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8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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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의 불교윤회 비판은 광대의 경박함"
"MBC 김용옥 특강을 보고" 신용국씨 기고
<인드라망의 세계> 저자 신용국씨. 사진=박재완 기자
<인드라망의 세계> 저자 신용국씨가 MBC 공개특강에 출연해 불교윤회론을 비판한 도올 김용옥씨의 주장을 반박하는 기고를 본지에 보내왔다.

다음은 기고문 전문

김용옥씨가 그가 저술한 정도전 관련 출판물에 대한 mbc 공개특강에서 불교의 윤회론을 비판하는 것을 보았다. 그의 논지인즉, 영혼이 윤회하는 불교의 윤회관은 음양의 기(氣)로 우주를 보는 동양의 전통적 우주관인 천지론(天地論)에 어긋난다는 것이었다. 김용옥씨는 불교의 윤회론을 영혼불멸설로 이해하였다. 불멸하는 무수한 영혼이 윤회하기 위하여 우주에서 난리를 치는(?) 불교의 윤회론은 천지론적 우주관을 가진 동양의 정통 사상에 배치되는 것이며 따라서 정도전은 동양의 사상을 바로 세우는 국가와 정치를 시도하였던 정치 철학자로 묘사되는 것이 그의 논리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러한 김욕옥씨의 논리가 광대의 경박함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었다. 김용옥씨를 광대라 하는 이유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우주관, 나아가 존재관(存在觀)을 다루는 중요한 문제에서 그가 보이는 말투며 몸짓의 경박함이다. 진실함이 결여된 경박함으로 대중의 웃음과 박수를 유도한다. 그가 그 경박함 속에서 대중의 박수를 이끌어 내는 무기는 중국의 한자 부수를 해체하면서 독창적인 뜻을 풀어내는 나름대로의 기발함이었다. 하지만 기발함 속에 의미의 진실함까지 함께 매도하는 것은 지식인의 광대 짓임에 틀림이 없는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그가 잘 알지 못하면서 일방적인 해석을 감행한다는 것이다. 불교의 윤회설을 영혼 불멸설로 해석하는 그를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지 모르겠다. 역사 속에서 불멸하며 이어지는 종교를 성토하기 위해서는 그 종교에 대한 철저한 지식을 갖추어야 하는 것은 예의를 넘어서 지식인의 의무이어야 한다. 하지만 김용옥의 불교 해석에서는 그러한 의무나 예의를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오직 경박함과 아전인수식의 독선 뿐이다.

불교는 제법무아와 제행무상의 연기법(緣起法)을 근간으로 한다. 무아(無我)의 연기론을 손톱만큼이라도 이해한다면 어떻게 불교의 윤회설을 영혼 불멸설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인가?

연기법에서의 존재관과 윤회관은 업식 연기를 바탕으로 한다. 그리고 그 업식은 비존재(非存在)이다. 타(他)와 분리되어 나는 이것이다 라고 구분될 개별 존재성을 가지지 못한 것이 무명(無明)의 업식이며 따라서 업식 윤회론은 비존재론적 윤회론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나 김용옥씨는 불교의 비존재론적 윤회관을 존재론적 윤회관으로 왜곡하였다. 더구나 전국으로 전파되는 공개 방송에서 말이다.

김용옥씨가 주장하는 음양 천지론에 따르면, 혼(魂)은 우주의 천지, 즉 음양의 기로 산화(散花)한다는 것이며 따라서 인간이나 생명에게 개별적 윤회라고 할 것은 있을 수 없다는 논리이다. 그러나 이러한 김용옥의 논리는 인중무과(因中無果)의 논리를 따르고 있다 부처님이 연기법으로 척파하신 육사외도(六邪外道) 중의 하나가 인중무과설인데, 이 인중무과설은 전생, 현생, 내생으로 이어지는 인과의 연속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인중무과의 논리를 믿는 사람들은 자신이 현생의 삶에서 행하는 업보의 과보를 믿지 않는다. 믿지 않음으로 하여 현생에서 자신의 욕망이 움직이는 대로의 삶을 추구하게 된다. 육사외도 중에서 인중무과를 주장하였던 와이세시까 학파 같은 경우는 실제로 삶은 욕망에 충실하게 사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러나 부처님이 보기에 우주의 진실은 영혼 불멸의 인중유과나 혼백 산화의 인중무과 같은 것이 아니었다. 개체가 불멸하는 유(有)도 아니고 개체가 천지 자연에 산화하는 무(無)도 아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한 부처님의 법문이 바로 연기법이다. 연기법의 업식 연기에서는 인간은 자신의 과보를 물려받게 된다. 지은 업보를 그 형상 그대로 물려받는 것은 아니지만, 어두워지고 탁한 업식의 삶을 산 사람은 윤회에 있어 더욱 어두워지고 탁한 의식의 삶을 내생에 살게 되는 것이고 그래서 탁한 미망으로 인한 내생의 고통 또한 크다고 하는 것이 업식 윤회의 과보이다.

