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학교 앞에서 어린애를 안고 앉아 동냥하는 젊은 아주머니가 있었다. 두어 살 쯤 되어 보이는 아기는 늘 엄마 젖을 만지작거리며 안겨 있었는데, 어느 날부턴가 머리 위까지 강보에 싸인 채 안겨 있었다. 며칠이 지난 후 아주머니는 사라졌다. 그 후 흉흉한 소문이 교실에 떠돌았다. 동냥 수입이 줄어들까봐 이미 죽은 아기를 열흘이 넘도록 안고 있었다는 것이다. 거지 아주머니는 ‘시체’를 부당하게 대우하고, 악용한 것일까? 간단치 않은 도덕적·법적 논란을 불러일으킬 만한 일이다.
다 돈 때문이다. 돈은 모든 것을 지배한다. 돈은 눈도 귀도 없지만, 그래서 무색무취하며 추상적이고 익명적이지만, 교환에 있어서만은 너무나 교활하다. 그래서 마르크스(Marx)는 셰익스피어를 인용하고, 셰익스피어는 아테네 신사들의 입을 빌어 “돈이 교환에 뛰어드는 곳이면 어디든, 양립할 수 없는 것을 중개하고, 자립적인 것을 비자립적인 것으로 만들고, 정반대의 것도 함께 있게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돈을 증오하는 단순한 사회주의적 평등론자들은 가끔 ‘돈을 없애 버리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하며, 우리는 다만 돈이 모든 사회적 선(good)들을 넘어 종횡무진하지 못하도록 ‘정교하고(왜냐하면 돈은 아주 교활하기 때문에) 다양한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 순리임을 알았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 사서는 안되는 것의 목록이 그것이다. 우리는 사람, 정치권력과 정치적 영향력 그리고 사법적 정의, 관직, 타인의 건강과 행복, 포상과 명예 등은 사고파는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엄격히 말하면 이는 금지가 아니라, 교환에 나서지 않아서 거래가 이루어지지 않는 중지상태이다.
그런데 돈이 교환에 나서지 않아서 거래 중지된 영역들 말고, 기꺼이 거래를 성사시키고 싶어 하지만, 거래를 방해하는 공동체의 관행들 때문에 ‘유보’되는 영역들도 있다. 인간 신체의 일부, 사체(死體), 역사적 기념·상징물, 정신적 가치 등이 그것이다. 이 모든 것은 거래가 성사되기만 한다면 매도·매수자 모두에게 아주 매력적인 조건을 제시할 수 있기 때문에, 돈은 은밀하게, 부정직하게 호시탐탐 거래기회를 노리는 영역이지만, 동시에 ‘절망’을 섞어 팔고, 절망의 부담을 안고 구매하기 때문에, 나는 이를 ‘절망적인 교환’이라고 부르고 싶다.
요즈음 논란이 되고 있는 어떤 여배우의 ‘위안부를 테마로 한 영상물’이 바로 이런 절망적인 교환에 해당한다. 영상물을 찍어 팔아서 번 돈으로 ‘일본군 위안부 명예와 인권의 전당’을 짓는데 전액 기부하면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거래가 아니겠느냐고 말하는데, 이는 미성년자를 고용해서 술을 팔아, 번 돈으로 학교를 지어 청소년에게 훌륭한 교육의 기회를 주겠다는 것과 마찬가지의 ‘거짓 원인의 오류’다.
이 사업을 기획한 회사와 출연한 연예인은 돈 때문에 시작한 일이 아니라고 강변하지만, 눈도 귀도 없는 돈은 사람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제멋대로 움직인다는 것은 ‘자본의 역사’가 말해주고 있다.
돈은 영상물을 다운로드 받는 ‘가격’만 알지, 정신대 할머니의 역사적 의미와 ‘가치’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구매자가 지불한 판매 정가(定價)란 잘생긴 여자의 야릇한 포즈와 보일 듯 말 듯한 젖꼭지로 표현된 동영상 파일을 소유하는 대가일 뿐, 치욕과 질곡의 한국현대사, 그 핏빛 절규와 한을 탁월한 영상미학을 통해 광정(匡正)하는 계몽의 대가는 아니다. 그러므로 ‘절망적인 교환’은 금지되는 것이다.
구승회/동국대 윤리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