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9. 7.27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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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종 개혁 10년을 말한다
청화 스님, 정병조 교수 성태용 교수 좌담
참가자 : 청화 스님(실천불교전국승가회 전 의장), 정병조 교수(동국대 윤리문화학과), 성태용 교수(건국대 철학과), 김원우 취재1부 차장(사회)

2004년은 94년 조계종 개혁 불사 10년째 되는 해다. 그간 개혁불사는 어떤 열매를 수확했고 어떤 결실이 여물고 있는가? 또 반성해야 할 사항은 무엇이고, 어떤 비전을 가져야 하는가? 94년 당시 개혁의 주체세력이었던 실천불교전국승가회 전 의장 청화 스님과 정병조 교수(동국대 윤리문화학과), 성태용 교수(건국대 철학과)가 한 자리에 모여 지난 10년간을 되돌아봤다.

이 자리에서는 크게 △94년 조계종 개혁 무엇을 남겼나 △한국불교의 과제(중앙집권적 불교조직, 출ㆍ재가 문제, 수행체계, 신도조직) △21세기 한국불교 비전(다원화 사회에서 사회적응, 사찰의 수행문화 공간화, 전통과 계승의 혁신문제) 세 부분으로 나눠 회고와 반성, 대안 모색을 했다.

△1994년 조계종 개혁이 과연 무엇을 남겼는지에 대해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이 있겠지만, 긍정적인 측면은 발전시키고 부정적인 측면은 고쳐나가면 우리가 찾고자 하는 방향을 발견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먼저 긍정적인 측면에 대해 이야기 해봤으면 합니다.

성태용=개혁적인 의지를 가진 사람들의 뜻이 조금씩 반영됐다는 것 자체가 커다란 긍정적 측면입니다. 개혁 와중에 재가자들의 참여 기회가 크게 열리고, 총무원 운영이 민주화됐습니다.

그러나 한국불교의 근본적인 구조자체는 변화하지 않았습니다. 94년 당시 의지는 강렬했지만 개혁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기대감이 상실됐습니다. 여기에는 개혁세력이 종단 내부에 들어가 있기 때문에 제대로 비판할 수 없었던 것도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한 것 같습니다. 그렇게 되니 승가 사회에 ‘바꾸자’는 의지가 없어지고, 개혁에너지가 사그라졌습니다.

정병조=조계종 개혁은 모든 불교인들의 바람이었습니다. 다변화된 시대에 맞게 내면과 외면 양면 모두 개혁돼야 하지만 외면만 개혁됐습니다. 94년 개혁불사는 한국불교 천육백년 역사에 큰 의미가 있습니다. 종헌ㆍ종법 개정 등 여러 가지 변화를 이뤄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힘에 좌초한 것도 현실입니다.

청화 스님=개혁입법 중 가장 긍정적인 것은 겸직을 금하는 조항입니다. 개혁 이전에는 총무원장이 종회의장도 하고, 교구본사 주지들이 종회의원도 하는 등 종회가 집행부에 대한 견제 기능을 전혀 못했습니다. 즉 비판 세력이 없어 종단이 무기력했던 것이지요. 또 하나는 총무원과 포교원, 교육원으로의 삼원체제가 이뤄진 점입니다.

예전에는 포교원과 교육원이 독립되지 않아, 적은 인력과 예산 속에서 해야 할 일을 제대로 못하는 문제점이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종단을 이끄는 견인차라 할 수 있는 종회의원, 본사 주지 등 종무일선에 나선 분들이 상당히 젊어졌다는 것도 긍정적인 모습입니다.

△조계종 개혁의 부작용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정병조=부정적인 측면을 짚어보면 개혁의 미진한 점을 보완해 나가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개혁의 부정적인 면 중 한 가지는 다른 문중에 대한 배타적인 의식입니다. 개혁을 하다보면 저항세력과 부딪치게 됩니다. 여기서 저항세력은 폭넓게 봐서 수구기득권 세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수구기득권 세력들이 개혁의 부당성을 이야기하면서 총무원장 스님을 대상으로 직무정지가처분 신청 같은 세속법에 의지해 분쟁을 가중시키고 있습니다. 또 다른 한 가지는 종도들이 개혁에 대해 무관심한 것입니다. 종단 문제에 나서면 안 된다는 겸손의 표현일지 모르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방관이자 방조입니다.

