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8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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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획일화된 고전 종교의 틀 변화 요구
종교 패러다임변화와 불교 프롤로그
<전문>
현대사회는 산업문명에서 탈산업문명으로의 문명사적 전환기를 맞고 있다. 그 변화의 폭과 속도가 너무 넓고 빨라 그 실체를 가늠하기조차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지배문명이 다원화되고 그 다원화된 문명들이 서로 융합되어 가고 있다.

이는 문명의 단순한 변화가 아니라 패러다임 자체가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종교의 근대화라고 할 수 있는 종교개혁을 통해서 산업문명과 국민국가에 대해 겨우 적응해왔던 불교를 비롯한 고전종교들이 또 다시 문명사적 전환기를 맞아 시련을 겪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각 사회마다 종교상황도 다르고 산업문명의 침투정도나 국민국가의 형성과정이 각기 달라 그 진행방향을 일률적으로 단정할 수는 없지만, 21세기의 문명변동과 관련하여 종교의 변화를 살펴보는 일이 필요하다.

종교 패러다임의 변화와 불교(프롤로그)의 함의를 살펴본 후 ‘불교, 종교문화의 중심에 서 있는가’, ‘21세기 인류를 향한 불교문화의 비전’, ‘미래사회 불교가 직면한 도전’ 등에 대해 알아본다. <편집자 주>

1. 문명사적 전환

20세기의 인류문명을 요약하면, 산업문명의 시대이고, 국민국가의 시대이며, 이념적으로 양립된 냉전의 시대였다. 그리고 종교적으로는 최고의 문명종교로서 지위를 누린 기독교의 세기이며, 동시에 종교의 신성성을 해체한 세속화(世俗化)의 세기이고, 국가중심의 세속종교가 난무한 대체종교(代替宗敎)의 세기였다.

과학과 기술을 무기로 자연을 정복함으로써 형성한 산업문명, 개인과 집단의 권리를 억압하여 지배력을 획득한 국민국가, 이 양자는 18세기 이성중심의 계몽주의가 시도한 ‘근대적 기획’의 대표적인 산물이다. 즉, 타자를 희생양으로 삼는 문명이었다. 또한 역사의 진보 즉, 이성의 진보에 의한 역사발전이라는 거대담론이 근대이후 우리사회를 지배해 왔다. 그러나 이제는 이성의 진보가 바로 인간해방과 사회혁명을 향하는 역사발전이라는 도식이 점차 와해되어 가고 있다. 현대문명을 형성한 계몽주의의 프로젝트에 기반이 되는 이른바 서구의 근대성은 개별 존재론에 근거를 두고 정복과 투쟁을 통해 서로의 관계를 맺어왔다.

‘근대적 기획’은 보다 나은 정복과 투쟁을 위해 주체와 객체, 문명과 야만, 인간과 자연 등의 대립 이항구조를 만들어 왔다. 그리고 모든 것을 효율성과 합리성이라는 이름아래 지배문명 중심을 향해 열을 세워 복무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제 이러한 대립구도가 해체되어 가고 있으며, 그 경계선마저도 허물어지고 있다. 그리고 그 지배문명마저 파편화되고 있다. 이른바 근대화의 추상적이고 성찰적인 범주인 근대성 즉, 이성적인 인간 주체의 발견, 문명화를 위한 객체로서 자연의 정복, 개인과 개인사이의 투쟁 등은 인간 삶의 질이라는 차원에서 모두 재검토의 대상이 되고 있다. 각 분야의 경계를 명확하게 구획하는 근대적 세계관에서 자연과 인간, 그리고 우주를 묶어 총체적으로 조망하려는 유기적인 세계관으로의 관심이 증대되고, 과거 중심에서 벗어난 신비주의적인 주변문화들이 다시 부활하고 있다.

이제 과거의 민족이나 국가, 계급이나 이념에 대한 문제가 사회운동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주택, 환경, 소비생활, 교육, 여성, 청소년 등 일상생활과 관련이 있는 문제가 새롭게 사회운동의 대상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른바 이러한 신사회운동(new social movement), 혹은 시민자주운동의 등장은 이 시대의 시대정신의 표현이며 산물이다. 말하자면, 이 시대는 역사의 발전. 이성의 진보, 그리고 냉전이데올로기와 같은 거대담론을 거부하고 작은 이야기, 분산과 지역전, 혹은 국지전을 강조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이는 모든 영역에 분권화와 유연성을 가져오게 할 것이다.

모든 경직된 관료제 조직이 이제 변화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많은 영역에서 창의성과 유연성의 증진을 위해 조직구조와 작업과정이 전면적으로 분권화하고 네트워크화하려는 노력이 진행되고 있다. 결과적으로 하드웨어보다는 소프트웨어, 물질문화보다는 정신문화, 정치경제보다는 사회문화로의 사회적 중심가치가 급속히 이동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야말로 표준화되고 획일적인 고전종교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을 것이다.

