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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일 3차 기와 지원단과 함께 오전 9시 도라산 출입국 관리소를 통과하여 남측 구간을 넘어서니 ‘여기 부터는 개성입니다.’라는 이정표가 나타났다.
개성 시내까지는 18키로의 거리이니 바로 지척이다. 무표정한 북측 출입국 관리소 병사들의 무뚝뚝함이 긴장을 자아내고 시간을 끌었지만 처음 찾는 북한 땅의 산하는 화창한 날씨로 우리 일행을 맞이해 주었다. 하지만 야트막한 산들은 주민들의 땔감 채취로 변변한 나무하나 없는 민둥산의 모습이다.
우리 일행이 지나는 농촌과 도심에는 많은 사람들이 자전거를 타거나 걸어다녔고, 소 달구지나 조그만 손수레를 끌며 짐을 나르는 모습도 보였다. 우리 일행이 흔드는 손에 답례하여 손을 흔들어 주기도 하고, 호기심 많은 아이들은 숨어서 훔쳐보기도 한다. 벌써 3차례 기와 지원 차량을 보니 이제는 많은 분들이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듯했다. 비록 남루하지만 우리의 옛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정겨움도 묻어난다.
하지만 지어진지 오래되어 이미 낡아버린 커다란 건물마다, 그리고 지나는 길목마다 커다랗게 쓰여져 있는 붉은 색의 구호들은 우리가 다른 세상에 와 있음을 깨닫게 한다.
고증에 의해 복원되고 있는 불사현장
개성 시내를 벗어나 오관산 기슭으로 접어들자 야트막한 구릉들이 이어진 산길이 나왔다. 비포장 길이긴 하지만 길목마다 교통 안내원들이 일부러 나와서 안내하고 있었고, 길도 정성들여 잘 정비되어 있었다. 영통사가 내려다 보이는 마지막 언덕에서 멀리 바라보는 영통사는 오관산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어 웅장한 사찰의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영통사를 감싸고 있는 오관산은 다섯 개의 봉오리가 보배관을 쓰고 있는 모습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오전 11시 30분 영통사에 도착한 일행은 대각국사 비문 앞에서 물품 인도 인수서에 서명하는 간단한 전달식을 가졌다. 기와를 실은 트럭들은 당일 4시30분까지 북측 출입국 관리소에 도착해야 하기 때문에 바로 하역작업에 들어갔다. 사찰의 회랑 곳곳에는 아직 올리지 못한 기와와 양생중인 기와들이 쌓여 있다. 멀리서 볼 때와는 달리 가까이서 본 공사 현장은 매우 거칠었고, 아직도 많은 공정을 남기고 있는 듯 했다.
우리를 안내한 영통사 복원공사 건설 총감독 김영균(金永均)씨는 역사적인 영통사 복원이 철저한 고증에 의해 복원되고 있음을 강조했다. 영통사 대각국사비와 당간지주, 5층석탑과 동삼층탑, 서삼층탑, 당간지주만이 남아있던 곳을 지난 98년 일본의 대정대학 고고학팀과 함께 발국작업을 벌여 5-6미터 지하에 묻혀있던 기초를 발견함으로써 본격적인 복원에 나서게 되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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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통사의 총 부지는 6만 평방미터이고, 복원되는 28채의 건평은 총 3400평방미터이다. 복원된 영통사 가람배치를 보게되면 좌측을 중심 축선으로 하여 당간지주를 왼쪽으로 두고 남문이 있고, 이 문을 지나면 중문이 나온다. 중문 양옆으로는 종을 걸 종루와 경루가 세워져 있고, 중문 안에 부처님을 모실 보광원이 자리하고 있다. 2층 양식의 단일 건물인 보광원은 대웅전에 해당하는 건물로 영통사에서 가장 큰 전각이며 380평방미터에 이른다.
보광원 앞에는 오층석탑이 서 있고, 양옆으로 삼층석탑이 함께 세워져 있다. 그런데 석탑들은 아직 제자리를 못잡은 듯 보광원 앞에 너무 바짝 붙어 있다. 영통사 5층석탑은 북한의 국보문화재 37호로 밑변이 약 6.5미터이고, 전체 높이는 약 6.5미터이다. 영통사 3개의 석탑은 기단과 상륜이 모두 유실되었는데 이를 복원하여 오층석탑을 중심으로 삼각형의 형상이 되도록 재배치할 계획이라고 한다.