청화 스님=우리들이 처음 개혁의 깃발을 내세웠을 때 개혁의 주된 목적은 총체적으로 사회적 신뢰 및 시대적 여망에 부흥하는 종단, 한점 부끄럼 없는 종단을 만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개혁의 사명감이 결여되면서 기존 종단의 구태의연한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개혁 과정에서 상처를 입기도 했습니다.

문중이라는 거대한 성곽 속에서 보호받고 살다보니, 당대 현실을 직관하는 안목이 없고 주관이나 의식, 명분을 찾지 못했습니다. 문중들이 교구본사를 사유화하다보니, 종단이 이념이나 진보적인 사고에 따라 밝히는 시대적 각성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틀에 갇혀버렸습니다. 중앙 행정적 측면 이외에도 종단은 종단의 아성 속에서만 존재하고 문중과 본사는 따로 놀았습니다.

성태용=일전에 조계종 총무원 예산 편성을 보고 한심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국불교 최대 종단 예산이 이것밖에 안되는가 하는 자괴감이 들어서였습니다. 한국불교가 성장하기 위해선 중앙으로 결집돼야 합니다. 교구본사 나름대로 특징 갖춰가면서 중앙에 힘이 실려야 합니다.

또 출가공동체가 우리의 모델이라 생각할 때, 비구니의 위상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남녀평등문제를 놓고 볼 때, 재가가 승가를 모두 본받기에는 승가에 문제가 있습니다. 부처님이 비구니 스님을 사제로 받아들였다는 것 자체가 그 시대에 가히 혁명적인 일이었습니다. 비구니 문제를 통해 계율을 융통성 있게 해석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반드시 논의해 봐야합니다.

정병조=교구본사와 총무원간의 합리적인 관계가 설정돼야 합니다. 현 교구본사 체제는 1911년 조선사찰령이 발표되면서 일본인들이 소유권을 몰수하기 위해 만든 것입니다. 현 교구본사 제도의 가장 큰 문제는 우리나라 삼분의 일을 차지하는 서울에 본사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또 한국불교 스님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비구니 스님들이 결집할 본사가 없는 것도 문제입니다. 본사와 말사의 사격이 현저하게 뒤바뀐 것도 개선돼야 할 것입니다. 이런 문제들은 종도들의 의견을 구한 뒤 구체적으로 논의해 현행 골격을 유지한 채 재정비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총무원이 지금과 같이 분담금에 의존해서 행정을 집행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자연스레 한국 불교 현황으로 넘어 왔습니다. 평가 보다 중요한 것이 과제, 대안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종단의 현황과 함께 앞으로의 과제 및 대안을 말씀해 주십시요.

청화 스님=종단을 능률적으로 운영하고 단단히 결집시키기 위해서는 중앙집권제가 바람직합니다. 그렇지만, 제도라는 것이 아무리 엉성해도 사람들이 운영만 잘하면 좋은 것이 될 수 있고, 아무리 좋은 제도라도 순기능보다 역기능으로 흘러가게 되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 됩니다. 총무원장 직선제가 순기능보다 역기능으로 흘러가는 문제점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잘못되는 것을 알면서도 바람직한 대안이 없어 어떻게 해야 할지를 고민하는 수준입니다.

지금까지의 전통은 문중이 형성되면, 문중에는 어른들이 있어 그 결정권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문중 안에도 사분오열이 생겨 권위가 무너지고, 대중공사도 문제점이 생겼습니다. 결국 수행자로서의 정신이 상실된 상태에서는 어떤 결정방법이건 간에 문제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정병조=2002년 한국종교인구를 조사한 적이 있는데 대략 불자가 1천 2십만명 정도 되는 것으로 나왔습니다. 아직까지 불자 숫자가 1위인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가분수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은 문제입니다. 즉 노년층이 사라지고 나면 제2 종교로 전락한다는 것입니다. 청년층 포교에 관심을 가져야만 합니다.

