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한담】태허스님<본원종 종정> [현대불교 166호 (1998-03-18)]
-"공부따로 생활따로 분리해 보지마세요"-
-"모든 현상의 원인 '나'로부터 비롯"-
화두든 염불이든 일념으로
자나깨나 그것을 놓지 않으면
생사일여의 길로 들어갑니다
어느날 임제선사(?~867)가 제자들에게 "붉은 몸뚱아리에 지위없는 참사람이 있어 너희들의 눈, 코, 귀, 입으로 늘 드나드는바 아직도 이를 보지 못한 자는 나와 보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한스님이 나와서 "지위없는 참사람이란 무엇입니까?"라고 되묻자 선사는 법상에서 내려와 제자의 멱살을 쥐고서는 "지위없는 참사람이라니, 그 무슨 똥막대기냐?"고 힐난하고는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고 합니다.
똥막대기라니…? 제자들은 "스승이 왜 똥막대기라고 했을까?"라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이것이 곧 화두가 된 거지요. 화두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하나의 수단이요, 방편입니다. 하늘에서 눈이 계속해서 내릴때 마당을 아무리 쓸어도 눈은 쌓이게 됩니다. 그러나 천막을 치고 쓸면 깨끗이 마당을 쓸 수 있습니다. 이와같이 화두를 드는 것은 주변에 천막을 치고 수행하는 것과 같습니다.
화두가 성성하게 살아있으면 숙세의 업연과 현세의 그릇된 집착으로 인해 일어나는 망상잡념이 차단됩니다. 차단이 계속되면 업장도 덩달아 소멸됩니다. 업이 소멸된 후에는 마음가운데에 화두인 똥막대기 하나만 남게되는데 그 똥막대기마저 놓아버리면 비로소 지위없는 참사람이 현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원리를 모르는 채 무작정 외우듯이 화두를 들어봐야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지를 못하지요. 또 화두는 제대로 된 선지식으로부터 받아야 합니다. 적어도 삼세의 인연도리는 알아야 해요. 예를 들면 전생에 뱃사공이었던 사람에게는 물과 관련된 화두를 주면 좋을 것이고 대장장이였던 자에게는 불이나 쇠와 관련된 화두를 주면 공부가 수월할 겁니다. 받는 사람의 근기에 맞게 화두를 주어야 하는데 요즘에는 화두를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모두 캄캄하니 화두가 살아있을 리가 있나요?
비롯이 없는 거기에는
끝도 또한 없음이다
가도 가도 한이 없는
그 생명에서
무엇이 새로 있으랴
남도 죽음도
그대로 나로다
요즈음 참선한다고 하는 사람들 대부분 망상에 빠져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검은 산 귀신굴에 들어 앉아서 허송세월만 보내는 격이니 업장만 잔뜩 키우는 꼴입니다. 말법시대라 중생들의 근기가 그런지 요즘 정토신앙이 다시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아미타불 정근은 정토삼부경인 무량수경 관무량수경 아미타경을 근본으로 아미타불의 본원력을 추구하는 공부입니다. 가장 쉬운 공부라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다른데 가 있더라도 오직 입으로 아미타불만 염송하면 되니 일자무식인 자도 쉽게 들어올수 있는 큰 문입니다.
행주좌와 어묵동정(行住坐臥 語默動靜)에 끊임없이 염송하다 보면 의식하지 않아도 저절로 되어지는 때가 옵니다. 그때 의식적인 부분과 잠재의식적인 부분의 분리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경전에 보면 아미타불의 명호를 간절하게 부르면 죽어서 서방정토 극락세계에 왕생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극락세계라 함은 따로 존재하는 불국정토를 말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현재당처에서 수행을 통해 도달한 깨달음의 경지를 일컫는 것이기도 하지요. 깨우치면 바로 그곳이 극락이 되지 않겠습니까?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여여하고 구족한 것을 미혹한 눈으로 보니 괴로움으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염불정근은 근본자성을 덮고 있는 망념의 먹구름을 조금씩 제거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또한 숙세의 업장들을 조금씩 소멸시켜줍니다. 오래하다 보면 정신이 맑아지고 신통력이 생겨서 앞일이 내다보이기도 하니 중생들이 생활속의 수행으로 하면 좋습니다.
견성했다는 것은 자기의 성품을 본 것으로써 본질적 존재에 대한 믿음과 확신이 생기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활연대오한 것과는 다릅니다. 견성이 성불은 아닙니다. 본 것과 완전히 하나가 되는 것은 엄연한 차이가 있습니다.
불교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우리나라 승가가 새롭게 태어나야 합니다. 겉만 멀쩡하지 껍데기 뿐인 스님들이 많습니다.
부처님께서 왜 부귀영화를 다 버리고 출가를 하셨습니까? 열반 잘 하기 위해서 출가했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태어나서는 병들고 늙고 죽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는 그 생로병사의 고리에서 벗어날 수는 없을까 고뇌하다가 출가의 길을 택한 겁니다.
부처님은 초발심을 끝까지 견지하며 정진해 오도했고 또 그 깨달음을 중생들에게 고스란히 회향했습니다. 그런데 인생의 큰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굳은 초발심으로 출가한 스님네들이 세월 지나면 초발심이 어디로 갔는지 흐트러지고 분별망상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법답게 살지 못하면서도 자기를 속이면서 살고 있는 것을 알지 못해요.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출가자들은 부처님 밥이 무서운 줄 알아야 해요.
