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현대불교신문에 실렸던 서옹 스님의 법문을 모은 것이다.
【큰스님과의 대화】 서옹스님<백양사 고불총림 방장> [현대불교 2000-07-05]
“내가 변해야 세상도 변하는 법”
“불교와 과학의 조화 인류 구제”
“자비, 절대평등인 본연의 사랑”
*약력
·1912년 충남 논산 生
·32년 장성 백양사 만암대종사 문하에서 득도
·41년 일본 경도 임제대 졸업
·스리랑카 국립 푸리베니아대학 명예철학박사
·64년 동국대 선학원장
·65~74년 도봉산 무문관, 동화사, 백양사, 봉암사 조실 역임
·74~79년 조계종 5대 종정
·현재 장성 백양사에 주석
·저서에 <서옹대종사 법어집> <절대현재의 참사람> <임제록 연의> <선과 현대문명> 등
남북정상회담의 성공적인 개최로 극한대립과 갈등을 빚어왔던 남과 북이 화해와 협력의 시대를 열었다. 평생 수행자의 길을 걸어오신 서옹스님을 찾아 최근의 남북 화해, 인간유전자 지도 초안의 완성에 따른 과학기술의 발달, 참사람운동의 깊은 뜻을 들었다. 서옹스님은 남북이 화해의 시대를 열었지만 통일의 날까지는 여러 고비를 넘겨야 할 것이라고 지적하고 “내가 변해야 비로소 세상이 변하듯, 남과 북이 동반자로서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으로 상대를 바라보아야 한다”고 당부했다.
내년 7월 서울 역삼동에 참사람운동본부 개원을 앞두고 노구에도 불구하고 ‘참사람’을 역설하고 계신 스님은 “스스로 참사람임을 믿고, 참사람의 행동을 실천함으로써 참되고 행복한 세계를 건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남북정상회담이 성공적으로 열림에 따라 대립과 갈등이 지배해왔던 남과 북 사이에 화해와 협력의 기운이 움트고 있습니다. 6.25전쟁 발발 50주년이었던 날에는 불교와 개신교 천주교 등 우리나라 7대 종교 지도자들과 신도, 시민단체 회원들이 모여 기념식을 갖고 “지난 역사를 떨쳐버리고 평화의 세상을 향해서 힘차게 달려나가자”고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유일 분단국에서 세계평화의 메신저로 도약하자”며 북한어린이와 전쟁으로 고통을 겪는 어린이를 돕는 일에 나서기로 했습니다. 스님께서도 분단 55년만에 남북의 정상이 손을 맞잡는 감격스런 모습을 보셨을 텐데요.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아주 큰 일을 해냈습니다. 우리 민족에게는 물론이고 세계 역사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봅니다. 6.25는 같은 민족끼리의 전쟁이었고, 세계의 스무 나라 이상이 참전한 큰 전쟁이었습니다. 6.25는 투쟁철학에 의해 발발한 1차대전과 2차대전 등 세계적 규모의 전쟁의 연장선에 있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남북의 화해는 세계의 화해입니다.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만나고, 공동선언을 발표함으로써 이제 한반도는 완전히 바뀌어가고 있습니다. 평화의 역사가 만들어질 것이고, 한반도의 기운이 세계의 역사를 바꾸는 시발점이 될 것입니다.
묘향산에 갈 날도 멀지 않은 것 같습니다. 서산스님이 평하기를, 지리산은 웅장하되 오묘함이 없다 했고, 금강산은 오묘하되 웅장함이 없으나, 묘향산은 웅장하고 오묘하다고 했습니다. 묘향산엔 보현사가 있지요. 내 나이 90이어서 장담은 못하지만, 젊은 사람들은 이제 가게 될 것입니다.
─통일에 이르기까지는 많은 어려움도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독일은 정치적인 국토의 통합을 이뤄낸 지 10년이 됐지만, 사람들의 마음의 통합은 아직 이루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통일을 준비하는 과정이 더욱 중요하리라 봅니다.
