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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화엄경’과 ‘꽃잎’, ‘나쁜 영화’, ‘거짓말’ 등 늘 파격적이고 새로운 연출로 영화계에 논쟁을 불러일으킨 영화감독 장선우(51) 씨가 시집 <이별에 대하여>를 펴내고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난 이제 다시 옷을 벗습니다/부처님 앞에서/안에서/오체투지 108배, 108배, 1080배…//그녀는 그렇게 멀어지네요.”(‘입재’ 中)
“이별은 없는 것/윤회는 끊지 않는 한/우리는 또다시 무엇이 되어/다시 만날 텐데//……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회향’ 전문)
‘입재’라는 시로 시작해 마지막 시 ‘회향’으로 시집을 닫은 장 감독은 “나와 내 영화에 대한 논란 때문에 받은 고통이나 실연의 아쉬움을 쓸어내기 위해” 시를 썼고, “살아가면서 이별을 겪는 모든 사람들과 이별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를 함께 공유하고 싶었기 때문”에 시집을 냈다고 말한다.
지난 12월 26일, 대학로의 한 카페에서 만난 장 감독은 지난해 여름 해인사의 한 암자에서 하안거를 지낼 때 깎았던 머리가 아직 채 자라지 않아 까칠한 모습이었다. 안거 동안 그는 故 혜암 스님(전 조계종 종정)에게 받은 화두를 참구했다고 한다. ‘절’과 ‘세속’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건만, 굳이 안거에 든 것은 화두를 ‘알음알이’로가 아니라 ‘몸’으로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만법(萬法)이 하나로 돌아가니/이 하나는 무엇인가요”(‘열반’ 中)
“선정(禪定)의 경지는 아닐지 모르겠지만, 영화를 찍으면서 느끼는 몰입의 경지, 몰아의 경지가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에게는 잘 놀 때와 (영화를) 잘 찍을 때, (선방에서) 잘 참선할 때가 모두 행복이죠.”
그가 불교와 만나게 된 것은 사회주의가 몰락하는 것을 보고 ‘참되게 이 세상 바라본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고민하면서부터다.
“있는 그대로 보자, 당위성이나 전망, 합법치성을 주장할 것이 아니라 부처님 법대로만 세상을 보고 살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이런 생각들이 영화에 녹아드는 것은 당연한 결과겠죠. 하지만 그 무렵 <화엄경>을 영화화한 ‘화엄경’은 지금 와서 보면 겁도 없이 덤벼들었단 생각을 지울 수 없어요.”
그동안 만드는 영화마다 논란을 빚었지만 영화를 통해 질문을 던지고 논쟁을 유도하는 ‘열린 영화’를 지향하는 장 감독은 논쟁 속에서 사회의 포용력이 커지길 바란다고 말한다.
“일부러 논쟁을 부추기려고 영화를 만든 것은 아닙니다. 다만 편견이나 고정관념을 깨고 그 시대의 문제를 동시대 사람들과 공유하려고 했을 뿐이죠. 제 영화는 온갖 변화와 시대의 문제에 대해 불교적 세계관을 대안으로 제시한 것이고, 그 방식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변태적인 성행위 묘사로 한국영화 사상 처음으로 두 번이나 등급보류 판정을 받았던 영화 ‘거짓말’은 가장 정치적인 영화라는 평가를 받으며 베니스 영화제에서 경쟁부문 수상작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 영화를 만들면서 아름답고 추한 것, 좋고 나쁜 것, 깨끗하고 더러운 것에 대한 분별심을 버리게 됐습니다. 배우들에게도 떳떳하고 솔직하게 표현하면 관객들도 그렇게 볼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지난해 개봉된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이하 성소)’ 역시 만장일치보다는 갑론을박의 평가를 끌어내며 쉽지 않은 질문을 던졌다. 3년이 넘는 제작 기간과 110억원이라는 초유의 제작비가 들어간 이 영화는 감독에게 적지 않은 마음고생을 안겨주기도 했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 주가 성소를 구하기 위해 시스템에 들어갔을 때 문제를 푸는 열쇠로 주어진 것은 금강경 사구게의 한 구절인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모든 상이 허망하니 상을 상 아닌 것으로 보면 여래를 본다)’. 이 구절은 영화를 만드는 전 과정에 있어 장 감독의 화두이기도 했다.
“내 목을 파고드는 죽비소리/따라 나는 갑니다/지금은 소발자국 어지럽고/아직은 죽비소리 슬프지만/언젠가는 그 소리마저 잊을 거예요”(‘심우도’ 전문)
“<금강경>의 한 구절을 알리는 것이 온 우주를 보석으로 채우는 것보다 더 의미있다”는 장 감독은 “그동안 관객들이 영화를 평가했다면, ‘성소’는 영화 관객의 삶에 대한 경험수준과 이해력을 평가하는 영화”라고 자부한다.
“불교도 그렇잖아요. 부처님이 제시한 길 역시 내가 아는 만큼 볼 수 있고 실천할 수 있으니까요. 제 영화 작업 역시 선재동자가 늘 머물지 않고 법을 찾아다니는 것과 같이 지난 영화가 이뤄놓은 성과를 모두 부정하고 새롭게 떠나는 ‘구법(求法)’ 과정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와의 인터뷰를 마칠 무렵, 영화 ‘성소’에 나온 대사 한 구절이 생각났다.
“방심하지 말고 좀더 적극적으로 노력하세요.”
장 감독이 영화를 통해 감독 자신에게, 행복의 길을 찾아 나선 사람들에게, 진정한 ‘나’를 찾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던지는 말이 아닐까.
□장선우 감독은?
1952년 서울 출생. 본명 장만철. 영화감독 선우완의 성(姓)을 자신의 이름으로 쓰고 있다. 서울대 고고인류학과를 졸업했으며 1981년 이장호 감독 연출부에서 영화 활동을 시작했다. 88년 두 번째 영화 ‘성공시대’로 데뷔, 당시 같은 해 데뷔했던 <칠수와 만수>의 박광수, <개그맨>의 이명세와 함께 비평가들로부터 ‘한국 뉴웨이브의 출현’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한국 뉴웨이브의 맥을 이어가는 대표작으로 평가받는 ‘우묵배미의 사랑’과 하일지의 동명소설을 영화화한 ‘경마장 가는 길’, 외설논쟁을 불러일으킨 ‘너에게 나를 보낸다’와 ‘거짓말’을 만들었다. 이후 한국영화 최초로 광주민주화항쟁을 다룬 ‘꽃잎’, 비행청소년들과 행려병자에게 카메라를 들이댄 ‘나쁜 영화’ 등 만드는 영화마다 치열한 찬반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영화 ‘화엄경’으로 32회 대종상 감독상과 44회 베를린 영화제 알프레드 바우어상 수상했다.
최근에는 서사무가(徐事巫歌) ‘바리데기’를 불교적으로 해석한 애니메이션을 준비하고 있다.
□수상경력
제2회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 넷팩상, 동경 국제영화제 특별비평상, 독일 만하임영화제 가톨릭문화상, 아시아태평양영화제 최우수작품상, 대종상예술제 각색상, 베를린국제영화제 알프레드바우어상, 백상예술대상 작품상 신인감독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