김용옥씨는 비단 불교를 모르면서 불교를 폄하하는 광대 짓에 그치지 않았다. 소위 논리 철학자로 자신을 지칭하면서도 자신의 말을 자신이 스스로 뒤집는 논리의 허구를 보여 주었다. 혼(魂)이나 백(魄)은 자신 스스로는 존재할 수 없는 비존재라 정의하면서도 몸인 백이 급작스러운 죽음을 당할 경우에 혼이 놀라 어쩔 줄 모른다는 식의 논리를 편다. 백이 없는 혼은 비존재라고 정의하였으면서도 백과 무관한 혼의 존재를 주장하는 모순이다.

철저한 사유보다는 학문적 재변에 치중하는 김용옥씨 같은 지식인들에 대하여 이렇다 저렇다 논평을 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기도 하다. 그러나 김용옥씨의 문제는 국민의 세금인 공중파를 이용해 무수한 대중들을 현혹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인기와 자신이 출판한 책을 위하여 대중을 현혹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역사의 사실까지도 현혹한다. 자신이 주장하는 유교를 강조하기 위하여 정도전과 이씨 조선의 성립을 필요 이상으로 미화하고, 그런 과정에서 고려라는 역사까지도 은연중에 매도하고 있음을 그의 특강 방송에서 느낄 수 있었다. 지식인이 자신의 주장이나 이익을 위해 논리를 왜곡하는 것은 부패 정치인이 국민을 기만하는 것과 하나 다를 바 없는 짓일 것이다.

신용국씨는 <실천불교>(하늘북), <인드라망의 세계 - 유기체세계와 인식자로서의 인간>(하늘북)의 저자이자 귀농생태마을 도리촌(www.dorichone.com)을 준비 중이다.
김재경 기자 | jgkim@buddhapia.com |
2004-02-25 오전 10:07:00
 
