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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굴사원의 흙벽은 불화로 장식됐고, 구멍마다 부처님이 모셔졌다. 쿠차와 투르판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석굴사원은 오랜 시간에 걸쳐 같은 장소에 군집해, 밍오이(ming-oi, 천개의 집) 혹은 천불동(千佛洞)이라 불렸다.
천년의 세월을 뛰어넘은 19세기 비단길. 인적은 없고 흔적만 남은 과거의 영화를 상징하는 성보문화재는 영국·러시아·독일·프랑스·일본 등 이국 탐험대의 톱질 소리와 함께 사막을 떠났다.
12월 16일부터 내년 2월 1일까지 열리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서역미술’ 특별전. 천불도·관음보살도·보살입상번 등의 중앙아시아 종교문화유물과 그 지역 사람들이 사용했던 신발·그릇·거울·도장 등 생활용품, 무덤에서 출토된 매장유물 176건 462점이 전시됐다.
특별전 이틀째인 17일. 이른 시간이라 관람객이 그리 많지 않지만, 1980년대 옛 중앙청 청사에서의 전시 이후 처음 공개되는 서역 불교미술의 정수를 접할 수 있다는 기대에 찬 관람객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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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 3차원 입체영상을 지나 입구를 들어서면 둥근 얼굴에 활모양의 눈썹, 아무런 장식 없이 흘러내린 머릿결의 온화한 인상을 한 천부상(天部像)과 마주친다.
사찰 벽을 장식했던 천부상을 자세히 살펴보던 관람객 이효은(24) 씨는 “천부상의 시선이 서역 땅을 바라보는 듯해 왠지 슬퍼 보이기도 하지만, 편안함도 느껴진다”며 “우리와 멀리 떨어진 곳의 유물이지만, 얼굴 생김이나 느낌이 낯설지 않다”고 말한다.
천부상의 오른쪽으로는 5점의 벽화 천불도가 위용을 드러낸다. 투르판의 야르호 석굴사원 제4굴 천정에 묘사돼 있던 여래좌상인 천불도 조각을 이어붙인 자리마다 석굴의 흙과 지푸라기 흔적이 남아 있지만, 보존과 관리를 쉽게 하기 위해 최근 박물관 보존과학실이 가역성을 강조해 보존처리를 마친 것이다.
3m 높이의 보살입상번 3점 앞. “여기 전시된 보살입상번도 원래는 매우 긴 것으로 추정되는데, 지금은 보살입상 2체만 남아있습니다.” 박물관 자원봉사를 하고 있는 이영순 씨의 설명에 관람객들은 “영국과 달리 식민통치를 받았던 한국이 어떻게 중앙아시아 유물을 소장하게 됐을까?”라는 의문을 갖는다. 이 많은 유물들은 누가 가져다 놓았을까?
19~20세기 서구열강들은 중앙아시아의 유물들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영국·러시아 등 각 국에서는 막대한 탐험자금을 투자하며 학술탐험과 동시에 정보수집 작업을 함께 벌였다.
이같은 상황에서 당시 런던에 체류하고 있던 일본 경도(京都)의 정토진종(淨土眞宗) 본원사파(本願寺派) 본산 니시 홍간지(西本願寺)의 제22대 문주였던 오타니 코오즈이(大谷光瑞 1876~1948)는 불교 전래의 경로를 따라 독자적으로 서역지역을 답사하게 된다.
1902년부터 13년 동안 오타니 탐험대는 서본원사의 재력을 배경으로 신강지방 뿐만 아니라, 티베트·네팔·인도·동남아 각 지와 운남·사천을 포함한 중국 등 아시아 전역에 걸친 3차례의 탐험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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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년의 탐험동안 오타니 탐험대는 불교에 관한 깊은 식견을 바탕으로 뛰어난 수준의 유물을 수집할 수 있었다.
실제로 오타니 컬렉션은 벽화의 주요 부분을 위주로 수집한, 석굴사원의 벽화를 연구하는 데 결정적인 자료로 평가된다.
서역미술을 전공한 국립중앙박물관 민병훈 학예연구관은 “현재 서역의 석굴사원에는 벽화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았고, 독일이 수집한 벽화는 2차 세계대전 때 재로 변했다. 또 서역에 이슬람교가 전래된 후 이교도들이 석굴에서 생활하면서 벽화의 눈을 많이 훼손해, 그만큼 희귀한 유물이다”고 설명했다.
민 학예연구관은 또 “서역유물에서 보이는 연주문과 대칭문, 색조문 등은 통일신라 기와, 안압지 출토 유물에도 나타나 실크로드를 통해 당시 동서교류가 이루어진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며 불교 미술의 흐름의 증거가 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오타니 탐험대에는 학자가 포함되지 않아 학술 보고서, 발견지·출토지에 대한 기록이 결여된 경우가 많다는 치명적인 결점을 갖고 있다. 또 전문 탐험대가 아니었기 때문에 뜯어낸 벽화 주위를 심하게 훼손해 같은 장소를 다시 방문했던 영국 탐험가 스타인이 개탄했다는 후문이다.
오타니 탐험대 덕분에 서역의 불교미술을 목격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지만, 고향을 떠나온 이들 유물이 왠지 제자리를 잃은 듯한 느낌이 드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