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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두 번 죽였다’=2월 25일 정오 서울 종로 일본대사관 앞. 오늘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플라스틱 간의의자에 앉았다. ‘진상규명, 사죄, 배상, 역사교과서 기록’ 등이 적힌 현수막을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목청도 한층 높였다. 일본정부의 사죄와 책임자 처벌, 한국정부의 신속한 문제 해결 의지를 요구했다.
올해로 13년, 이렇게 이 자리를 꿋꿋이 지켜왔다. 또 한결같이 외쳐왔다. 눈이 내리든 비가 오든 일본정부의 과거 침략에 대한 반성을 촉구했다. 그간 일본정부의 유혹도 있었다. 도덕적 위로금을 지급한다는 것. 하지만 단연코 거부했다. 공식적인 법적 책임을 지는 배상금이 아니었고 사죄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번 수요시위는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최근 파문을 일으킨 ‘위안부 누드’사건이 역사에 대한 몰이해와 상업주의가 결합된 우리 현실에서 비롯됐다는 점을 지적하기 위해서였다. 할머니들의 표정부터 읽었다. 비장함이 묻어났다. 잠시 후, 위안부 피해자 쉼터 ‘나눔의 집’에서 살고 있는 박옥선(81) 할머니의 최근에 심경을 들을 수 있었다.
“다시 죽고 싶었어. 18살 때 끌려가 4년간 위안소에서 일본군이 시키는 짓 다 하면서 살아왔는데…. 그런데 그것도 우리 동포가 위안부 누드집을 냈다니. 처음엔 믿기지 않았어. 그 사람을 용서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니었어. 참 내 신세가 서글프다는 생각만 들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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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두 번 죽이지 마. 내둥 무관심하다가 기껏 관심 가진 것이 누드집이야. 말도 안 돼. 관심을 가져도 제대로 가져야지. 한국 사람들 맞아?” 할머니들의 서운함이 극에 올랐다.
1시간 남짓, 수요 시위가 끝나자 나눔의 집 할머니들이 승합차에 올랐다. 무작정 박 할머니의 손을 잡고 차를 얻어 탔다. 할머니들과 이야기를 나눌 욕심 때문이었다. 2시간가량, 쉼터 돌아오는 길에서 ‘위안부 누드집’사건을 또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창문 밖만 보던 김순덕(84) 할머니가 말문을 열었다.
“그 사람에게 아픈 한국사를 겪은 우리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라고 했어. 그러면 이런 일을 할 수 있었겠느냐고 되물었지. 우리 노인네들이 시위에 나서는 것도 우리 같이 불쌍한 사람 훗날 다시금 생기지 말라고 하기 위해서야.”
#‘이젠, 못다 핀 꽃을 불교로 피운다’=할머니들은 다시 태어나면 나라를 지키는 군인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경기도 광주 나눔의 집 앞 마당에 ‘못다 핀 꽃’동상을 세운 것도, 윤회를 간절히 믿는 것도 이 때문이었다. 어려서는 나라로부터 버림받아 전쟁터에 끌려갔지만, 이제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겠다는 할머니들의 바람이 담겨있기에 그렇다.
“부모의 마음으로 불교를 믿었어. 17살 때 일본군한테 처녀공출 당하기 전날, 해인사에서 부모님과 올렸던 기도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해. 아마도 내가 불자가 아니었다면, 벌써 화병으로 죽었을 거야. 불교는 나를 다시 살 수 있게 했어.”(김순덕 할머니)
하지만, 김 할머니가 이처럼 불법을 받아들이기까지 쉬운 것만은 아니었다. 원망심과 억울함이 순간순간 치고 올라 올 때면, 오히려 불교가 싫었다. 조건없이 자비심을 베풀라는 가르침은 너무도 큰 형벌과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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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옥선 할머니도 마찬가지다. 불교는 ‘부모’였다. 지옥 같은 위안부 생활에서도, 해방 후 중국에 홀로 남아 살 때도 불교는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물 길러 나갔다 일본군에게 붙들려갔을 때도 ‘관세음보살’만 외쳤다.
“항상 부처님을 찾았어. 더렵혀진 몸뚱이와 마음을 깨끗이 씻어내고 싶어서. 지금 쉼터 법당을 매일 쓸고 닦고 청소하는 것도 이 때문이야. 부처님은 내 마음을 알아주니까.”
박 할머니는 특히 지난 2002년 국적이 회복되기까지 서류상 ‘죽은’ 사람이었다. 해방 후 국내에서는 사망신고로 처리됐기 때문이다. 2001년 귀국해 1년 6개월 넘는 국적회복 신청기간은 그야말로 암흑의 시간이었다.
“판사에게 이렇게 말했어, ‘나 살아왔소. 다시 살려주시오’. 정말로 고국에서 두 번 버림받았다 생각하니 참담했어.”
못다 핀 꽃을 다시 불교로 피우겠다는 할머니들. 원망과 억울함을 넘어 스스로 치유의 삶은 바로 불교였다고 말했다.
◆ 나눔의 집은?
나눔의 집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되던 지난 90년 초, 당시 생계조차 어려웠던 위안부 할머니들의 보금자리를 마련해주기 위해 1992년 10월 설립됐다. 특히 나눔의 집은 종교계에서는 처음으로 불교계가 설립을 주도했으며, 현재는 11명의 할머니들이 생활하고 있다. 또 역사교육의 장인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을 건립해 운영 중에 있다. 특히 나눔의 집은 할머니들의 전문요양원 건립을 위해 불교계를 비롯한 온 국민의 성금을 기다라고 있다. 후원계좌 : 023-01-0537-101(예금주 나눔의집) (031)768-00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