한마디
신용국님 마름근성 있습니까 김용옥이 석가의 법을 외곡했나요 석가의 법이 김용옥에 의해 외곡될 수 있는 것인가요? 석가가 깨달은 법이 뭡니까 신용국님은 석가의법이 아닌 신용국님의 법에 집착하고 계시지 않아요 석가의 법을 스님들이 지켜주는 것인가요? 스님들이 석가의 법을 따르는 무리들이고 석가의 법을 깨닫기 위해 수행하는 자들이 아닌가요 그들이 석가의 법을 깨달았다고 했을때 석가의 법을 수호한다고 한다면 그들을 진정 부쳐라고 할수 있나요 그들이 깨달았다고 한것이 석가가 깨달았다고 한것과 그 깨달음의 내용이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나요 석가와 같은 것을 깨달은 사람의 눈으로 볼적에
(2004-05-24 오전 10:32:26)
15
하하..마름근성님, 님의 말씀 중에 일리가 있으신 말씀이 많습니다. 도올의 방송을 보면서 나름대로는 분기탱천하였습니다. 공개적으로 불법을 왜곡하는 도올에 대한 분기에 글을 쓰다보니 선정적인 말들이 앞섰나 봅니다. 하지만 그 분기는 부처님의 법에 대한 충성심이지, 승려나 종단을 위한 충성심은 결코 아니었음을 말씀드립니다. 저 자신 승려나 종단을 위해 충성하고 싶은 마음은 그야말로 눈꼽만큼도 없으니까요.
(2004-02-29 오전 5:3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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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비론이라? 신용국님이 만약 제가 쓴 의견을 읽고서 양비론적 태도라고 하신다면 제가 의사전달을 잘못한것 같군요. 저는 여기에서 도올에 대해 가타부타 얘기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단지 도올-혹은 도올등과 같이 불교에 대해 자기 나름대로의 학문적 입장을 가지고 의견을 표명하는 사람들, 특히 현재의 불교와 승려들에 대해 비판하는들-에 대해 비판하는 재가불교학자(님)들의 이중적인 태도에 대해 한마디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도올 같은 사람들이 불교에 대해 뭐라고 하면 득달같이 달려나와서 불법을 수호하는 호법신장이 되지만 승려들이 법문이랍시고 횡설수설하는 - 목사설교와 승려의 법회는 사용하는 단어만 다르지 도대체 내용상 다른 것이 없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더이다.- 것들에 대해서는 술자리에서 꿍시렁거림으로 대체하는 재가불교학자들의 학문하는 태도에 대해서 딴죽을 거는 것입니다. 학문하는 자들이라면 모름지기 도올이 시원찮게 강의를 하면 냉철히 비판하고, 승려들의 불교이해가 부족하면 준엄히 가르치는 자세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누구 앞에서는 머리 뻣뻣이 들고 누구 앞에서는 꼬랑지 살랑 살랑거리는 풍토가 싫습니다. 그리고 제 생각입니다만. 신용국님은 좀 비겁한것 같습니다. 이 글은-현대불교신문에 실린 글- 도대체 누가 보라고 쓴 글입니까? 도올이 읽고서 잘못을 바로 잡으라고 쓴 글인가요, 아니면 승려들, 재가불자들에게 위안이 되라고 쓰는 글인가요? 공부하는 사람의 자세라면 도올에게 지상논쟁을 한번 제안해 보심이 어떨는지요? 나는 도올의 어떠 어떠한 내용들이 광대짓거리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도올 당신에게 학문적인 논쟁을 하고자 하니 한번 논해보자. 이래야 하는것 아닌가요? 최소한 교계 신문은 이런 논쟁이 일어난다면 서로 지면을 할애하겠다고 나설 것입니다. 욕설에 가까운 선정적인 단어들을 글의 앞머리 들이미는 님의 글에서 도올의 경박함에 대한 비판보다는 왠지 "충성"스런 마음이 읽혀집니다. 신용국님께 "퇴계와 고봉"의 모습을 기대해보는 것은 무리인가요.
(2004-02-27 오후 11:38:46)
15
불제자라면 정법수호와 파사현정에의 의지는 저버릴 수 없는 의무일 것입니다. 그것이 부처님과 부처님의 법을 스승으로 하는 자의 도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불법을 공개적으로 왜곡한 것에 대해 화를 내는 저 자신의 행위에 대한 부끄러움은 없습니다. 작금의 종단에 대하여서도 저 자신 불교인으로서 자랑스럽지는 않습니다. 아니, 부끄럽습니다. 하지만 이런 문제에 대하여 양비론으로 갈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2004-02-27 오후 3:31:54)
15
