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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옹 스님 상좌 지선 스님(전 백양사 주지)은 20년 전 서옹 스님과 나눴던 대화를 소개했다. 당시 지선 스님은 서옹 스님의 일대기를 정리하기 위해 4일간 인터뷰를 했다고 밝혔다.
일반적으로 스님들의 출가전 이야기는 스님들 사이에도 ‘알려고 하지도 않고 말하지도 않는 것’이 불문율처럼 내려왔으나 서옹 스님은 상좌인 지선 스님에게 비교적 상세하게 출가전 이야기를 말씀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선 스님에 따르면 서옹 스님은 7세에 부친을 잃고 한학자이신 조부 이창진 슬하에서 유학을 공부하셨다. 당시 스님의 조부는 정삼품 벼슬인 중추원 의관으로 성품이 청렴하여 서옹 스님이 성인으로 알고 따랐다고 한다.
스님은 어려서 한문 수학을 마치고 고향인 충남 논산군 연산에서 보통학교를 다니다가 5학년때 집안이 서울로 옮기게 되자 서울 죽첨 공민보통학교(현, 천연동 금화초등)로 전학한 후 양정고등보통학교에 월반 입학했다.
스님은 어려서부터 총기가 있고 학문에 뜻을 두었기에 시골에서 올라갔지만 월반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 당시는 구한말 민족 혼란과 국운쇠퇴기로 희망이 없던 시절이었지만 스님은 조부로부터 박열 선생과 애국지사들의 이야기를 듣고 ‘옳은 뜻’ ‘높은 품도’를 가슴에 담았다.
양정고 2학년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이어서 조부마저 별세하자 스님은 세상무상과 인생허무를 느끼며 힘들었던 시기를 보냈다.
다행히 그 당시 양정고보에는 김교신(金敎臣) 선생과 을사조약시 ‘시일야방성대곡’ 사설을 쓴 장지연(張志淵) 선생 등 큰 스승들이 지도하고 있어 ‘애국정신’과 ‘인간교육’에 감명 받으며 모친과 조부의 공백을 메웠다.
그때 스님은 또한 가장 존경하는 위인 두 분을 만났다고 술회했다. 김교신 선생이 들려준 ‘간디’와 서적으로 만난 ‘석가모니’이다. 간디의 성자적인 모습과 비폭력적 무저항주의에 감명 받은 스님은 도서관에서 간디 자선전과 일어판 불교서적을 탐독하기 시작했다.
양반집 유학자 자제였던 스님의 처음 승려에 대한 인상은 ‘이상하다’는 것이었다.
“하필이면 세상에서 저런 생활을 하나. 머리는 빡빡 깍고 붉은색 옷은 이상하게 생겼고...”
그렇게 이상하게만 느껴지던 승려들에게 서서히 친근감을 지니게 되었고, 불교서적만 읽으면 답답하던 마음이 시원해지는 것을 느꼈다.
간디처럼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불교의 해탈과 열반사상을 의지해 살겠다는 생각으로 바뀌고, 그러다가 마침내 서울 각황사(현 조계사 건너편)에서 김대은 스님을 만나게 된다.
스님은 당대 최고의 경학을 갖춘 대은 스님의 법문을 들으며 선학원을 찾아 불교에 깊이 침잠하게 된다. 운동회나 휴일에는 하루종일 불교서적을 탐독하곤 했다.
스님은 양정고보를 졸업할 때가 되어 다시 진로문제로 고민하게 되는데, 집안에서 경성대학 예과를 권했으나 한사코 사양하고 중앙불교전문학교(현 동국대 전신)에 입학한다. 뛰어난 성적으로 경성대에 입학할 것으로 믿었던 가족과 친구들은 경악하고 말았다.
스님은 중앙불전 시절에도 나라를 뺏기고 짐승과 다를 바 없이 사는 민족을 보면서 현실과 이상이 상반되는 괴리감과 허무감에 고민했고, 출가를 결심했다. 민족현실 앞에 자신의 연약함과 무기력감을 참을 수 없었다고 한다.
결국 승려생활을 결심하고 대은 스님을 만나 입산하겠다는 뜻을 밝히자 뜻밖에 대은 스님은 “고등학교를 나온 사람이 왜 고생스런 중노릇 하려 하느냐”며 말렸다. 흔들림 없는 스님을 보고 대은 스님은 “그래도 정히 출가하고 싶으면 열심히 ‘관세음보살’기도를 하라” 하여 법화경 보문품을 지극독송했다.
그 뒤 대은 스님이 서울에 와 계시던 백양사 송만암 스님을 소개해 1932년 드디어 출가하게 되었던 것이다.
만암 스님과의 일생일대의 큰 만남 이후 스님은 72년간 눈푸른 납자가 되어 ‘본래면목 참마음’을 찾기에 전념했고, 스승 만암 스님이 그러했듯이 어느날 홀연히 앉은채 학이 날아가듯 떠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