2. 종교문화의 패러다임 변화

이러한 문명사적 전환은 20세기 문명을 기반으로 성장한 고전적인 종교문명을 근본적으로 위협할 것으로 보인다. 산업문명과 국민국가를 기반으로 성장해온 제도종교나 신종교들은 이러한 새로운 환경변화에 대해 많은 문제들을 다시 성찰해야할 것이다. 이성과 과학의 맹신 때문에 일부에서 위세를 떨쳤던 과학적 무신론과 같은 반종교적인 성향이나 종교와 문명을 서로 다른 차원에서 위치를 설정하여 이성과 타협하는 이신론(理神論)적 성향은 생활문화와 삶의 질을 강조하는 21세기에는 크게 약화될 것이다.

근대이후 인간이 쉽게 접근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이른바 초월의 영역에 방치해 두었던 종교를 인간의 삶의 현장에 끌어내려 새롭게 재검토해 보고자 할 것이다. 초월성과 유일신만이 문명종교의 판단기준이 되는 시대는 이제 지날 것이다. 이 기준에는 종교의 정체성과 이성에 의한 진보로 포장된 서구 중심적인 계몽주의 사고가 전제되어 있다. 그러나 21세기에는 제도 중심적이고 기독교적인 종교개념 자체가 많이 달라질 것으로 보인다. 신이 없이 영성만 존재하는 종교가 새로운 힘을 얻고, 종교적 영성을 담아내는 틀도 관료적인 교단조직이 아닌 새로운 소 공동체로 등장할 가능성이 많다.

계몽주의 이후에 진행되었던 세속화의 현상도 역시 많이 달라질 것이다. 이전 세기에서는 인본주의, 맑시즘, 진화론, 과학기술의 발달 등 세속적인 이데올로기가 전통사회의 종교기능을 대체하는 경향이 있었다. 여기에는 근대국가가 형성되고 정교분리제도의 정착으로 말미암아 사상, 교육, 예술 등과 같은 사회 제 영역이 자율성을 획득한 것에 힘입은 바가 컸다. 그러나 21세기에는 종교의 영역 자체가 그 경계선을 잃고 타문화와의 융합이 일어나거나 고전종교는 파편화와 동시에 재성화(再聖化)가 추진될 것으로 보인다.

과거에는 국가와 민족에 봉사하고 충성하는 대체종교가 난무하였으나 이제 국민국가의 신화가 약화되면서 시민중심의 대체종교가 많이 나타날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는 지방단위 운동과 국가단위 운동, 문화적인 차별성을 부각시키는 문화권단위 운동, 세계시민으로서 책무를 다짐하는 전지구적 단위운동 등으로 상당히 다차원적이면서 각 단위의 생활문화의 문제를 담은 종교들이 확산될 것으로 보인다. 삶의 환경과 질에 관련되는 소비자 중심의 생활종교가 부상할 것이고, 건강과 부와 같은 개인차원의 세속적인 삶을 증진시키기 위한 종교도 많이 나타날 것으로 보인다.

이상과 같은 종교변화의 경향은 최근 우리사회에서 새로 등장한 신종교들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80년대 이후 등장한 새로운 종교운동은 신앙계층이 취향계층이나 매니아층으로 다양한 분화되어 있다든가, 개인의 건강과 부 혹은 심리적 평안을 추구하는 개인중심적, 현세중심적 구원관에로의 경도되어 있다든가, 인간의 건강과 잠재력개발을 위한 각종 수련방법, 주술적 수련방법 등을 강조하고 있다든가, 윤리적 문제와는 무관한 저항문화적 성격을 가지고 기존 사회질서 및 종교를 부정하고 있다든가 하는 점은 이미 기존의 종교와 전혀 상이한 양상을 표출하고 있다.

서구 존재론을 기준으로 평가하여 당연시했던 현대문명들이 인간의 삶과 관련하여 재검토되고 있는 지금 그 대안으로서 불교의 무아와 연기와 같은 관계론의 중요성이 다시 인식되고 있다. 그리고 고전종교의 윤리와 형이상학은 인간의 환경을 자연세계와 사회관계로 제한되어 왔으나 이제 인간의 환경은 우주여행과 생명복제를 통해 무한한 시간과 공간으로까지 크게 확장되었다. 새로운 윤리와 형이상학이 필요할 때이다. 그런 면에서 불교는 분명 현대문명에 공헌할 수 있는 많은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그 동안 서구문명에 밀려 지배문명을 추종만 해왔던 불교가 이러한 문명사적 전환을 계기로 맞아 자기의 정체성과 고유성을 십분 발휘하는 기회로 삼았으면 한다.

윤승용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위원
2003-12-31 오전 9:5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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