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7 (음)
> 종합 > 사람들 > 인터뷰
손상좌 도진 스님의 '관응 스님 시봉 38년'
“안개가 스쳐가듯 고요한 적멸의 세계에 들어가듯 그렇게 열반에 드셨습니다. 그 용안이 너무나 평안하고 자연스러웠지요.”

관응 스님의 맏손상좌인 도진 스님(중암 주지)은 관응 스님의 입적 모습을 이렇게 표현했다.

“고요히 숨을 거두는 정도가 눈에 띄지 않고 가슴에 와 닿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죽음과 적멸에 이르는 모습이 이렇게 다른 것이구나 생각했습니다.”

관응 스님의 입적 모습을 통해 추상적으로만 생각하던 “적멸(寂滅)”을 느꼈다는 스님은 임종시 관응 스님과 같은 생애를 마칠 수 있어야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도진 스님은 18세 용주사로 출가할 때부터 약 38년 간 스님을 옆에서 모셨으며, 1984년 10명의 제자에게 3년간 전강을 내린 후 조용히 살겠다는 스님의 서원에 따라 중암을 복원하고 주지로 부임하여 20년간 스님과 함께 지냈다.

도진 스님은 관응 스님의 행장을 하나하나 기억하고 있었다.
1965년 도봉산 천축사 무문관 6년 결사, 조계종 정화 직후 1959년 조계사 초대주지 취임, 또 1975년 청암사 수도암에서 세수 66세의 노구로 젊은 납자와 함께 안거 정진했던 순간까지.

1965년 도봉산 천축사 무문관 6년 결사에는 처음 5명이 들어갔으나 끝까지 회향을 마친 스님은 두 분뿐이다. 그중의 한분이 관응 스님. 무문관 6년 결사를 회향하며 스님께서 하신 말씀은 “나는 공부한 것이 없다”이다. 도진 스님은 지금도 그 뜻이 무엇인지 예측을 못하겠다고 말한다.

또 1959년 종단 정화 직후를 회상하며 “관응 스님은 최초의 조계사 주지이며 당시 최고의 포교사였고 또 정화에도 관심이 높았던 분”이라고 말한다.

당시 종정이었던 동산 스님은 포교를 맡아 할 인물이 관응 스님 뿐이라는 판단에 직지사 강주로 있던 관응 스님을 조계사 주지와 중앙포교사로 동시 임명했다. 관응 스님은 당시 학인스님을 그냥 둘 수 없어 80명의 학인스님을 모두 데리고 조계사로 갔다. 그러나 도심지라 스님들이 공부하기에 적합지 않았고, 다시 용주사 정화에 들어갔다. 용주사 정화에는 어떤 물리적인 방법이 동원되지 않은 평화적인 정화로 유명하다.

세수 66세 때는 청암사 수도암에서 고성 스님, 석주 스님과 몸소 찬물에 당신 옷을 빨아가며 수행 정진했다. 젊은 납자와 탁마 정진한 안거는 드문 일로서 당시 젊은 납자에게 공부할 신심을 불러일으킨 충분한 동기가 됐다. 당시 수도암 암주가 장의위원회 증명으로 추대된 지금의 종정 법전 스님이다.

도진 스님은 1984년 관응 스님이 75세의 노구를 이끌고 원산, 범하(통도사 박물관장), 연관(문화재 위원) 스님 등 10명의 제자에게 3년간 부처님의 경전을 가르쳐, 전강을 내렸던 일은 그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다고 회고했다.

도진 스님이 지켜봤던 관응 스님은 최고의 대강백이며 초교사였고 또 정화에 앞장선 분이셨다. 부처님의 경전 뿐 아니라 유학, 신학문, 철학에 능통했으며, 유식학의 체계를 세운 유식학의 거봉이다. 수행에 있어서는 철저하게 계를 지키는 삶을 살면서도 김수환 추기경이 포도주를 권할 때 기꺼이 받아 마시는 포용력까지 갖추었다.

도진 스님은 관응 스님을 한마디로 인자한 분이라고 표현했다. 그렇다고 말씀이 많았던 것도 아니지만, 표정으로 모든 허물을 덮으며 교훈이 되게 했다는 것이다.

또 직업의 귀천이나 상하 구분 없이 누구나 만나고 무엇이든 받으셨다고 한다. 심지어 개구쟁이가 장난감을 가져오면 장난감을 받아 방 한 켠에 고이 진열까지 했었단다.

관응 스님은 열반게를 남기지 않았다. 도진 스님이 어른 스님께 열반송을 부탁드리자 유언처럼 하신 말씀이 있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는 것은 그림자와 같다. 그림자는 그림자를 낳지 않는다.” 지금은 도진 스님에게 화두가 되었다고.

“당신이 활약하고 수행하고 많은 세월을 사셨지만 이 사바세계에 나타내는 자체도 싫어하셨습니다. 장례도 화려하게 하지마라. 평범하게 수행자의 모습도 나타내지 않도록 하라고 하셨습니다.” 지금의 장례절차도 평소 관응 스님의 말씀에 따라 될 수 있는 한 소박하게 수행자의 모습답게 치루려고 한다고 스님은 말했다.

“평소 하신 말씀이 임종게지 따로 생각할게 있겠냐”고 말하는 도진 스님은 “스님께서 항상 외경에 붙들리지 말고 열심히 수행하라는 당부와 수행자는 ‘정지견(正智見)’과 ‘겸손’을 가져야 한다고 늘 말씀하셨다”며 스님의 가르침을 되새겼다. 또 ‘선(禪)·교(敎)에 치우치지 말라’는 가르침과 함께 늘 앉아서 수행 정진하는 모습을 보이셨다고 한다.

관응 스님과 가장 가까웠던 도반은 고성 스님과 석주 스님이다. 석주 스님은 호상을 맡아주시기로 허락하셨다.

관응 스님은 평소 검소하고 간결하게 사셨다. 유품으로는 가사장삼, 발우대, 주장자(주杖子), 석주 스님이 주신 청여장이 전부이다.

관응 스님 행장

1910년 경북 상주군 외서면 출생.
1929년 상주 남장사에서 혜봉 스님을 계사로, 탄옹 스님을 은사로 득도.
1934년 유점사 전문 강원 대교과 졸업.
1936년 서울 선학원에서 보살계 및 비구계 수지.
1938년 중앙불교전문학교 졸업, 문경 김용사 강사 취임, 해인사 해외유학생으로 선발.
1942년 일본 경도 용곡대(龍谷大) 졸업.
1943년 오대산 월정사서 안거.
1952년 해인사 백련암, 고성 옥천사 등지서 안거 수행.
1956년 황악산 직지사 조실 추대.
1959년 조계사 주지 및 중앙포교사 취임.
1961년 동국학원 이사
1963년 용주사 주지.
1965년 대구 능인학원 이사. 도봉산 천축사 무문관 6년 결사.
1981년 직지사 주지.
1985년 조계종 원로회의 부의장.
1989년 학교법인 보문학원 이사장. 청소년교화연합회 총재.
2004년 현재 조계종 원로회의 명예원로. 황악산 직지사 조실.
배지선 기자 | jjsun@buddhapia.com
2004-03-03 오전 9:49:00
 
한마디
닉네임  
보안문자   보안문자입력   
  (보안문자를 입력하셔야 댓글 입력이 가능합니다.)  
내용입력
  0Byte / 200Byte (한글100자, 영문 200자)  
 
   
   
   
2024. 11.27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원통스님관세음보살보문품16하
 
   
 
오감으로 체험하는 꽃 작품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