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에는 큰 나라들이 많지만 불교가 전파된 나라는 그렇게 많지 않다. 석가모니부처님의 고향인 인도와 옛 중국과 같은 큰 대륙에 불교는 거의 없어진 상태이다.
1959년 중국의 침략으로 인해 망명한 일부 티베트 사람들이 인도의 불교를 되살리고 있으며, 전 세계적으로 부처님 가르침을 전파하는데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티베트는 7세기 때부터 불교를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 불교는 오늘날까지 티베트 사람들에게 문화이자 생명처럼 자리 잡고 있다. 부처님 말씀대로 티베트에서 불교는 본인이 잘 배우고, 살피고, 실천하고 충분한 경험을 쌓은 것을 바탕으로 남을 가르치거나 봉사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티베트의 불교는 그 자체가 바로 티베트의 문화이다. 그래서 티베트에서는 생활은 그 자체가 곧 불법의 실천이다. 예를 들자면 애기가 태어나서 이름을 지을 때조차도 티베트인들은 스승들에게 의지하여 아이의 성을 지으며, 성도 아버지 성을 따르지 않고 스승의 성을 따르는 것이 보통이다. 티베트 사람들은 스승 찾는 것을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일로 생각하며 스승에 대한 믿음과 존경심도 절대적이다. 그래서 스승들을 살아있는 부처로 생각한다.
그분들의 가르침의 핵심은 불교의 인과에 바탕을 둔 보리심에 대한 실천이다. 인과에 대한 믿음은 거의 절대적이어서 티베트에서는 욕 조차도 ‘인과를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 제일 모욕적인 욕설이다. 이렇게 인과를 믿는 티베트 사람들은 현생보다는 내생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바로 이번 생에 이 윤회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평등한 마음가짐, 일체 중생들을 자기 어머님이라고 생각하는 자비심 등의 보리심 공부를 바탕으로 육바라밀의 실천을 행하는 것이다.
현재 티베트의 인구는 600만 명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티베트 불교에 대해 관심을 가진 사람은 그 배가 훨씬 넘는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는 직접 티베트에서 스승을 찾기 위해 유학을 떠나는 사람들이 많다. 그 이유는 전에 그들이 티베트를 여행하다가 자기 나라와 비교할 때 사람이 못살 정도의 그 척박한 땅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고통스럽고 불편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살고 있는 티베트인들이 항상 미소를 잃지 않고 행복하게 생활하는 비밀이 무엇인가에 대한 호기심을 갖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티베트 불교가 세계적으로 영향을 끼치고 있는 위대한 힘은 지식이나 말로써가 아니라 바로 진실한 마음으로 실천하는 데 있는 것이다. 즉 인과를 바탕으로 생활해야 만 일상생활 속에서 욕심이나 시기심, 자만심 등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는 것이다. 티베트인들이 사원 곳곳에 펼쳐진 탕카(탱화)와 달쪼(경전을 새겨 넣은 깃발), 마니꼴로(윤장대)를 돌면서 경전을 외우고, 오체투지를 하면서 자신을 낮추는 행위를 하는 것은 바로 일상생활에서 불법을 실천하는 방법들이다. 이것들이 때로는 형식적이고 기복적으로 보이겠지만, 티베트인들에게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수행과 공덕을 쌓은 일이다.
요즘 전 세계적으로 티베트 불교에 대한 관심을 많이 갖고 있는 이유 가운데 가장 중요한 하나는 티베트의 스승들이 자기가 실천한 내용만을 남에게 가르치기 때문이다. 불교의 위대한 힘은 불자들의 옷차림이나 지식이나 말로써가 아니라 오직 진실한 마음으로 실천하는 데 있다. 즉 인과를 바탕으로 한 일상생활 속에서 욕심이나 시기심, 자만심 등을 줄이게 할 수 있는 법을 배우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부처님 가르침을 전체적으로 배우지 못하면, 기도하거나 절하거나 공양 올리는 등을 완전하게 깨닫기 위해 보리심으로 하지 않고, 이기심으로 무병장수, 사업성취에만 집착해서 하게 된다. 이는 마치 병에 걸려서 약국이나 병원에 찾아가서 그 병이 완전하게 나을 수 있는 약을 지어달라고 하지 않고, 마취제만 맞고 돌아오는 것과 같다.
수행이라는 것은 번뇌의 치료제가 되는 것을 말하는데, 보통 절하거나 기도하거나 참선할 때, 자기 한테 있는 번뇌가 얼마나 줄어드는지를 살펴야 한다. 번뇌가 줄어든다면 이번 생의 일뿐만 아니라 걸림 없이 남에게 베풀 수가 있어서 늘 행복할 수 있다.
달라이 라마께서 한번 미국에 방문하셨을 때, 어느 기자가 질문하기를 “요즘 중국의 장쩌민 때문에 고생이 많죠, 힘들지요?”라고 했다. 그에 대한 답변으로 성하께서는 “중국의 장쩌민 하고 우리 두 사람의 얼굴을 보고 누가 더 힘든지 알 수 없느냐?”라고 웃으면서 말씀하셨다. 이러한 차이점은 누가 더 번뇌를 많이 품고 있는지를 말하는 것이다.
초펠 스님(부산 광성사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