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6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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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심 버리고 자연을 빚는 천한봉 도예명장
사진=박재완 기자
“조선 찻사발의 아름다움은 평범 속의 미, 무의식의 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무의식은 단순히 ‘생각 없음’이 아닙니다. 감히 ‘몰아(沒我)의 경지’라고 할 수 있을까요. 흙과 물과 불이 하나가 되는 순간에 나타나는 완전한 아름다움입니다. 자연과의 합일(合一)이죠.”

4월 22일 경북 문경시 진안리 문경요(聞慶窯). 20~30대 청년들 사이에서 열심히 흙을 개던 한 어르신이 허리를 90도로 굽혀 인사를 한다. 155cm가 채 될까 말까한 키에 흐트러진 머리, 흙이 잔뜩 묻은 트레이닝 바지와 고무신. 그가 바로 ‘대한민국 도예명장(95-19호)’ 천한봉(72·문경요 대표) 선생이다.

14살의 나이에 흙을 만지기 시작해 올해로 56년째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그는,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뻔 했던 찻그릇의 계보를 이어오고 있는 ‘조선 찻사발의 명인(名人)’이다.

갑작스런 부친의 작고로 14살의 나이에 다섯 식구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 됐고, ‘먹고 살기 위해’ 도자 공장에 취직했다. 낮에는 나무와 흙을 나르는 허드렛일을 하며 어깨 너머로 물레 돌리는 법을 배웠고 밤에는 잠을 줄여가며 그릇을 만들었다. 그렇게 5년이 지나자 그는 문경 일대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도공이 됐다. 그러나 한국전쟁을 거치며 스테인리스와 플라스틱 그릇이 쏟아져 들어오자 도자기는 일반인들의 생활에서 차츰 멀어지게 됐다.

항아리와 화분을 만들며 생계를 유지하던 68년, 그는 자신의 인생 진로를 바꾸게 될 한 사람을 만나게 된다. 일본 대각사 주지인 사쿠라카와 스님이 그를 찾아온 것이다. 스님은 <고려다완>이란 책을 보여주며 조선 찻사발을 만들어 볼 것을 권유했다.

“책에 실린 조선 찻사발의 사진을 보는 순간, ‘저것이 내 평생 화두’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후 그는 찻사발을 만들어야겠다는 일념으로 3년간 흙과 불을 연구했다. 나무와 흙을 구하기 위해 전국을 떠돌았고 일본에 가서 1년 동안 다도(茶道)를 배우기도 했다.

“처음 3년 동안은 정말 막막합디다. 찻사발에 관한 자료가 거의 남아있지 않으니 흙과 불의 원리를 하나하나 체험으로 알아나가는 수밖에 없었죠. 그 과정을 거치고 나니 불 색깔만 봐도 어떤 작품이 나올지 알겠더군요. 사람들은 저를 명장이니 명인이니 하고 부르지만, 이름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얼마만큼 욕심을 버리고 마음까지 놓아버린 후 찻사발을 만들 수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잡생각을 하면 그것이 그릇에 그대로 나타나게 되거든요.”

그렇게 완성된 작품은 일본에서 결성된 ‘천한봉 후원회’에서 모두 구입해갔고 그들의 초청으로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72년 ‘문경요(聞慶窯)’를 설립한 후 본격화된 그의 작품 활동은 70년대 후반 국내 차문화 운동이 일기 시작하면서 차인들 사이에 점차 알려지게 됐다. 95년에는 ‘대한민국 도예명장’에 지정됐다.

-작업은 주로 언제 하십니까?
“보통 새벽 2시에서 6시 사이에 그릇을 빚습니다.”
-건강도 생각하셔야지요.
“논다고 건강해지나요. ‘좋은 찻사발 하나 만들고 죽겠다’는 화두를 아직 못 풀었는데 게으름 필 수 없는 일 아닙니까.”
-조선 막사발이 일본에서는 ‘국보’ 대접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도예문화가 일찍 발달했어요. 생활 속에서 부담 없이 쓸 수 있는 막사발도 많이 만들어 썼죠. 그런데 너무 흔하다보니 귀한 줄 몰랐다고 할까요. 그런데 일본 차인들이 조선 무명작가의 작품에서 ‘무의식의 아름다움’을 알아본 것입니다.”
-찻그릇을 쓰는 사람들에게 한 말씀 해주신다면?
“아무리 좋은 찻사발이라도 그것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을 때 가치가 드러납니다. 찻사발이 있어야 할 곳은 장식장이 아니라 실제 차인들의 찻상 위라야 합니다.”

40여 톤에 달하는 소나무 땔감과 하동에서 사왔다는 수십 포대의 흙 그리고 그가 직접 만든 가마를 차례로 설명해주던 그는 후학 양성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했다. 그 자신은 학교교육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지만 현재까지도 문경대학에서 후학을 가르치고 있는 모습에서 제자를 기르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요즘 젊은이들, 너무 얇아요. 금방 싫증내고 조금만 힘들어도 그만두고. 일 배우러 왔다가도 몇 달 만에 ‘이거 아니면 못 먹고 살겠나’ 하고 떠나버려요. 10년간 ‘나(我)’도 버리고 배워야 겨우 도예의 기본을 알 수 있을 텐데요. 열정을 갖고 최선을 다한다면 결국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게 됩니다.”

우리 시대 ‘명장’의 말은 평범 그 자체였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부처’이기에 가족이나 극히 가까운 사이의 사람들을 제외하곤 꼬박꼬박 존댓말을 쓰는 모습이나, 일년 내내 끊이지 않는 방문객들에게 귀찮은 기색 없이 친절히 설명해 주는 모습은 그 어떤 말이나 논리보다 설득력이 있었다. 그의 찻사발이 ‘거칠지만 꾸밈없고 순박한’ 우리 민족을 닮아 있는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다.
여수령 기자 | snoopy@buddhapia.com
2004-05-03 오후 3:2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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