실함을 느끼게 했다. 현재 비구니 연구의 주체는 비구니스님이나 재가학자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국 불교에서 비구니 위상문제는 비구·비구니가 모두 고려해야 하는 중요한 문제인 만큼 비구스님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필요한 시점이다.
이번 학술대회에는 월운(동국역경원장), 인환(동국대 명예교수), 법산(동국대 정각원장), 보광(동국대 불교대학원장), 종림(고려대장경연구소장), 광우(前 전국비구니회장), 명성(현 전국비구니회장) 스님, 홍기삼(동국대) 총장 등 연인원 1천여명이 참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