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화가루가 날리고 아카시아 꽃이 하얗게 피어나면 어김없이 ‘부처님 오신날’이 가까워졌음을 감지한다. 해마다 맞이하는 날이지만 올해는 조금 다른 느낌으로 이 날을 맞이해야 할 것 같다. “왜 그래야 하는데?”라고 반문한다면 거저 ‘쉬는 날’이라는 정도의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이 많다. 그런 사람들은 부처님께서 오신 뜻이 무엇이고, 어떻게 사는 것이 부처님처럼 사는 것인가 하는 것은 불교도들만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올해의 ‘부처님 오신날’은 조금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도 낌새를 못 알아챈다면 동사섭이 필요한 때라고 말해 주고 싶다. 중생을 섭수하는 일은 보살의 최우선 과제다. ‘부처님 오신날’을 맞이하면서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고고성(呱呱聲)에서 그러한 과제를 새삼 확인해 보자는 것이다.
탄생게로 잘 알려진 이 고고성은 불교의 기본 가르침이다. 그런데도 불교도조차 잘 못 이해하는 경우가 있다. 심지어 불교를 폄하하는 이들은 저만 잘 났다고 뻐기는 독선으로 곡해하는 경우도 있는 모양이다. ‘우리 모두’라는 보편적 인간성, 그것이 가장 존귀하고 존엄하다는 말로 이해했으면 좋으련만…. 인간의 존엄을 말할 때 우리는 대개 르네상스를 떠 올린다. 하지만 그 보다 더 포괄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 바로 이 탄생게라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왜냐하면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아’는 ‘참 나’이기 때문이다. 그 점은 자기본위의 시대를 추구하면서도 자기상실이라는 아픔을 경험한 서구인들의 관심이 이 쪽으로 쏠리고 있는 현상에서 유추할 수 있는 일이다.
쉽게 끝날 것 같지 않는 이라크 전쟁, 그 전쟁이 이제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미군 및 영국군의 이라크 포로학대로 아랍인들의 분노가 들끓고 있다는 보도가 심상치 않아서 하는 말이다. 그런데다가 뉴욕타임즈 인터넷판의 보도는 가해 당사국으로까지 파문을 증폭시켜 놓았다. 사진속의 인물이 바로 자신이라고 밝힌 이라크 포로의 생생한 증언을 바그다드 현지에서 취재해서 대서특필한 때문이다.
무슬림에게 나체는 치욕이라고 한다. 그런 사실을 알면서 가혹행위를 자행했다는 것에 그들은 더욱 분노하고 있다. 심지어 이라크 포로들만이 아닌 모든 아랍인들의 수치로 여기기까지 한다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무슬림에 대한 서구인의 증오를 보여주는 증거”라며 연합군의 철수를 촉구하기도 하였다. 부시의 말처럼 정말 “부끄럽고 용납될 수 없는 일”임이 분명하다.
이쯤에서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의미를 재확인 해보자. 전쟁이라는 특수 상황이라고 해도 무시되어서는 안 될 것이 인권임은 아무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그 만큼 인권은 절대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행히 우리 사회에는 그런 인식이 널리 확산되어 있다.
그런데 혹시 그것이 가식이나 위선은 아닐까? 우리 주변에는 아직까지도 조선족, 외국인 노동자, 3D업종 종사자에 대한 차별이 엄존하고 있다. 폭력과 감금, 산업재해를 입은 자들에 대한 무관심, 악덕 사업주들의 행패 또한 여전하다. 심각한 인권유린임에도 우리들은 늘 침묵에 가까운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그러고서도 이라크 포로들의 학대를 말할 수 있을까?
잊혀져서는 안 될 사람들, 그들의 인권이 유린당하지 않도록 우리가 나서야 한다. 그들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함께 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라는 인식으로까지 확산되게 해야 한다. 지난해 광화문을 밝힌 촛불처럼 말이다. 그래야 섭수라 할 수 있다.
최성렬(조선대 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