옛날에 땅을 많이 소유한 지주밑에 마름이 있었다. 그들은 지주들을 대신해서 소작농들에게 갖은 패악질을 일삼았다. 그것이 지주들에게 밥 빌어먹고 사는 자들의 할 일이었으며 그리하는 것이 지주에게 잘 보이는 것이었으리라. 불교계를 보면 글깨나 든 양반들이 하는 짓이라고는 그저 승려들의 뒤치닥꺼리하기에 급급하다. 제 주인 모시기에 바쁘다는 것이다. 도올의 강의 내용에 대해 이견이 있을 수 있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것도 문제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의 학문에 대해서 오만스러울 정도의 당당함이 있다. 마름근성을 가진자들의 비판에 대해 대놓고 받아들일 수 있는 학자의 자세이다. 그런데 먹물깨나 든 불교쟁이들은 어떤가? 잘 해야 마름근성을 벗어나지 못한 투덜거림으로 밥값을한다. 까놓고 얘기해 보자. 승려들의 법문을 들으면서 뭐 느끼는것이 없는가? 적당히 경전 몇구절 늘어놓으면서 그저 도덕적이고 바른말, 틀리지 않은 말들이 거의 대부분이다. 한 마디로 지금의 불교는 보살종교에 보살법문- 즉 기복신앙 - 이다. 내가 이렇게 딴지를 거는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다. 도올이 불교에 대해 뭐라고 하면 - 정확히는 불교라는 종교를 가지고 장사하고 있는 직업적 승려들에게 불리한 말을 하면 - 득달같이 나서서 도올 비판에 나서는 정신적 마름들의 행동이 짜증스럽기 때문이다. 불교에 대해 공부했거든, 하는 사람이거든, 승려들의 천박한 불교학문 수준에 대해 말할 줄 알아야 한다. 도올의 강연에 무식한 승려들은 가만히 있는데, 유식한 불교쟁이들은 잘난척 한다. 자신의 학문에 대해 겸손하다는 것과 비굴하다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볼 문제이다. 누구 앞에서는 말 한마디 못하고 누구 앞에서는 문제점을 짚어내는 예리한 자세를 보이는 것이 겸손이던가? 예전에 서울대생들을 출가시킨 어떤 양반에 대해 난도질하던 마름들이 생각난다. 부처님의 정법을 훼손하는 자들이 버젓이 활개을 치고 다닐때 우리의 훌륭한 승려들은 무얼 계시던가? 뜻있는 승려들이 불교 공부하러 일본으로 동남아로 유학가는 현실이 안타깝다. 불교를 위한다면 학문적으로 아는 만큼 말하고 논쟁하고, 연구하길 바란다. 그저 누가 불교,승려들을 비판하는 것을 몸바쳐 막아내는 것이 학문하는 자들의 자세는 아닐것이다.
(2004-02-27 오후 12:2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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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두일념이 현전되어 확철 대오 하여지이다.모두 보리도를 이루어집시다
(2004-02-26 오후 8:3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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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국씨의 얘기나 김명상씨의 얘기가 다 맞는 말인디 내가 보는 도올은 협잡꾼이라서 걱정이지요. 그 사람이 수행사는 사람이 아니고 神仰하는 사람이라 문제가 있겠죠. 또 공개적으로 자신을 과시헐라고 허는데서 문제의 심각성이 있고. 또 그 방송을 보믐 夢寐之衆에 있지요. 그 사람이 학자라면서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을 비방하고 욕하는 어리석음을 모르는데는 헐 말이 없겠지만 선동하는데 문제가 있지요. 선동의 문화에 앞장서면 자신의 얘기를 또 자신의 행동을 의식하지않는게 큰 문제 입니다. 그렇다면 지적은 해야 바른 길로 가겠지요. 필시 삶을 엮을줄 아는 수행자라면 역사에 대한 바른 인식과 상대에 대한 존중 그리고 미래에 대한 확고한 깨달음이 필요 할 것입니다. 그러나 도올은 생각나는데로 말하고 생각나는데로 행동해서 혹세무민하니까 걱정은 해 봅니다.
(2004-02-26 오전 8: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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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결론은, 도올도 이런 지적인 부를 뿌리치고 부처처럼 결단을 내릴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도올을 비난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누구를 비난하는 자는 이미 공의 자리를 모르는 것입니다 도올이 다른 사람을 비난하여도 수행인이라면 그렇게 하면 진보가 더딥니다 왜냐면,비난은 분별에서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깨달음의 공공의 적은 분별(시비분별)이기 때문입니다