▲사랑에 겨워 결혼한 부부도 다툼이 있고, 혈육으로 이어진 부모, 형제 사이에서도 갈등이 있습니다. 이렇듯 먼저 다툼과 갈등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남북의 사람들은 55년 동안 서로 떨어져서 살았습니다. 그것도 서로 적이라 이름지어 살았는데, 하루아침에 뜻이 통하지는 않겠지요. 같은 민족으로, 동반자로서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으로 상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은 내가 변함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변하게 됩니다. 이 뜻을 지니고 통일을 생각해야 합니다. 달리 말하면 자비심입니다.
자비는 너와 나, 이것과 저것, 사랑과 미움을 모두 초월한 절대적인 평등애입니다. 모든 것을 생각하고 아끼기를 마치 어버이가 그 외아들을 생각하는 듯이 하는 경지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자비는 사랑의 개념과는 차원이 전혀 다릅니다. 이론이나 친소 관계를 초월하고 모든 이웃과 국가간의 경계를 초월하여 절대평등인 본연의 사랑을 의미합니다. 무연(無緣)의 자비라는 말이 바로 불교에서 지향하는 자비세계입니다.
우리는 내 것이라는 고집, 나만이 제일이라는 집착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인간은 서로에게 자비를 베풀고 존중하고 서로 돕지 않고서는 살 수 없습니다. 이웃에 자비를 베풀기 위해서는 자기 본위의 생각을 용감하게 버려야 합니다. 혹, 나는 자비심을 베푸는데, 상대는 그렇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면 자비심이 아니지요. 그래서 쉬운 일이 아니지요. 그러나 남북이 서로 대립하고 갈등하는 것보다 통일이 백번 낫겠지요. 또 통일에 이르는 과정이 자비의 실천이라고 한다면, 불자들에게 더없는 수행의 노정이겠지요. 그리고 수행하는 마음으로 통일을 만들지 않으면 이루어낼 수도 없다는 점을 깊이 알아야 합니다.
─최근 인간유전자 정보를 해독해 유전자지도 초안을 완성했다고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과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가 발표했습니다. 암 등 난치병 치료와 예방에 획기적으로 기여하리라는 평가와 함께 ‘주문형 인간’의 등장으로 인간성의 파괴를 가져올 것이라는 우려가 동시에 나오고 있습니다. 과학의 발달이 인간생활에 기여하는 것보다 만일에 발생할지도 모르는 끔찍한 부작용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데요.
▲우선 과학만능주의를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과학의 발달로 우리는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물질의 풍요와 혜택을 누리고 있습니다. 과학의 공덕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세탁기와 텔레비전과 휴대전화기가 우리의 삶을 더욱 행복하게 했는지는 의문이 듭니다. 과학기술로 발명한 상품들이 인간을 더욱 여유롭게 하고 조화롭게 했나요? 그런 것이 없던 때보다 더 바쁘게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서로를 위해주고 있나요. 나무와 풀과 물과 공기와 사람들이 서로 돕고 있나요. 사람들이 일방적으로 빼앗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인류는 죽느냐, 사느냐 하는 위기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전혀 과장이 아닙니다. 충청남도의 어느 농촌 마을에서는 지하수를 먹고 한 동네에서 여러 명이 암에 걸려 죽었다고 합니다. 날씨가 무더워지자 매일 오존주의보가 발령됩니다. 서울 뿐이 아니예요. 오전을 막아주는 공기층이 파괴돼 피부암에 걸릴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그렇다고 과학을 버리고 100년 전, 200년 전의 세상으로 돌아가 살 수도 없고, 그렇게 하는 것이 해답도 아닙니다. 과학문명을 유지하고 이끌어가는 원리를 문제삼고, 바로 잡아야 하는 것이죠. 