보광원 뒤로는 중각원이 들어서 있다. 중각원은 경을 강하던 강당으로 고려사에도 50여차례 강의가 진행되었다는 기록이 보이고 있다. 중각원 뒤에는 일명 행궁이라고 부르는 숭복원이 자리하고 있다. 숭복원은 고려 왕실에서 영통사를 참배하러 왔을 때 왕들이 묵었던 행궁으로써 사찰과는 별도의 회랑을 통해 구별하고 있다. 이것은 왕을 경호하기 위한 조치의 하나였다고 한다.
이것은 영통사가 고려 왕실에서 다른 어떤 사찰보다 많은 참배를 다녀간 사찰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영통사가 고려 왕실과 인연을 맺은 것은 고려 태조 왕건때 부터이다. 태조 왕건은 자신의 집안을 부흥시킨 왕씨의 발상지인 이곳에 조상들이 지었던 조그만 암자를 숭복원이란 이름의 국가 사찰로 만들었다가 다시 확장하며 영통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런 연유로 영통사는 고려왕실의 원찰이 되었으며, 왕자였던 대각국사의 출가도 영통사에서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따로 영령원이란 전각 하나를 두어 영통사와 인연이 깊은 왕들의 진영을 모시고 재를 지내게 된 것이다.
영령원은 바로 우측을 축으로 한 전각의 하나이다. 우측에는 동중문 뒤로 보조원과 영령원이 차례로 들어서 있고, 동중문 앞 왼쪽으로 대각국사비가 세워져 있다. 대각국사비는 건물들과 수직을 이루고 있는데 복원당시 세워져 있던 본래의 위치라고 한다. 영령원 앞의 보조원은 관세음보살을 모신 곳으로 관음전의 별칭이다.
당간지주 왼쪽으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가면 대각국사의 부도를 모신 경선원이 자리잡고 있다. 대각국사의 부도는 천년의 모습을 간직한 옛모습의 축대와 계단위에 모셔져 있어 그 역사를 그대로 보여주는 듯하다. 남쪽에도 선암사의 대각암에 대각국사의 부도가 모셔져 있다. 어느 것이 진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대각국사를 기리는 역사적 사실만은 그대로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
더구나 영통사에는 대각국사의 묘소가 남아 있다고 한다. 1101년 열반에 든 대각국사 유해를 20년이 지난 1121년 다비하여 부도를 모시고 1125년에는 대각국사비를 세웠다는 것이다. 동중문 우측으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가면 묘터가 나오는데, 그곳에는 4개의 커다랗고 편편한 바위들이 누워있고, 그 옆에 돌그릇이 놓여있다. 김영균 총감독은 바위들은 제상을 차리던 돌이고, 돌그릇은 제주들이 손을 씻던 곳인 듯 하다고 말했다.
천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영통사는 그 자취들만으로 세월을 거슬러 오르게 한다. 영통사 입구에 있는 영통교 밑에는 큰 바위에 오관산 영통동문이라는 커다란 글씨가 새겨져 있다. 이곳이 오관산 영통사 입구라는 것을 말없이 증명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곳의 절경은 조선 후기의 화가 강세황이 그린 진경산수화인 <영통동구도(靈通洞口圖)>를 통해서도 그 아름다움을 짐작할 수 있다.
한반도가 분단된지 반세기가 지난 지금 남북이 한 마음으로 민족의 문화유산인 영통사를 복원하는 일에 나섬으로써, 통일불사의 첫발을 내딛었다. 천태종의 통일지원 불사는 첫걸음은 미미할 지라도 남북평화통일을 여는 물줄기를 트는데 조금이나마 기여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질만하다. 남북이 하나되어 손을 맞잡는 날 우리 역사는 천태종이 개성 영통사 복원을 위해 기와 46만장을 지원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기록하게 될 것이다.
도움말=한기선 편집부장 <월간 금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