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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방울이 오락가락하는 5월 10일 과천에서 그를 만났다. 아내가 컴퓨터를 배우러 갔기 때문에 헌 의류를 모아 파는 가게 ‘작은세상’(윤 씨의 사업장)은 보여줄 수 없다는 그와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우선 자판기 커피를 한잔 빼고 앉았다.
“나 같은 사람만 있으면 경제는 다 망해요. 팔아주지 않으니까요. 맨날 재활용, 재활용만 하다보면 공장이 망하고 직장이 사라질 거 아닙니까. 내가 최고선이 될 수 있지만 최고악이 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세상일이 양면적이란 것입니다. 그것을 인정해야죠.” 물건 재활용과 나눔은 단지 독점적인 소유와 과소비를 비판하는 일이 아니란 것이다. 그는 나와 남을 인정하고 서로 대화하며 이해할 때라야 재활용이나 나눔도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러려면 상대의 장점을 발견해야 하는데, 윤 씨는 그것을 노동자들에게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일에 비유했다. "진짜 노동자를 보면 험상궂어 보입니다. 그러나 편리한 가전제품, 아름다운 옷을 만드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그 사람들이죠. 공사판에서 단련된 몸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우리는 세상의 거짓에 속아서 그것을 모릅니다.” 윤 씨는 아름다운가게의 ‘나눔’을 내 마음 속의 편견을 버리고 진실과 마주치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나눔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는 윤 씨에게는 한평생 따라다닌 거지, 넝마주이, 구두닦이, 노점상, 창녀촌 뚜쟁이, 권투선수의 고통이 있었다. 그는 서울에서 큰 포목상을 하는 윤상인 씨의 아홉 아들 중 여덟 번째로 태어났다. 6·25 전쟁 중 형제 태반이 죽거나 월북하는 고통을 겪으면서 그의 집안은 철저하게 몰락한다. 그 결과 그에게는 초등학교 3년 중퇴란 학력이 암시하듯 험난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열 살 무렵부터 거지생활을 했는데, 어느 겨울날 아침 가게 앞에 앉아 추위를 피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거지새끼가 어슬렁거리면 재수가 없다’며 세수 대야에 담긴 구정물을 내 몸에 쏟더군요. 내가 조금만 나이가 많았어도 ‘칼질’을 해 버렸을 겁니다.” 윤 씨는 이런 기억을 칼같이 남을 해치고 괴롭히는 ‘응어리’라 부른다.
“내 친구 중에는 그 응어리 같은 것 때문에‘넥타이공장(사형장)’에 간 사람이 많아요. ‘막가파’라면 사람들은 천인공노할 인간이라 욕하는데, 우리는 충분히 공감이 가요. 희망이 없기 때문이죠. 희망이 없으면 울분이 생기고, 울분은 타인을 해치게 되죠. 고층 아파트 안에서만 살 수 있나요? 나누고 섬김이 없는 사회는 희망이 없습니다.”즉 나눔은 싸움과 공멸을 화해와 공생으로 바꾸는 법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윤 씨는 어떻게 나눔의 길을 선택했는가? 그는 50년 전 어떤 기억으로 돌아갔다. “거지로 떠돌다 보니 며칠을 굶주렸는지 기억을 못할 지경이었습니다. 막 기절을 하려는 찰나 누군가 인절미 두 조각을 주더군요. 허겁지겁 배를 채우고 보니 그 사람은 무릎 밑의 다리가 잘려진 여자 거지였습니다. 자기도 하루 종일 기어 다니며 구걸해온 떡을 자기보다 더 딱한 이들과 나누는 그 여자에게서 정말 평화로운 미소를 보았습니다. 그때 나는 아마 부처님을 만난 것 같습니다.”
그는 이때 비로소‘나누는 마음에서 평화가 나온다’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가난한 사람끼리도 나눌 수 있다는 믿음은 60~70년대 합숙소 시절을 견디고 80년대 이후 ‘넝마공동체’를 만드는 힘이 되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공동체의 운영 방향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늘 무상하게 변화해서 영구불변한 게 없다는‘제행무상(諸行無常)’은 넝마공동체가 희망공동체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한번 넝마주이가 영원하다면 희망이 없겠지요. 얼마든지 노력한다면 바꿀 수 있는 거죠.”
‘나와 남이 다르지 않다’는 자타불이(自他不異)의 가르침도 나눔과 섬김의 기본이 된다는 것이다.
윤 씨는 한국불교에 대해서도 할 말이 있는 듯 했다. “육바라밀 중 첫번째인 보시에서도 알 수 있듯 나눔은 불교의 기본정신입니다. 그러나 요새는 그런 정신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아요”라고 지적한 그는 “집안에 못 쓰는 물건을 이웃과 나누는 일에 불자들이 나서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www.beautifulstore.org, (02)3676-1004 )
■‘아름다운가게’는?
아름다운가게는 헌물건, 필요없는 물건을 기증받아, 깨끗이 수리한 후 판매하는 나눔과 기부의 재활용품 판매장이다. 2002년 10월 서울 안국동에 1호점이 개설됐고, 현재 전국 20개 점포가 운영중이다. 연극인 손숙 씨, 성공회대 박성준 교수가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