또한 한국불교를 세계화 시키는 노력도 필요합니다. 한국불교 세계화는 숭산 행원 스님처럼 몇몇 큰스님들이 개인적인 원력으로 불모지를 개척하는 수준이었습니다. 이제부터라도 종단 차원에서 더욱 관심을 쏟아야 합니다. 승가 사회의 보수교육도 꼭 필요한 부분입니다.

현재 승가사회 보수교육이라고 해봤자 일년에 한번 정도 본사 주지 스님들을 대상으로 한 문화재 교육 정도입니다. 조계종이 살길은 역량 있고 상식적이며 일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합리적인 스님들이 많이 나오는 것에 있습니다. 이를 위해 법계고시 등의 실시가 시급합니다.

성태용=서울 불광사가 회계감사까지 했다는 이야기 듣고 사찰 운영 자체의 변화 조짐을 읽었습니다. 하지만 스님들에게 사회적인 부담을 지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봉사영역 등은 신도들의 몫입니다. 다만 시줏돈이 부처님 법에 따라 여법하게 쓰여졌는지 등을 물을 권리가 있다는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사찰재정 투명화 운동 등 변화 바람이 외부에 의해 강요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자발적으로 일어나야지 타의로 발생되면 승가 사회의 권위는 사라지고 맙니다.

△ 재가자의 역할이 중시되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종단이 출가중심으로 구성되다 보니 그런 면이 강한데요, 재가자의 역할에 대해 한 말씀씩 해주십시요.

성태용=재가불교 운동을 하는 사람으로서 귀감으로 여기는 것이 있습니다. 부처님이 열반에 드실 때 스님들이 장례치를 걱정을 하니 ‘신앙심 깊은 재가불자들이 여법하게 치러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즉 스님들은 수행하고 재가불자는 그 밖의 것을 하라는 역할을 부처님께서 정해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금 재가자들은 재가자가 해야 할 일을 스님들에게 넘기고, 스님이 해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재가자는 출ㆍ재가자가 해야 할 일을 구분해, 자기 위상을 찾아야 합니다. 또 재가자는 스님들의 승가공동체, 청정공동체를 본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스님들은 청정한 모습으로 재가자가 나아가야 할 큰 길을 제시해 주면 됩니다.

청화 스님=우리나라는 외형적으로 대승불교를 표방하고 있지만 내용적으로는 소승불교를 지향하는 기형적인 모습입니다. 대승불교의 주체는 재가불자입니다. 그런데 재가 불자들의 각성이 크게 일지 못하고 있어 문제입니다. 지금의 재가불자는 전적으로 스님과 종단에 의지해 무언가를 해주기만 바라고 있습니다. 재가불자의 기본 토양이 되는 종단과 스님이 견인차 역할을 해야 하겠지만, 재가 불자들도 먼저 자각해야 합니다. 재가불자들의 창의력이 불교 발전 동력으로 창출되지 못하고, 스님들은 재가불자를 지도할만한 지도역량이 충분치 않습니다. 상호간에 보충해야 할 부분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불교적인 관점에 서서, 기업가는 불교정신에 입각해 기업을 경영하고 일반 사회인들은 불교적으로 사고하고 불교를 삶의 철학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런데 1천 6백년의 역사와 민족의 삶, 사회사상, 체감 불교가 서로 동떨어져 있습니다. 이 두 가지가 결합돼야 합니다.

정병조=일부의 재가단체 또는 재가자들이 종회에 의석을 요구하거나 종단 운영 참여를 요구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학교에서 학생들이 교수를 뽑는데 관여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찰재정 공개는 승가와 재가 신도들이 화합하고 협력해서 이뤄지는 것이지 재가위상과는 관련 없습니다. 하지만 스님들이 다변화된 사회 상황에서 재가자들보다 전문지식이 뒤떨어진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때문에 불교에 애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활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개인적 이윤보다 불교발전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재가자들을 발굴 육성해야 합니다. 출가와 재가는 서로 주권을 다투는 관계가 아니라 상호보완적인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일부 스님들에 한정되는 것이지만 신도들에게 군림한다는 생각은 절대로 안됩니다. 보다 낮은 단계에서 높은 단계로 끌어올린다는 의식을 지녀야 합니다. 스님들은 오직 신도회 활성화에 주안점을 둬야 합니다. 또 개인적인 복 보다 사회적인 복을 비는 쪽으로 재가자들을 고양시켜야 합니다.