과학문명 자체는 선(善)한 것도 아니고, 악(惡)한 것도 아닙니다. 과학문명의 원리가 사람을 행복하게 할 수도 있고, 파멸로 이끌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문명은 서양의 데카르트, 헤겔, 마르크스, 니체를 관통하는 이원론의 철학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너와 나, 인간과 자연을 구분짓고, 서로가 대립 속에서 발전한다는 생각으로 꽉 차 있는 것이지요. 헤겔은 중세의 신본주의를 넘어서 이성을 주장했지만, 변증법적 역사관, 즉 ‘대립을 투쟁으로 해결하여 나가는 것이 역사’라며 투쟁의 역사를 주장했습니다. 헤겔 철학을 이어받은 마르크스 역시 투쟁하는 주체를 국가에서 계급으로 옮겼을 뿐입니다. 니체는 서양의 전통적인 이성철학에 반발하여 ‘인간을 움직이는 것은 이성이 아니라 인간의 권력의지’라고 말했습니다. 모두 전쟁과 투쟁을 절대적으로 긍정한 철학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오늘날을 지배하는 철학은 투쟁철학인 것입니다. 이런 바탕 위의 과학기술은 자칫 파괴로 나아갑니다.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극한대립이 상존하고 있는 세상에서 착한 의도를 갖는 연구일지라도 쓰임새는 정반대의 경우를 가져오기도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스님께서 말씀하신 투쟁의 철학은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습니다. 투쟁철학의 본거지인 서구에서 선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도 당연한 귀결처럼 생각됩니다. 과학의 발달이 곧 행복하다는 것이 아니라는 자각일 텐데요. 그래도 과학은 도달점도 없이 멈추지 않고 내달리고 있습니다. 선한 과학이 되기 위한 방법은 없을까요. 앞에서 스님께서 과학을 이끄는 원리를 바로 잡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요.
▲과학문명이 인류에게 공헌한 바는 실로 지대합니다. 과학의 덕택으로 달을 탐사하였으며, 우주를 탐구하여 인간의 시야를 확대시켰습니다. 6억년 전의 세균화석을 다시 생명체로 재현하는 놀라운 기술의 진보를 이룩했습니다. 이처럼 과학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했으며, 모순된 사고체계를 규명했습니다. 오늘날의 종교는 과학문명을 뒷받침해서 올바른 역사를 창조할 수 있는 윤리바탕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훌륭한 가르침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서양의 다른 종교에 비해 현대의 과학과 조화를 이루며 인류를 구제하는 역할을 소홀히 하고 있습니다.
불법의 인간관과 우주관에서는 전체가 한 생명체로서 평등하며 유일체라고 봅니다. 이 근본 생명체는 자주적이고 자율적이어서 근원적인 주체성을 띤다 하겠습니다. 이러한 훌륭한 생명관에서 저절로 자비심이 나와 인간과 인간이 서로 사랑하고 협력하며, 대자연과도 조화롭게 이 세상을 형성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인류는 개인·집단·국가 등 저마다의 이기주의로 과학문명을 발전시키고 역사를 만들어온 오류 속에 살고 있습니다. 또한 인간을 중심으로 살아왔습니다.
과학문명의 병폐는 정치의 힘, 과학의 힘으로는 제거되지 않습니다. 불법의 힘으로 교화하고 각성해서 참나·참사람의 바탕으로 과학문명을 다시 창조함으로써 평화스럽고 행복한 세계를 건설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서구사회에 유행하듯 확산되고 있는 선(禪)은 단순한 동양문화의 유출이 아닙니다. 동양의 정신문화를 희구할 수밖에 없는 서양문명의 근본적인 결점을 단적으로 드러낸 예입니다. 그것은 20세기 초에 서양문물과 서양사상을 무분별하게 수용하였던 동양의 저개발 경제후진국의 예와는 다른 차원의 문화수용 현상입니다. 과학문명의 원리가 인간진리를 외면한 채 너무 외형적으로만 비대해짐으로써 상대적으로는 인간의 내면세계가 공동(空洞) 현상을 초래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서구 사람들에게 동양의 선은 새로운 지남(指南)이 되는 것이지요.
