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승들의 마지막 순간이 어떠한가는 불자들 뿐 아니라 일반인들의 큰 관심사다.
불교에서는 마음자리를 분명히 깨닫는 공부가 완전해지면 태어나고 죽는 것이 자유자재로 가능하다는 생사관을 갖고 있다. 육신을 헌옷 벗어 버리듯이 아무 때나 마음대로 벗어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불교계의 맥을 잇고 있는 임제선풍은 아무도 없는 곳에서 흔적 없이 가는 것을 조사의 가풍으로 삼는다. 그렇지만 고승들은 중생들이 가장 관심 갖는 죽음을 통해 불교의 가르침을 보여준다. 마지막까지 자유자재한 열반모습을 통해 중생들에게 생사가 다르지 않음을 일깨워주는 것이다.
고승들은 삶과 죽음의 자유로움을 보여주기 위해 앉아서 이야기 하다가 육신을 벗기도 하고, 서거나 물구나무서서 벗기도 하는 것이다.
스님들의 다양한 열반의 모습을 정리한 ‘적멸의 즐거움’을 펴낸 정휴스님은 “나고 죽음에 집착하지 않고 자유스러워야 그 자기 죽음도 그렇게 자유스럽게 표현할 수가 있다”고 말한다.
국내외 고승들의 입적일화는 다양하다.
앉은 모습으로 열반에든 백양사 방장 서옹 스님 외에도 근세 고승인 한암 만암 스님이 좌탈(坐脫)했다. 보조국사는 제자들과의 백문백답을 마친 다음 법상에서 내려와 마루에 앉아 그대로 입적했다.
중국 선사들의 행장을 기록한 전등록(傳燈錄)을 보면 여러 선사들의 입적 과정을 자세하게 밝히고 있다.
관계 선사는 몸을 태울 화장나무를 미리 준비해 그 위에 서서 열반에 들었고, 광오 선사는 미리 부도를 만들어 놓고 입적하였다고 한다.
승천선사는 뜰 앞의 잣나무를 붙잡고 서서 열반에 들었고, 보화(普化) 선사는 관속에 들어가 입적했다.
등은봉 선사는 운동선수처럼 물구나무를 서서 입적했고, 법지 선사는 제자들에게 ‘내가 죽거든 시체를 소나무 밑에 드러내 놓아 새와 짐승들의 먹이가 되도록 하라’고 부탁한 뒤 앉아서 입적했다.
한편 보통 앉고 서는 모습으로 죽는 것을 좌탈입망(坐脫立亡)이라 하지 않는다. 그것은 좌사(坐死)일 뿐이다. 헌옷 벗듯 아무 때고 육신의 몸을 벗는 것을 좌탈입망이라 한다.
앉아서 육신을 벗는 것을 굳이 표현하자면 좌탈(坐脫)인 셈이다.
* 스님들의 열반일화
한암 스님의 좌탈입망... 6.25전쟁중 오대산 100리 안쪽으로는 국군 작전지역으로 월정사와 상원사를 포함한 모든 사암과 민가들이 텅텅 비었고, 사람들은 모두 2개월여전 피난을 떠났다.
오직 군작전상 소각하기로 되었던 상원사를 단신으로 지켜낸 한암 스님만이 상원사에 2명의 사미와 공양주보살이 머물러 있을 뿐이다. 1951년 3월22일 가벼운 병에 걸린 한암 스님은 시자에게 물었다.
“오늘이 음력으로 2월14일이지?”라고 말한 후 가사와 장삼을 입고 청량원 선상(禪床)위에 단정히 앉아서 열반에 들었다.
물구나무 서서 입적한 등은봉 선사... 중국 당나라 때 마조 스님의 제자인 등은봉 스님은 제자들에게 그가 물었다.
"서서 죽는 사람들이 있느냐?"
"있습니다."
"그렇다면 거꾸로 서서 죽은 일도 있느냐?"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그러자 등은봉 스님은 물구나무서기를 한 채 숨을 거두었다. 바로 누이려고 밀었으나 넘어가지 않았다. 다시 화장을 하려고 시체를 밀었으나 넘어가지 않은 채 꼼작하지 않았다.
수행자가 되어 있는 속가의 누이가 그 말을 듣고 달려왔다.
"살아서도 법을 따르지 않더니 죽어서도 골탕을 먹이고 이게 무슨 짓이요?"
누이가 이렇게 나무라고 시체를 밀어내자 넘어가니, 비로소 화장을 할 수 있었다.
보화 스님의 열반... 당나라 때 보화 스님은 그대로가 법문이다. 보화 스님이 거리에 나가 사람들더러 장삼을 달라고 했다. 사람들은 매번 장삼을 주었으나 보화 스님은 그 때마다 필요없다고 했다. 그러자 임제 스님이 원주를 시켜서 관을 하나 사오게 하고는 보화 스님이 돌아오자 말했다.
"내 그대를 위하여 장삼을 장만해 두었네."
그러자 보화 스님은 곧 스스로 그것을 짊어지고 나가서 온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외쳤다.
"임제 스님께서 나에게 장삼을 만들어 주었다. 나는 동문으로 가서 세상을 떠나리라."
시내 사람들이 다투어 따라가 보니 보화 스님이 말했다.
"오늘은 가지 않겠다. 내일 남문으로 가서 세상을 떠나리라."
사흘을 이렇게 하니 사람들이 아무도 믿지 않게 되었다. 나흘째 되는 날 따라와서 보려는 사람이 없자 혼자 북문으로 나가 관 속으로 들어가서 길 가는 행인더러 뚜껑에 못을 치게 하였다. 삽시간에 이 소문이 퍼져서 시내 사람들이 쫓아가서 관을 열어보니 몸은 빠져 나가버렸고 공중에서는 요령소리만 은은히 울릴 뿐이었다.
그래서 마지막 남기실 말을 묻는 시자에게 "그 노장 그냥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갔다고 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