△수행체계에 대한 논란이 많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한국불교의 근간을 이뤄온 ‘간화선의 위기’라는 얘기까지 나오고 있는데요.

청화 스님=불교와 신을 믿는 종교가 같은 ‘종교’ 선상에 있지만, 다른 점이 있다면 신을 믿는 종교는 믿음이 강조되고, 불교는 마음닦음이 강조된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신의 능력을 상기하면서 의존하면 편할 수 있지만, 닦음은 의지를 갖고 나의 문제점을 개선해나가는 방향을 찾는 개인의 의지를 필요로 합니다.

여기서 닦음은 스님 뿐만 아니라 재가불자에게도 해당되는 내용입니다. 신도들이 수행까지 겸비했을 때 스님들도 신도를 보는 눈이 달라질 것이고, 달라져야 스님과 신도단체의 유기적인 관계가 바람직하게 형성될 것입니다.

정병조= 현재 재가신도들의 입장에서 간화선은 문제가 있습니다. 생존을 위해 자존심을 버려야 하는 시대, 다변화된 시대, 지적인 욕구를 충족시켜야 하는 시대에 간화선이냐 위빠사나 냐 이야기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수행적인 면에서 간화선은 권장되고 지켜져야 하지만 재가자들에게 강요돼서는 안됩니다. 각자의 처지와 방편에 맞는 수행법으로 정진하도록 해야 합니다. 물론 간화선을 폄하시키거나 가치를 평가절하 해서도 안됩니다.

성태용=간화선 문제가 논의되는 것은 올 것이 온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한국불교의 특징인 간화선이나 선을 이야기하지 않으면 불교계의 역적 같은 분위기를 풍겨왔습니다. 자칫 부처님보다 조사를 앞세운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한국 불교는 교(敎)라는 토대를 갖고 있지 않은데, 간화선이 선의 전부인양 논의되는 부분은 잘못된 것이 아닐까요.

특히 재가불자들에게 간화선이 유일한 것인 양 말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24시간 수행하는 스님들과 재가불자들을 동일하게 취급할 수는 없습니다. 내공을 쌓은 후, 내공이 떨어지면 다시 수행하고, 소모하고, 수행하는 것은 재가불자에게 맞지 않습니다. 삶의 현장에서 재가불자가 수행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또 스님들이 찾아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청화 스님=수행방법으로 간화선을 얘기하지만, 간화선이 탈 불교는 아닙니다. 간화선은 수행하는 방법입니다. 한 방법이면서도 그 방법이 사람의 체질이나 성향에 따라 맞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간화선이 한 방법인 것은 틀림없지만, 모든 사람이 간화선을 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다음은 멸빈자 구제에 대한 얘기를 해봤으면 합니다. 과연 멸빈자 구제가 필요한지, 또 필요하다면 어떤 방법으로 구제해야 하는 것인지 의견을 나눠 주십시요.

정병조=멸빈자를 구제한다고 했을 때 어느 선까지 할 것인가, 누구를 대상으로 할 것인가 등의 문제가 돌출됩니다. 일반 사회에서 사형을 구형한 사람이라도 구제하는 지금 원칙으로는 체탈도첩된 사람이라도 구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차등적인 방법으로 구제하는 것이 현실적입니다.

청화 스님=소위 종단에서 징계 받은 스님들은 정화 이후에 개혁 할 때마다 종단에서 양산되어 왔습니다. 이 스님들은 종단에서 소외받은 세력이 되어 있습니다. 이 스님들은 승려로 살아온 반평생을 생각하면 암담하고 억울할 것입니다. 그 분들이 소수로 있는 현실에서, 종단은 그들에게 문호를 개방하지 않으니 그 반발로 종단 분규 같은 것을 일으키는데, 그럴 때마다 종단화합을 이야기하게 됩니다.