─스님께서는 선의 궁극은 참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참사람운동을 펼치고 계신데, 스님께서 쓰신 ‘참사람 결사문’에서 현대 과학문명의 폐해를 지적하시고는 “인간의 참모습은 본래로 참사람이니, 모든 인간이 자비로 행위할 때 이 지구는 종횡무진하게 자비의 망(網)으로 포용된 세계가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실천의 문제이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런데 불교에 대해 ‘1%만이 불교이고, 사욕이 99%’라는 가혹한 비판도 있습니다.
▲내가 두어 달 전부터 백양사 천진암에서 벽암록을 강의하고 있어요. 닷새에 한차례씩 하는데 100칙 가운데 60칙을 하고 있어요. 40여명이 동참하고 있습니다. 비관적으로 볼 필요는 없어요. 조선조 500년 동안 불교는 온갖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이제 굴레를 벗고 팔다리를 쭉 펴는 단계에 있습니다. 한국의 선은 대단히 역동적입니다. 한국의 선은 새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가능성이 있습니다.
우리는 부처님의 참된 가르침을 받들어 두껍게 덮인 무명(無明)과 욕망의 장애를 벗어버리고 분별(分別)과 아집(我執)을 타파하여 ‘참나(眞人)’를 되찾아야 합니다. 이것이 인간 본연의 길입니다. ‘참나’ 즉 참사람은 나와 남의 대립, 시간과 공간의 일체를 초월합니다. 그리하여 모든 중생이 한몸이요, 나와 우주가 둘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절대 평등하고 대자대비하며 또한 자유자재합니다. 참사람은 철저히 자기를 부정하며 동시에 부단하게 자기를 창조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참사람임을 믿고, 참사람의 행동을 실천함으로써 참되고 행복한 세계를 건설해야 합니다. 참사람에 이르는 길에 무슨 오묘한 진리가 담겨 있다고 생각해서 지레 멈칫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불자들이라면 이미 익히 들어온 가르침입니다. 확철대오해서 참사람에게도 걸리지 않아 호호탕탕(浩浩蕩蕩) 자유자재하게 되지는 못하더라도 참사람의 서원을 가지고 살아가면 됩니다.
서옹스님께서는 ‘현대불교’ 독자들에게 참사람주의로 살라는 당부의 마음을 담아, 최근 살림살이의 한 자락을 펼쳐 보이셨다.
隱顯自在絶 跡
無位眞人不可尋
烏飛兎走豈有窮
洛花又見隋流水
숨고 나타남이 자유자재해서 자취 끊었으니
무위진인의 자취를 가히 찾을 수 없네
까마귀 날고 토끼가 달리니 어찌 다함이 있으리요
물 따라 흐르는 떨어진 꽃을 보도다
【무차법회】백양사방장 서옹스님 법어 [현대불교 2000-08-30]
“참사람정신으로 평화의 역사 창조”
(주장자( 杖子)를 들어 법상(法床)을 세 번 치고 설하기를,)
오늘날 현대문명은 인간주의(人間主義)로 세계 역사를 창조했습니다. 인간주의는 한없는 욕망으로 인한 전쟁과 환경파괴로 말미암아 모든 인류를 멸망으로 이끌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양의 전통적 정신문화는 인간을 초월하여 인간의 모순을 근원적으로 해결한 참사람이 살아있습니다. 오직 이 참사람만이 중생을 구제할 수 있고 세계평화의 역사를 창조할 수 있습니다. 현대의 과학문명은 표면적으로는 이성의 문명이라고 하나, 그 이면에는 자연을 지배하는 욕망적 인간주의로 전락하여 여러 가지 병폐를 낳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불교의 조사선(祖師禪)은 자아를 초월한 그 본성 자리인 인간의 진실상을 근원적으로 완전히 드러냈으니, 이것을 참사람이라고 합니다.
참사람은 본래 자유자재하여 인간을 과학문명의 노예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습니다. 참사람은 대자연과도 불이·일체(不二一體)의 생명이니 대자연을 포용·애호(包容愛護)하는 것입니다.
참사람은 서로 사랑하고 협조하면서 자비정신을 구현함으로써 세계인류 평화의 역사를 창조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조사선의 참사람 법문을 아니할 수 없겠습니다.
