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9. 7.26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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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임제종 스님들 ‘나눔의 집’ 방문하던 날
“죄송, 부끄럽다는 말씀밖에…”
일본 식민지라는 설움과 아픔이 오늘에도 살아있는 경기도 광주 나눔의집, 일본군 위안부로 징용당한 피해할머니 12명 모여 사는 이 공동체에 ‘과거사 참회’를 하겠다며 5월 20일 일본에서 3명의 스님이 찾아왔다. 청정한 생활과 엄격한 수행으로 잘 알려진 일본 임제종의 대본산 고오가쿠지(向嶽寺) 관장(총림 방장에 해당) 미야모토 다이호오(宮本大峰) 스님과 도쿄대(東京大) 불교청년회 선원장 고지마 타이잔(小島岱山) 스님 등 3명의 스님이었다.

미래학불교학회와 한국불교대원회가 주최하는 한일불교학술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한 미야모토 다이호오 스님 일행이 첫 행선지로 선택한 곳이 바로 나눔의집이었다. 미래학불교학회의 초청을 받은 미야모토 다이호오 스님이 사죄하고 싶다는 말과 함께 그렇게 해달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나눔의집이 광주에 둥지를 튼 98년 이후 이 곳을 다녀간 일본인은 2만여명. 대부분 단체로 찾아온다. 더러 자원봉사를 하겠다고 찾아오는 이들도 있다. 지금도 일본인 한명이 1년째 할머니들의 수발을 들고 있다. 하지만 2만명 안에 스님은 없었다. 미야모토 다이호오 스님이 첫발을 디딘 것이다.

안내를 담당했던 장휘옥 미래학불교학회장은 미야모토 다이호오 스님을 제방의 선객들이 수행력을 인정하는 일본의 큰스님으로 면면을 소개했다. 평생을 고오가쿠지에서 간화선 수행에 매진하면서도 손수 손빨래를 하는 등 청빈한 수행자라고 했다.

스스로 선택한 첫 일정, 나눔의 집에서 미야모토 다이호오 스님은 충격에 휩싸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자세한 내막을 모르고 있었던 탓이다. 이 곳에서 생활하다 고인이 된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위패가 모셔진 법당을 참배하면서 입술을 곱씹는 스님의 모습은 내면의 혼란을 스스로 가다듬고 있음을 보여줬다.

그러나 곧이어 할머니들의 생생한 증언을 담은 비디오를 상영한 미야모토 다이호오 스님의 표정은 이내 굳어버렸다. 97년 세상을 떠난 강덕경 할머니가 임종 직전 일본 정부에 항의하러 가야겠다며 여권을 가져오라던 장면을 볼 때는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일행의 나눔의집 방문 일정은 이제 어귀에 불과했다. 아직도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 참관과 할머니들을 만나는 시간이 남았다. 곧바로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할머니들의 한이 서린 그림과 강제 징용당한 위안부의 아픔이 담긴 기록물을 접한 30여분간 일행은 안내자의 설명을 듣고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말할 수 없는 충격입니다. 전쟁은 참으로 어리석고 바보 같은 짓이에요. 여기 할머니들이 임종 순간에도 분노를 삭이지 못하는 것을 보니 부끄럽고 부끄럽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미야모토 다이호오 스님은 역사관을 나서면서 붉게 상기된 얼굴로 소감을 털어놓았다. 지극히 자제했던 감정을 내보이는 순간 격정의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나눔의집 곳곳의 조형물을 마주할 때마다 합장례를 올리는 모습에서는 수행자의 기품이 배어난다.

나눔의집에서 생활하는 할머니들을 만날 때가 됐다. 도착한지 1시간여가 지난 후였다. 미야모토 다이호오 스님은 할머니들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 주름이 깊게 패인 손을 맞잡으며 스님은 “죄송하다”는 말을 계속했다. 그러나 할머니들에게 그 말은 전해지지 않았다. “일본놈들이 나를 중국으로 끌고 가서는…” 강일출(77) 할머니는 말을 맺지 못했다. 손도 잡으려 하지 않았다.

어색한 침묵을 깨고 미야모토 다이호오 스님이 말문을 열었다. “저는 일본 정부를 대신해 온 것도 아니고, 일본 불교를 대표해 온 것도 아닙니다. 일본인의 한 사람으로, 수행자의 한 사람으로 여기에 왔습니다. 여러분이 평생을 참아온 것은 대단한 수행이었을 것입니다. 저의 사죄가 여러분의 한을 조금이라도 누그러뜨릴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안내자의 통역을 듣던 박옥련(85) 할머니가 화답했다. “모든 것을 버리고 나눔의집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힘이 됩니다. 와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러나 강일출 할머니는 달랐다. 얼굴 근육이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일본 정부가 과거의 잘못을 사죄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후손은 이 문제로 또다시 반목하고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과 일본이 진정한 동반자가 되기 위해서는 과거를 제대로 정리해야 합니다.”

최고령인 이옥금(91) 할머니가 “개인으로 오셨으니 화를 낼 수만은 없는 일”이라며 가벼운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전쟁은 나와 남을 구별하는 데서 생기는 불행한 일입니다. 어떠한 이유로도 설명될 수 없는 일입니다.”

미야모토 다이호오 스님의 이말을 끝으로 일행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할머니들도 스님의 손을 잡고 전송을 나왔다.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자리에는 일본과 한국이라는 국적은 더 이상 필요치 않았다. 하지만 강일출 할머니는 끝내 나오지 않았다.
박봉영 기자 | bypark@buddhapia.com |
2004-05-24 오후 1:3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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