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
우리 삶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이 단어에서 누군가는 '여행'이나 '고된 여정'을 생각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건강'과 '다이어트'를 떠올리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6년간의 무문관 수행을 마친 1979년 이후 차와 지하철 심지어 엘리베이터도 타지 않고 걸어서 몸을 움직여 온 원공 스님에게 '걷기'는 바로 수행이다. 지난 2002년 진행한 '한ㆍ일 평화 도보 대장정'도 마찬가지였다. 스님과 11명의 대원은 2002년 3월 서울 상암 월드컵 경기장을 시작으로 한국과 일본의 월드컵 경기장 스무 곳을 걸어서 순례했다. 이들은 하루 평균 35㎞씩, 123일간 4천여㎞를 걸었다. 단순히 비교하자면, 서울과 부산을 네 번 왕복한 셈이다.
하지만 한 일본 기자가 "그동안 걸은 거리가 얼마냐?"고 물었을 때 스님의 대답은 "무(無)"였다.
"20년이 넘게 걸어온 길이 얼마나 되는지 실제로 알 수 없을 뿐더러, 숫자는 내가 걷는 이 수행의 진실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나에게 있어 걷기는 의식주를 덜 가지고 그것에 덜 집착하기 위한 수행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최근 선보인 <우리는 왜 그 길을 걸었을까>는 바로 이 대장정의 기록이다. 책을 읽어보면, 대장정이 단순히 걷는데만 의의가 있었던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우리나라와 일본의 땅 곳곳을 걸으며 쓰레기를 주웠고, 그 자리에 도라지 씨를 뿌렸다.
"사람만큼 자연을 오염시키는 존재는 없습니다. 일본 돗토리 현 바닷가에는 한국의 쓰레기가 둥둥 떠다니고, 포항 앞바다에는 일본의 쓰레기가 떠다닙니다. 편리함이 증가함에 따라 쓰레기도 늘어난 것입니다. 대장정 기간 동안 지구 환경이 오염되고 파괴된 현장을 몸으로 보고 느끼며 걷고 또 걸었습니다."
대장정의 중간 목적지로 월드컴 경기장을 삼은 것도, 경기장의 웅장함을 감상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의 눈에 크고 아름답게 보이는 건물이 자연의 눈으로 보면 자연을 가장 심하게 파괴한 결과물이라는 가르침을 전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요즘 우리는 자동차에 너무 많이 의존하고 있습니다. 내 몸 하나 빠르고 편하기 위해 짧은 거리도 차를 타고 가는 경우가 많잖아요?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라기보다, 조용한 길을 걸으며 아름다운 꽃과 새를 만나는 즐거움을 만끽해 보십시오."
'호의는 절반만 받는다', '우리가 머문 곳을 늘 깨끗하게 치운다' 등의 원칙을 가진 스님과 '걷기 수행'에 동참한 대원들의 소감도 인상 깊다.
"'길을 걷다보면 자기 눈썹도 무겁다'던 원공 스님의 이야기를 처음에는 웃음으로 넘겼는데, 나중에는 '머릿속 생각조차도 무겁게 느껴져' 그 것마저도 비워야 했다."(김광수)
"사색을 통한 자기 성찰을 목표로 잡고 겁도 없이 길을 떠났지만, 사색보다는 여러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한 경험이 더 큰 도움이 되었다. 힘들어도 참을 수 있었던 것은 대원들 사이에 서로 주고 받았던 격려의 말이 아니었던가 싶다."(이주연)
지인들이 "차비나 하라"고 건네준 돈을 북한 동포들에게 보내고 있는 스님은, 이 책의 판매 수익금 역시 북한 어린이 돕기 '십시일반'에 기부할 예정이다.
"끝없이 걸었지만 결국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습니다. 삶은 끊임없는 새로운 시작일 뿐"이라는 스님은 2월 초쯤 또다시 길을 나설 예정이다. 목적지도 기한도 없는 여정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