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을 중시하는 영국인들의 대부분은 탄생과 결혼, 그리고 죽음을 아직도 관습적으로 교회에서 맞이하지만 이미 그들에게 영국 성공회나 가톨릭 그리고 개신교는 더 이상 위안을 주지 못한다. 따라서 종교인들의 수는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때로는 비이성적이고 맹목적인 믿음을 강요하는 기독교를 대치해 줄 대안으로 사색과 산책, 독서와 토론을 즐기는 영국인들에게 불교는 이성적인 종교로서 아주 서서히 접근해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영국으로의 불교 유입은 제국주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시기에 인도나 동남아, 네팔, 티베트 등지에서 유입된 다양한 불교 문화재들과 여러 가지 언어로 쓰여진 불교 경전들을 분류하고 정리하면서 영국 불교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따라서 대학을 중심으로 문헌학자나 고고학자 또는 사학자들을 통해서 불교가 조금씩 학문적으로 이해되기 시작한 것이다.
남방불교와 관련해서는 1881년 당시 런던대(UCL)에서 팔리어와 불교를 강의하던 리즈 데이비스가 결성한 팔리성전협회(Pali Text Society)에 의해서 대부분의 팔리어로 쓰여진 경전들이 로마자화로 편집 교정되었으며 상당수가 영어로 번역되고 있다.
대승불교는 19세기 중엽, 옥스포드대학에서 독일인 막스 뮐러에 의해서 산스크리트어와 불교가 강의되기도 했다. 그리고 에드워드 콘즈(1904~1979)는 평생을 <반야바라밀다심경> 연구에 몰두한 학자였으며, 죽을 때 그의 부인에게 자신을 화장하여 소풍 가서 그의 재를 숲에 뿌려달라고 유언했다는 일화도 있다.
밀교 또는 후기불교는 필자가 공부했던 런던대 소속 동양아프리카연구소(SOAS)에서 데이비드 스넬그로브에 의해서 1950년부터 티벳어와 밀교가 강의되어져 왔고, 그 전통은 그의 제자이며 필자의 스승인 타데우스즈 스코룹스키에 의해 이어지고 있다.
이밖에도 여러 학자들이 불교언어로 쓰여진 경전을 문헌학적인 연구방법을 사용하여 접근하고 있다. 그리고 1996년, 영국 전역에서 불교학을 공부하거나 강의하는 사람들의 모임인 영국불교학회(UK Association for Buddhist Studies)가 설립되었다. 학문적인 면에서만 보자면 영국인들에 의해 150년 이상동안 축적된 불교의 연구 성과물은 오랜 전통의 불교국가인 한, 중, 일을 훨씬 능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국인들에게 불교는 아직도 불교를 가르치는 학자나 배우는 학생들의 전유물이다. 아시아계를 제외하고 약 20만명의 영국인들만이 정기적으로 불교신행 활동을 하고 있지만, 최근 들어 상류층이나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불교서적이 꾸준히 읽히고 있으며 요가나 명상, 참선 등이 행해지고 있다.
필자가 처음 유학 생활을 하기 시작한 1992년도에는 책방의 한 구석에서 일본인 스즈끼 박사의 저술인 일본 선불교와 같은 약간의 불교 서적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2002년 귀국할 때 들린 책방에서는 훨씬 다양하고 폭 넓은 불교 서적들, 특히 달라이 라마나 망명한 티베트 스님들이 저술한 대승불교나 밀교의 관련 서적들을 상당수 발견할 수 있었다. 이러한 티베트 스님들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최근 영국에서의 불교 경향은 티베트 불교쪽으로 많은 관심이 몰리는 것처럼 보인다.
불교의 학문적 연구나 불교서적의 출판과는 별도로, 대중적인 포교를 위해서 대영불교연합 (British Buddhist Association)이 런던시내에 있는 자그마한 건물 속에 불상을 모시고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불교 포교나 학술적인 세미나 등의 다양한 활동들을 펼치고 있다. 그리고 티베트, 대만, 스리랑카, 일본 등의 스님들이 런던 시내나 교외에 절을 세우고, 그들의 전통불교를 설파하고 있다. 한국의 조계종에서도 런던에서 남쪽으로 떨어진 곳에 위치한 뉴몰든 코리아타운 근처에 연화사라는 이름의 절을 짓고, 한국 교민들 뿐 아니라 영국인들에게 까지도 한국의 선불교를 알리기 위해 힘쓰고 있다.
끝으로 필자가 살던 동네에 이웃집 중년의 한 영국인 남자는 암 선고를 받고 죽음을 눈앞에 둔 상태에서 필자에게 죽기 전에 기독교가 아닌 불교를 알고 싶다고 해서 한 권의 불교 개론서와 티베트 스님이 저술한 <티베트인들의 삶과 죽음>이라는 책을 그에게 선물한 적이 있었는다. 그분은 이미 고인이 되었지만 ‘무엇이 평범한 이 영국인의 마음을 움직여서 불교를 알고 싶게 했고, 불경을 읽으며 생을 마감했을까?’ 라고 자문해 볼 때, 21세기에는 영국에서도 불교가 그 동안 축적된 학문적인 영역에서의 발전과 더불어 일반 서민들의 마음에도 서서히 침투하리라고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권도균 인도티벳불전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