종단이 화합되려면 토대가 구축돼야 합니다. 이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징계했던 이들을 모두 사면 복권시켜야 합니다. 정치의 회오리에서 징계 받은 이들에게 문호를 개방해 승려로서 인생을 마무리하고, 종단의 문호를 개방하고 이들이 종단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지 않으면 종단이 안정될 수 있습니다.

성태용=어차피 정치적인 회오리 속에서 희생된 것은 구제의 길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정치적인 회오리 속에서 불교계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줬던 분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은 스스로 승복을 벗어 반납하는 의식을 치르고, 상대는 용서하는 양쪽의 움직임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분들이 진심으로 참회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그것을 너그럽게 받아들여 사면하면, 진정한 불교적인 사면일 것이고 불교계의 화합도 동시에 이뤄질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분들이 문제를 일으키고, 그것 때문에 골이 깊어지고 또 문제를 없애기 위해 사면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에서 한국불교가 적응하기 위한 모습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젊은 층 포교전략, 전통과 계승의 혁신문제 등과 관련해 이야기를 나눠주시기 바랍니다.

정병조=미래 사회에서 불교는 한국 현실로 볼 때 다종교 중 하나일 뿐입니다. 미래 사회에서 불교 평가는 얼마나 훌륭한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에 얼마나 기여했는가가 중요합니다.

불교는 진리성은 충분하지만 사회성은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스님들은 사회에 봉사하려고 출가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 부분은 재가자들이 보완해줄 수 있습니다. 선종을 표방하고 사회에 헌신하는 이미지를 심기 위해선 목표를 설정해야 합니다. 또한 한국불교의 세계화를 위해 이미지메이킹을 해야 합니다. 해외에서 티베트, 일본, 태국, 중국 불교는 있지만 한국불교는 없습니다. 십년 정도만 노력하면 미국 유수 대학에서 한국불교 관계를 전공하는 사람들을 키울 수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한국불교에 미쳐서 공부하는 것이 한국불교 세계화에 효과적입니다.

청화 스님=부처님께서는 깨달음을 성취하고 나서 이른바 ‘중생고’를 자각했습니다. 이를 통해 부처님이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사명감을 자각한 것이지요. 이처럼 오늘 우리가 처해있는 시대상황에서 사회, 경제, 남북, 세계적 관계 등 총체적인 시대 상황 속에 한국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불교가 시대적 사명감을 갖고 그 역할을 충실히 할 때 살아 있는 생명력 있는 불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행자들은 수행에 중점을 두면서 사회를 바로 보고, 재가불자는 불교를 믿고 수행하되 불교에만 매몰되지 말고, 시대정신을 생각하고 불교 신자로서 해야 할 의미 있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이럴 때 불교가 미래에도 한국사회에서 영향력을 가질 수 있고 종교를 대표하는 종교로 우뚝 설수 있을 것입니다.

성태용=한국불교가 아직 세계적 위상은 없지만 특징은 있습니다. 중국불교는 전통이 무너졌고 일본불교는 활력이 없습니다. 하지만 한국불교는 불교전통을 갖춘 북방불교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시대적인 고(苦)를 불교가 해결해야 합니다.

지금까지는 퇴영적으로 ‘물질문명에 지친 자들 이곳으로 오라’처럼 마치 쓰레기에 뿌리는 향료처럼 불교가 자리하고 있지 않았나 하는 안타까움이 있었습니다. 어렵겠지만 승속을 막론하고 고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한국불교가 마련해 나간다면 세계적인 불교로 우뚝 설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스님들은 승가공동체를 청정공동체로서 여법하게 자리 잡고, 재가자들은 승가를 모범삼아 재가자의 공동체를 이뤄내야 합니다. 이렇게 사부대중이 제 자리를 찾을 때 불국토를 실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남동우 기자 | dwnam@buddhapia.com
2003-12-29 오전 9: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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