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총선에서 ‘노인폄하’니 ‘노인정책’이니 하는 쟁점이 미묘한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이 쟁점을 제공한 발언당사자는 20~30대의 선거참여를 독려하는 뜻으로 한 말로 ‘60~70대는 쉬어도 좋다’ 는 말이, 젊은 세대에 대해서 기대하고 노인세대를 경시하는 언행으로 비추어진데 대해 크게 당황하고 노인단체를 찾아가 사과하고 있다.
지금 우리사회는 60대 뿐만 아니라 50대 정년을 일컬어 ‘오륙도’라고 표현할 뿐만 아니라 40대도 ‘사오정’이니 하는 말로 나이에 걸맞는 대접보다는 돈 중심의 가치관속에서 경제적 짐으로 부담스러운 존재로 취급되고 있다. 청년세대도 처지는 마찬가지다. 평생직장이라는 과거의 풍속은 사라지고 비정규 계약직으로 채용되는 비율이 점차 높아져 취업전선에 찬바람이 불고 있으니 인간보다 돈이 우선시되는 세태가 안타깝다.
농업사회에서 성장한 우리 50대는 대가족적 경로사상을 가정에서 익힐 수 있었다. 가부장적 가정에서 할아버지의 권위는 높았고, 아버지의 위상은 지엄한 것이었다. 이것은 한 가정뿐만 아니라 국가에서도 대통령은 큰 집의 아버지처럼 가부장적 권위의 상징이었으며, 그것은 충효의 윤리로 의심의 여지없는 도덕법칙이었다.
그러나 60년대 이후 불어 닥친 산업화는 전형적인 농촌사회를 도시사회로 변모시켰고, 가정도 부부중심의 핵가족이 되었다. 그런 핵가족 시대에 할아버지들은 과거와 같은 권위를 잃고 소외되어 갔으며, 그들이 대접했던 대로 대접받지 못하고 경제적 짐으로 취급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대신 과도한 자녀와 여성의 권익이 노인의 권위를 대신하게 되었다. 지엄한 아버지 같았던 정치지도자가 아니라 허튼소리도 마다하지 않는 친구 같은 대통령이 당선된 소위 탈권위주의와 일방주의에서 쌍방향의 시대로 어느새 변화해 버린 것이다.
동성애를 넘어서 동성(同性)끼리 혼인을 하기도 하고, 여성이 남성으로 성을 바꾸고, 여러 부부간에 혼음을 즐기기도 한다. 과거에는 상상할 수도 없었고 찾아볼 수도 없었던 그런 일들이 전통적 가치관과 함께 평등하게 공존하고 있다. 이것이 우리사회의 일면이 된 요즘 더이상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노인소외의 문제도 실은 우리사회에 짙게 깔려있는 급속한 세대교체의 흐름을 표현하는 것이며, 과거보다는 미래에 비중을 두는 그런 가치관을 드러낸 것이다. 노인보다도 청년을 중시한다는 것은 곧 과거보다는 미래를 소중히 한다는 뜻과 같다. 우리사회가 오직 미래를 향해서 뒤를 쳐다보지도 않고 옆을 쳐다보지도 않고 앞으로 향하기만 하면서 생긴 습관인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엊그제 70대의 존경하는 스승 한 분을 잃었다. 생리적 나이는 노인이었지만, 그분은 젊은이보다 더 높은 기상과 패기를 가졌었고, 자신의 언행에 대해 끝까지 책임을 질 줄 알았으며, 약속은 생명처럼 지켰다. 최근 만남에서 “나에게 은혜를 베푼 사람은 그 사람이 민족반역자라고 손가락질 받아도 그 은혜를 잊지 않고 갚는다”라는 이야기가 가슴에 남아 있다. 그렇다. 우리는 앞 세대의 부모와 스승의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것이 신뢰사회의 바탕이 되며 후일 젊은 세대가 노인이 되어서 소외되지 않는 공동체의 윤리일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러한 세대간의 갈등이건 조화이건 또는 ‘노인소외’ 문제이건 평소의 공공정책에서는 소홀하다가, 느닷없이 득표를 위한 선거용으로 들추고 나와 세대갈등을 부추기는 것은 그리 아름답게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희재 광주대 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