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8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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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제는 새로운 ‘업’…허용 기준이 문제”
● 우희종 교수(서울대 수의과대학)

복제 연구 작업의 배경이 윤회사상이라고 한 것은 또 다른 의미부여로 보인다. 복제와 윤회는 관계가 없다고 봐야 한다. 그리고 복제를 윤회와 연결시킬 필요도 없다.

인간이 살면서 행위하는 자체가 모두 윤회다. 모든 것이 윤회의 틀 안에 있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생명복제도 윤회의 틀 속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윤회가 생명복제의 사상적 기반이 된다고 말한다면 얘기를 달라진다.
윤회는 직선적 시간 속에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윤회는 모든 것의 관계로 보아야 한다. 다시 말해 상대적 관계에서 변하며, 어느 하나가 따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복제는 새로운 관계를 인위적으로 만드는 행위다. 따라서 복제 행위가 윤회라고 말할 수는 없다. ‘복제는 불교적인 사고(윤회)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봐도 되는가’라는 질문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복제를 무리하게 불교에 연결시키는 것이다. 복제는 사대로 이뤄진 육신의 변형일 뿐이다.

배아 줄기세포 추출에 대해 교리적으로 논란이 있을 수 있다. 생명연장을 위해 어느 정도 허용해야 한다는 견해도 있고, 생명존중사상에 벗어난다는 견해도 있을 수 있는데 어느 것이 옳다 그르다 얘기할 수는 없다. 문제는 어디까지 선을 긋느냐 이다. 다만 말하는 사람의 가치관에 따라 답은 다를 수 있을 것이다. 배아복제는 불교적으로 보면 또다른 업의 창출이고 이 업은 우리가 그대로 받는 것이다.

● 호진 스님(前 동국대 교수)

우리가 DNA나 체세포에 대해 잘 모르듯이 일반인들이나 과학자들은 윤회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 우리가 DNA나 체세포에 대해 알고 있는 정도보다도 윤회를 모를 수 있고 그것은 당연하다. 대부분 사람들은 아마도 죽으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재생한다는 의미 정도로 윤회를 이해하고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윤회의 핵심은 업이다. 업이 있으므로 해서 윤회하는 것이고 업이 전제되지 않으면 윤회는 성립할 수 없다. 복제가 윤회냐의 문제는 업이 작용하느냐 안하느냐의 문제인데, 업은 행위이고 윤리적 차원의 문제다. 그런데 과학자들은 물질(DNA)로 본다. 물질적ㆍ기술적 문제만 들어가지 윤리적 문제는 들어가지 않는다. 다시 말해 과학자들은 윤리적 문제를 취급 안한다. 과학적으로 물질을 만드는 데 윤리적 문제인 업이 왜 들어가겠는가. 다만 2차적인 문제로 사회에서 인정해 주느냐 안해 주느냐가 문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장기복제에 의해 불치병 치료의 길이 열리고 생명 연장의 기회를 얻는다고 했을 때, 생명 연장은 윤회하고는 아예 관계가 없다. 현재 인간의 행위, 즉 업에 의해 다음 생이 있다는 것이 윤회이기 때문이다. 다만 생명 연장이 업 하고는 어느 정도 관계가 있을 수 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다. 사실 2500년 전의 부처님은 복제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못했을테고(부처님은 예언자적 입장이 아니기 때문에) 당연히 복제에 대해 얘기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불교는 다른 종교에 비해 받아들이기 쉽다고 얘기할 수 있다. 기독교는 창조주(신)에 의해 모든 생명이 창조된 것이라고 보기 때문에 복제는 창조주에 대한 도전이고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문제이다. 하지만 불교는 인간이 자기 의지에 의해 새로운 업을 짓는 것이고, 과보도 자기가 받는 것이라고 보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는 기독교보다 받아들이기가 쉽다. 즉 업에 의해 다음 생이 이어진다는 큰 틀에서 본다면 복제 역시 물질적 조작에 의해 다음 생을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을 다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업과 윤회의 문제, 수행의 문제가 다 걸려 있다. 가령 업은 자신의 의지에 의해 짓고 받는 것인데, 3독을 없애는 쪽으로 DNA를 바꾼다고 하자. 성불이라는 궁극적 목적을 위한 수행의 기간은 훨씬 짧아지거나 효과가 향상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타자의 뜻에 의해 사전에 수정되고 계획된 것이라는 문제가 남는다.

이와 같이 업 이론이 그 기능을 발휘하지 못할 때 윤회설은 어떻게 견뎌낼 수 있을 것이며 불교의 윤리 문제는 그 근거를 어디서 찾을 수 있을 것인가. 또한 3독을 완전히 제거한다고 했을 때 수행이란 결국 3독을 제거하는 작업인데, 이제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을 때 수행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 김용정 박사(동국대 명예교수)

‘복제를 윤회의 또다른 사고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한 것은 아마도 불교적 개념보다는 과학적 개념에 무게를 둔 얘기로 보인다.

줄기세포는 만능세포라고도 한다. 줄기세포는 눈, 귀, 코, 골격의 뼈, 심장, 간장 등 모든 생명의 조직적 부분이 될 수 있다. 이것을 확대해 보면 모든 생명은 세포로 구성돼 있고, 세포가 분열해서 각각의 생명이 형성됨을 알 수 있다.
두 교수가 복제를 윤회라고 말한 것도 짐작컨대 이런 진화론적인 사고가 바탕에 깔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현대 과학은 순환론보다는 진화론 측면에서 접근하고 있다. 진화론은 모든 생명이 세포분열과 상호결합을 통해 생성되고 사라지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복제는 윤회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순환론적으로 보면 얘기는 달라진다. 순환론이란 진화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복제를 윤회한다고 말할 수 없다.

문제는 불교의 윤회사상이 순환론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생명공학이 발달할수록 불교의 교리를 새로 해석해야 한다는 말이 계속해 나오는 것도 바로 이런 부분 때문이다.


● 김성철 교수(동대 불교학과)

기독교와 비교해 볼 때, 불교의 기본은 윤회설인데 윤회라는 세계관에 입각해 볼 때 체세포를 복제하는 것이 크게 문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생명을 건드리고 조작하는 것이 기독교와는 달리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것이 아니라 그것도 하나의 자연의 섭리라고 보기 때문이다. 유전공학을 활발히 할 수 있는 이유도 자연의 섭리에서 허용 범위가 상대적으로 크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겠는가.

다만 수정란(배아)을 죽이는 것은 문제이다. 줄기세포는 배아에서 채취하기 때문에 이를 추출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배아를 파괴해야만 한다. 불교에서는 정자와 난자가 결합해 수정란(배아)도 이미 중음신이 결합한 상태기 때문에 생명이라고 보는 것이고, 이것은 생명을 파괴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를 볼 때 그건 새발의 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불치병 치료를 위해 배아에서 줄기세포를 추출하는 것이 다른 많은 사람을 살리기 위한 선한 동기에서 출발한 그 행위도 선한 것으로 봐야 한다.


한명우 | mwhan@buddhapia.com |
2004-03-02 오전 8:5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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