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의 휴일’, ‘티파니에서 아침을’ 등에 출연했던 영화배우 오드리 햅법은 온세계 팬들의 사랑을 받은 스크린의 요정이었다. 하지만 세 번의 이혼으로 사랑했다고 믿었던 남자들에게서 진정한 사랑을 찾지 못했던 불행한 가정사를 안고 있다. 그러나 그녀는 말년에 멀리 아프리카 소말리아의 병들고 굶주린 아이들에게서야 진정한 사랑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마지막의 멋진 인생 회향 때문일까. 오드리 햅번은 살아있을 때보다 죽어서 더욱 아름다운 모습으로 기억되고 있다.
‘전원일기’의 어머니로, 연극 ‘셜리 발렌타인’의 여주인공으로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속에 살아온 탤런트 김혜자 씨도 바로 삶의 의미를 세계 곳곳에 산재한 빈민국의 버려진 아이들에게서 찾았다고 한다. 이번에 그녀가 최근 출간한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는 1992년 국제구호단체인 월드비전 친선대사로 아프리카 땅을 밟은 이래 에디오피아, 시에라리온, 소말리아, 르완다, 방글라데시를 거쳐 아프카니스탄까지 10여개국에서 만난 이들의 위험하고 비참한 삶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김 씨의 난민 봉사는 우연한 기회에 이루어 졌다. MBC-TV 드라마‘사랑이 뭐길래’를 끝내고 딸과 유럽여행을 가려고 준비중이던 95년의 어느날 월드비전 한국지부장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월드비전 친선대사로 아프리카를 함께 방문하자는 제의였다. ‘연기 9단’인 김 씨는 오드리 햅번이 주연을 맡은 영화‘장원’에서 본 아름다운 아프리카를 기억하며 즉시 가겠다고 수락했다.
그러나 김 씨를 기다리고 있었던 아프리카는 영화에서 본 화려한 풍경이 아니었다. 15인승 프로펠러 경비행기를 타고 에디오피아 아마라주볼로에 내렸을 때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던 건 가난과 전쟁으로 생긴 병들고 굶주린 부녀자와 아이들이었다. 그리고 한평생 대중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으며 안일하게 살아온 자기 자신에 대한 죄책감도 쏟아졌다.
그때부터 김씨는 해 마다 수십 시간씩 비행기를 타고 공항에서 새우잠을 자며, 때로는 경비행기로 생명의 위험에도 아랑곳 없이 사막을 곡예하듯 넘었다. 단돈 1백원이 없어 2~3일씩 굶는게 예사였던 케냐 소녀 에꾸아무, 영양죽을 얻어 먹기 위해 갓난아기 동생을 들쳐 업고 자동차로도 40분 걸리는 먼 길을 걸어오던 소말리아 소녀, 내전의 소용돌이 속에 반군 대장의 아이와 정부군 대장의 아이를 낳아 키워야 했던 열여덟 살의 레베카 등 고통받는 부녀자와 아이들을 만나기 위해서다.
12년 동안 계속 이들을 찾아다니면서 김씨는 평소 상상하지 못했던 비참한 현장을 무수히 목격한다. 지참금 때문에 딸을 낳으면 독초를 먹여 세상에 태어난 지 3일밖에 안 된 아이를 숨지게 해야 하는 비정한 엄마들. 아버지의 50달러 빚 때문에 노예가 돼 하루 종일 잎담배를 말아야 하는 눈이 커다란 소녀. 먹을 게 없어 돌산에서 자라는 시금치 비슷한 풀을 뜯어먹고 입술과 얼굴까지 초록색으로 변한 아이들 등이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김씨는 이러한 사실을 좀 더 많은 이들에게 알려 관심을 촉구하고자 1년 3개월동안 방송활동을 중단하면서까지 글로 옮겼다. 이들의 삶이 현실이 아닌 드라마이기를, 그것도 연속극이 아닌 단막극 이기를 바라며 쓴 기록이기에 이 책은 그 어떤 다큐멘터리보다 호소력 있게 다가온다.
세상의 불평등과 모순에 분노하는 것보다 아이들에게 한 끼의 밥이라도 더 먹이는 것이 급선무라는 그녀의 주장은 평소 그의 연기에서도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넉넉한 어머니의 마음이다. 희망을 잃지 않는 아이들의 천진한 미소와 눈빛이 오히려, 연기할 때를 제외하곤 늘 알 수 없는 허망함에 시달렸던 자신의 인생을 변화시켰다는 그녀의 진솔한 고백이 진실한 울림으로 다가오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다.
“세상 사람들에게 내 눈을 빌려주고 싶습니다. 이 고통받는 아이들을 보라고. 세상 사람들에게 내 두 팔을 빌려주고 싶습니다. 이 아이들을 꼭 안아주라고.” 이렇게 자신의 심정을 이 책에서 토로한 김씨는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가난한 아이들을 찾을 거라고 말한다.
화려한 미사여구와 형용사로 중무장한 문학적인 요소는 좀체로 찾아볼 수 없지만 진솔한 감정을 투박하게 그대로 전달해서인지 구구절절 봉사행을 실천하고픈 욕구를 불러 일으키게 만든다.
현재 소말리아, 베트남, 인도 등지의 어린이 50여명에게 매월 2만원씩 후원하고 있는 김씨는 이 책의 인세 전액도 세계 각국의 불우 어린이 50여명에게 전달할 계획이다.
<책 속의 밑줄 긋기>
▲“내가 만일 비라면 물이 없는 곳으로 갈 겁니다. 만일 내가 옷이라면 세상의 헐벗은 아이들에게 먼저 갈 겁니다. 만일 내가 음식이라면 모든 배고픈 이들에게 맨 먼저 갈 겁니다.”
▲“이제는 더 이상 사람들을 도울 힘이 내게 없다고 생각할 때에도,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볼 때면 여전히 그들을 도울 힘이 내게 남아 있음을 나는 압니다.”
▲“소망만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극히 적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행동으로써 얻어야 합니다.”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
김혜자 지음
오래된 미래 펴냄
9천9백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