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그 시간이 우리의 생명을 빼앗기 시작한다’던 세네카의 탄식 이후 시간을 정복하기 위한 인류의 노력에는 놀랄만한 가속도가 붙었다. 사람들은 마차에서 기차로, 기차에서 비행기로 갈아탔고, 전화기와 컴퓨터기를 만들어 냈으며,‘생명 연장의 꿈’을 실현시킬 온갖 신약들을 개발해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에게 시간 부족 현상은 더욱더 심화되기만 하고,‘시간 강박’에서 벗어나기란 쉽지 않은 듯 하다. 그래서 요즘‘아침형 인간’이나 ‘저녁형 인간’과 같은 시간 관리형 책들이 붐을 이루고 있는 지도 모른다.
<시간을 정복한 남자, 류비셰프> 에도 82년이라는 삶을 바쳐‘시간(時間)’이란 명제와 꿋꿋하게 마주섰던, 그래서 영원한 난제처럼 버티던 ‘시간’을 마침내 정복해 버리고 도덕적 자기 삶의 완성에 몰두했던 생물학자의 인생 기록과 철저했던 시간 관리법이 담겨져 있다.
이 책의 주인공 류비셰프는 50여년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시간통계 노트’를 작성하면서 시간의 속성과 존재감을 정확히 인식했고, 그 시간속에서 자기 삶의 가치와 가능성을 무한대로 확장해 냈다. 그 결과 1972년 8월 31일 소련의 곤충분류학자인 알렉산드로비치 류비셰프가 82세로 세상을 떠났을 때 그가 세상에 남겨 놓은 것은 70여권의 학술서적과 총 1만 2500여권(단행본 100권 분량)에 달하는 연구논문, 방대한 양의 학술자료와 꼼꼼하게 수제본한 수천권의 소책자들이었다.
생전에 류비셰프와 교류를 가졌던 국내외의 지식인들은 그가 남긴 엄청난 양의 원고 앞에서 할말을 잃었다. 더욱이 시간이 지나면서 속속 밝혀지는 류비셰프의 학문적 성취는 물론 철학과 역사, 문학과 윤리학 등을 전방위로 넘나들며 성실하고 해박한 논리를 펼치는 그의 독창적 이론에 그들은 다시한번 아연 실색할 수 밖에 없었다.
생존당시부터 류비셰프에게 꾸준한 관심을 보였던 이 책의 저자 그라닌은 말년에 류비셰프가 체류했던 울리야노프스크를 여러차례 방문해 이 방대한 원고들 속에서 흥미로운 ‘단서’를 발견한다. 바로 ‘시간통계 노트’다. 1916년, 당시 26세 나이로 시작한 이 일을 그는 하루도 빼먹지 않았다. 기록 형식은 간단했다.“곤충분류학 연구 2시간 20분, 논문집필 1시간 5분, 편지 3시간 20분, 프라우다지 15분, 이즈베스티야지 10분, 문학신문 20분, 톨스토이 책 1시간 30분….”식으로 적혀 있다.
그러나 시간에만 얽매이지는 않았다. 시간에 쫓기는 일은 맡지 않았고 잠을 8시간씩 충분히 잤으며 힘든 일과 즐거운 일을 섞어서 했다. 또 산책과 운동을 한가로이 즐겼으며, 단테와 세익스피어의 작품을 줄줄이 외우고 주요 공연과 전시까지 빠짐없이 관람했다. 그는 단지 자기에게 주어진 1분 1초에 의미를 부여했다. 시간을 사랑하고 아꼈으며, 시간 앞에 경건했다. 숫자 인생 82년을 25억8천5백95만2천초로 미분(微分)해버렸다. 이런 노하우로 그는 시간을 정복했다.
하루, 한달, 일년 등 우리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공평하게 분배된 재화다. 또한 시간이란 에너지는 단 한번도 전진을 멈춘 적이 없다. 이 세상이 처음 만들어 졌을 때의 그 모습 그대로 이 시간은 끊임없이 컨베이어 벨트처럼 돌아가고 있다. 그 평범한 진리를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자기시간을 철저히 통계적으로 관리해 온 류비셰프의 삶은 목적없이 표류하는 현대인들에게 큰 용기를 줄 것으로 기대된다.
이 책은 15년 전 국내에서 해적판으로 출간된 적이 있다. 당시는 중국어판 번역이었다. 보다 말끔한 번역과 산뜻한 포장은 15년이란 시간이 가져온 진화의 결과다.
책속의 밑줄긋기
△“버스를 탈 때에도 여러상황을 고려해 두 세권의 책을 가지고 탄다. 출발지 근처에서 타게 되면 앉을 수 있으니 책을 읽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필기도 할 수 있다. 이런식으로 ‘자투리 시간’을 활용하게 되자 새로이 찾아낼 수 있는 시간이 자꾸 줄어들었다. 반면 필요한 시간은 점점 더 많아졌다.”
△“계획이란 시간을 분배하고 그 과정에서 생활의 질서와 조화를 만들어 내는 작업이다. 즉 맑은 정신으로는 수학을 공부하고 피곤하면 읽기 편한 책을 읽는 등으로 시간을 짜면 효율적이다.”
△“자기 자신보다 더 엄격하게 자기를 평가할 수 있는 재판관은 없다.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자기 생활을 추적하며 만들어 놓은 수치와 자료를 근거로 평가를 이룬 류비셰프의 경우는 스스로가 재판관이었다.”
시간을 정복한 남자, 류비셰프
다닐 알렉산드로비치 그라닌/이상원· 조금선 옮김
황소자리
1만2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