위산( 山)스님이 도오(道吾)스님에게 묻되 “어느 곳에서 왔는가?”하니, 도오스님이 이르되 “간병(看病)하고 왔습니다” 했어요. 위산스님이 다시 이르되 “몇 사람이나 병이 들었던가?” 하니, 도오스님이 답하길 “병든 자도 있고 병들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위산스님이 이르되 “병들지 아니한 자는 이 도오종지(道吾宗智) 두타(頭陀)가 아닌가?”하니, 도오스님이 이르되 “병과 병아님이 다 타사(他事)에 간섭하지 아니 하나니, 속히 이르고 속히 이르시오.”라고 하니 위산스님이 이르되 “이를래야 교섭할 수 없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이를 천동각선사는 이렇게 노래 했습니다.(天童覺禪師 頌)
묘한 약은 어찌 일찍이 입을 통과하는고? 신(神)같은 의사는 능히 손을 잡지 아니 하느니라. 만약 있다고 하면 저것은 본래로 없음이 아니고, 지극히 빈 것이라 하면 저것은 본래로 있는 것이 아니로다. 멸하지 아니하고 남이오. 망하지 아니하고 수(壽)하느니라. 온전히 위음왕 부처님 이전을 초월하고 홀로 공겁의 이후를 활보(活步)하느니라. 평정(平正)을 이룸이여, 하늘이 덮고 땅이 받침이오. 움직여 굴림이여, 까마귀(해) 날고 토끼(달) 달리도다.
이것을 다시 나는 이렇게 부연하고자 합니다.
衆流截斷이라 柳綠花紅하고 明月藏鷺하며 獨步靑天하도다.
別別 淸風凜凜拂乾坤하고 四海茫茫却倒流하도다.
喝 -
(모든 흐름이 끊김이라. 버드나무는 푸르고 꽃은 붉도다. 밝은 달 속에 백로를 감추고 홀로 푸른 하늘을 활보(活步)하도다. 특별히 말하노니 청풍은 늠늠하여 건곤을 떨치고. 사방 큰 바다는 아득하여 도리어 거꾸로 흐르도다. 아 - 악 -)
#법거량
조계종 기초선원장 영진스님의 사회로 법회에 참석했던 사부대중과 서옹 스님간의 선문답이 이어졌다.
한 비구 수좌가 연단에 올라 서옹스님이 위산 스님의 법어를 인용해 법문한 점을 지적하며 “위산 선사가 법어를 하지 않았다면 스님께서는 어떻게 사자의 기상을 보이실 것입니까”라며 가르침을 청하자, 서옹스님은 주장자를 세 번 내리친 뒤 “아 악”하며 일 갈(喝)을 한뒤 “그 따위 소리 하지마라”고 호통쳤다. 이에 비구 스님이 오직 깨친 안목으로라야만 무차법회가 아니겠습니까”하니, 서옹스님은 “그 망상 피우지 말라”하자, 비구 스님은 “알겠습니다”하고 물러났다.
이어 한 비구니 스님이 등단해 “거꾸로 흐르는 바닷물을 다 삼켰으면 스님은 어떻게 하겠습니까”라고 청하자, 큰 스님은 “거꾸로 흐르는 것을 보느냐”고 반문했고, 비구니 스님이 다시 “스님은 대도적이십니다. 도적중에 도적이시니 이 작은 도적도 알아봐 달라”고 하자 서옹스님은 “니가 목소리는 크지만 아직 멀었다. 그것으로는 안된다”고 답해 장내에는 폭소가 터져나왔다.
마지막으로 한 거사가 나와 “중생을 위해 자비의 한 말씀을 내려달라”고 하자, 서옹스님은 “여덟 문안의 맷돌이 허공을 달린다”고 했으며, 다시 “제 큰 아들이 불쌍합니다”하니, 스님은 “불쌍한 그대로 다 제도되었느니라”했다. 거사가 재차 “보리와 번뇌가 서로 방해하니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하니, 스님은 “망상 피우지 말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