(2004-02-25 오후 4:5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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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참고로, 도올 같은 사람이 깨닫게 되면 부처처럼 큰 가르침을 대중들에 명확하게 펼수있을 것인데 그날이 도올 생에 올런지는 많은 의문올시다 워낙 머리에 잡동사니 지식들이 꽉곽 밖혀 있으니 에고(지적 교만,자신이 안다는 착각,지적 자존심)는 또 얼마나 강할지 이것을 모두 비워내지않고는 공을 볼수가 없으니 도올의 방대한 지식때문에 공을 들어낼 공간이 없소이다 이것을 스스로 깨우칠때 제대로 수행할 기초가 이제야 바로 놓이는 것이니 자신의 일평생 중요하다 생각하여 각고의 노력으로 정보,지식들을 머리에 가득 담았는데 정말 자신이 깨닫고자 하는 대발심과 자신에 대한 정직성(정확히 모르면서 아는체 하기를 멈춤)그리고 겸손(자신에 대한 우월성이나 교만,자존심을 완전히 죽임)을 가져야 하는데 이것이 어려운 일이라 그러나 석가는 이 본을 보였는데 자신이 왕자로서의 직위와 우월성을 완전히 버리고 대발심으로 건널수 없을 것 같은 강(깨달음)을 건너버렸구나! 그래서 많이 배운자(지적인 부)와 부자가 깨닫기 어려운 것이라는 명언이 생긴 것입니다 이런자들은 수행을 해보다 않되면 자신의 밑천(지적 부나 부자)이 있기때문에 죽기아니면 살기라는 절명의 긴박감 즉 대발심의 동력이 약한 것입니다 궁지에 몰리지 않고 도망갈 구멍이 있다면 수행을 해도 그만, 하지않아도 그만처럼 허지부지되고 맙니다 그래서 자신의 목숨을 걸 각오가 없으면 깨달을 수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로 수행하다 상기가 되고 몸이 이상하다고 하여 수행을 정지시키는 예가 많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여기서도 깨달음보다 자신의 육체를 더 중요시 생각하여 몸을 사린다는 것입니다 수행은 육체의 진통(예;두통등)을 반듯이 동반합니다 그래서 깨달음은 자신의 몸을 온전히 던질 준비가 되지않은 자에게는 수행하고자 하는 대발심자체가 생기지 않는 까닭입니다 깨달은 자는 반듯이 깨닫고 못 깨달을 자(아직 몸을 초개처럼 던질 준비가 되지않은 자)는 수행을 할려고 해도 자꾸 반대로 옆으로 빠져서 외도를 구하든지 아니면 예전의 속세인으로 돌아섭니다 이것은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아직 준비가 안된 것으로 보아야 됩니다
(2004-02-25 오후 4:5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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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을 탓할 것이 무엇인가? 신용국(도올의 정도전 강의를 듣고 반론을 제기한 분임)씨를 탓할 것이 무엇인가? 도올은, 노자를 강의 할때는 도를 자기나름으로 가르친다 부처를 강의 할때는 공을 자기나름으로 가르친다 정도전을 강의 할때는 도나 공의 망망대해의 넓이를 잊으버리고 국소적인 편협한 민족주의를 탈피하지 못하여 세계적이며 우주적인 도,공(무아)보다 우선시하니 노자나 부처를 공부하였다하나 머리로 외운것에 다름아니니 도,공을 모르는 도올이 그렇게 말하는 것에 무엇이 잘못인가? 도,공을 수행하여 체험으로 터득하였다면 깨달은 성인(예;붓다,노자,장자,열자..)들과 못깨달은 성인(예;공자,맹자,정도전..)들을 모두 가르치진 않았을 것이나 도올은 누가 깨달은 성인이고 누가 못깨달은 성인인지도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단지 학자이며 철학자이며 민족주의자이지 그이상은 아닌 것이니 이러할진대 도올에게 도,공을 올바로 설할것을 기대하는 것은 이른 것이라 또한 부처나 노자도 처음부터 도=공을 알은 것이 아니니 이들뿐 아니라 자신이 깨닫지 못한 이라면 도올과 마찬가지가 아닌가! 또한 깨달음의 자리에서 모든 것에 그른 것이 없으니 도올도 옳고 신용국씨의 반론도 옳은 것이니 누구를 탓할것이 없음이라 모두가 윤회와 연기법에 의해 점점더 깨달음으로 진보하는 것이니 도올의 열정적인 강의는 나름으로 자신의 일을 하는 것이며 나아가 정신적인 공부(도,공)에 관심이 적은 사람들에게 대중적으로 어필하여 조금이라도 정신적인 공부에 흥미와 관심을 갖도록 이끌고 있으니 누군가 할일을 도올이 하는 것이라 어찌 한술에 도,공을 빗나가지 않고 올바로 깨닫도록 하겠는가? 이러한 이유로 윤회하면서 점진적으로 깨달음에 대한 자각을 성취하는 것이니 도올이 열정적으로 나름대로 열강을 하든지 하지않든지 아무른 문제가 없는 것이라(노 프라블럼 아닌감! 땡감,단감,홍시는 모두 이름과 맛이 다를뿐 결국은 모두가 감인 이치라 도올처럼 사람마다 제각각 다른 목소리를 내지만 결국은 무아의 발로(연기)이니 누구를 탓할 것인가 모든 색계의 현상은 무아가 일으킨 것이니 도올을 탓할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2004-02-25 오후 4:5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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