제대로 수행하는 스님들이 드문 세상입니다. 부처가 되기위해 머리를 깎았으면 끝까지 밀고 나가야지 중도에 포기하고 타협해버리면 오히려 재가자로 있음만 못합니다.
나는 12살되던 해 당시 큰 본찰이었던 문경 김용사로 입산을 했습니다. 어려서 부모님들이 돌아가시는 바람에 절에 의탁하게 된 것이지요. 세속의 잣대로 보면 불행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그게 다 나에게 주어진 인연도리였습니다.
절에 와서 초등학교도 다니고 불법공부도 두루 섭렵하게 됐으니 절은 나에게 있어 큰 복밭인 셈이지요. 대강백이셨던 정경원스님을 은사로 모셨는데 계를 받기전에 입적하시는 바람에 육주(六洲)스님을 스승으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육주스님은 김용사 주지를 역임하는 등 학식과 덕망이 높은 스님이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출가를 하다보니 잔심부름도 많이 해야했지만 온통 귀여움을 독차지했습니다. 은사스님을 시봉하는데 있어 밥은 공양주가 했지만 나물장만은 내가 직접 산이나 밭에서 뜯어다가 했습니다. 대신 어른스님들은 마치 부모가 자식을 기르듯이 제자를 거두었습니다. 옷을 장만해주고 학교도 보내주었으며 경전을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혜화전문학교도 은사스님의 도움으로 다녔습니다. 28세때 김용사 상주포교당 주지로 머무를 때 일입니다. 먼 훗날 조계종 승려로서 정화불사의 최선봉에 섰던 청담스님이 항일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상주경찰서에 구속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당시 청담스님은 순호스님으로 불리웠는데 하루는 법춘스님이란 분이 찾아와서는 "지금 순호스님이 전염병에 걸려서 격리되어 있는데 그대로 두면 목숨을 잃게 될 것 같다"면서 모셔오자고 했습니다. 청담스님은 이질에 걸려 있었습니다. 당시는 약이 변변치 않던 시절인데다 일본인들은 이질에 특히 약해서 가장 무서워하는 병중의 하나였습니다.
나는 경찰서와 병원을 찾아가서 책임지고 간호할테니 맡겨달라고 했습니다.우리나라 사람의 경우 야채를 많이 먹고 요양을 잘하면 이질쯤은 큰 병이 되지 못했습니다. 6개월쯤 같이 지내는동안 병도 완쾌되고 사건도 잘 마무리되었습니다.
청담스님을 만나려고 전국의 내로라 하는 수좌들이 상주포교당으로 많이도 찾아왔지요. 그중에는 지금은 입적하신 성철스님, 자운스님, 홍경스님도 끼여 있었습니다. 도반들 끼리의 만남은 옆에서 지켜 보기에도 참으로 흐뭇했습니다. 그렇게 지내다가 해방되던 해 문경 봉암사 주지를 거쳐 김용사 법무국장으로 가게 되었는데 당시 봉암사는 김용사 관할하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구산선문의 하나인 봉암사에 선방이 없어서야 되느냐는 여론이 비등했어요.
정화를 추진하는 스님들과 함께 새로이 선원을 건립하고 제방의 납자들을 받아 들였습니다. 청담스님 향곡스님 성철스님을 비롯 전국의 수좌들이 모여서 장삼과 의복을 제정하는 등 청정가풍을 정립하기 위한 정화불사의 기치를 올리게 되었지요.
47년경에는 불교 대구중앙포교사로 부임하여 경상북도 전역을 포교하러 돌아다녔습니다. 그땐 오직 불교를 널리 알려야겠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조계종 종정까지 지내셨던 청담스님은 후일 70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의 요청에 의해 다시 조계종 총무원장으로 가게되었고 나는 태고종 총무원장 직무대행으로 부임하게 되었는데 원주에 있는 모 군부대에서 사찰을 건립, 낙성식에 초대를 했습니다. 각자 종단대표로 참석해서 만났는데 그날 저녁 청담스님은 숙소로 돌아가다가 유명을 달리하고 맙니다. 그때 그 안타까웠던 마음은 이루 다 표현할 수 없었지요.
김용사 중암에 있는 선방에서 한 5년간 머무른 적이 있습니다. 거기서 나는 염불삼매로 일관했습니다. 모든 일거수 일투족을 아미타불에 의거해서 지냈습니다. 지금까지 여든 두 해동안 살아왔지만 그렇게 심한 환란과 우여곡절을 겪지 않았던 것도 돌이켜보면 아미타불 염불정근 덕택이 아닌가 합니다. 염불정근이 몸과 마음의 전체로 순숙해지면 화두와 마찬가지로 자기의 내면을 볼 수 있습니다. 아미타불 신앙의 소의경전인 <아미타경>은 다른 대부분의 경전들이 제자들의 간청으로 인한 부처님의 설법인데 반해 부처님 자신이 자청해 설하고 있는 이른바 '무문자설경(無問自說經)'의 하나입니다.
부처님은 수행의 시대를 3등분하여 정법(正法)시대, 상법(像法)시대, 말법(末法)시대로 구분했습니다. 즉 경전에 의하면 불멸이후 첫 5백년간은 정법시대이고 이후 1천년은 상법시대며 다음 1만년은 말법시대라 했습니다.
또한 부처님 열반후 첫 5백년간은 해탈견고(解脫堅固)하고 다음 5백년간은 선정견고(禪定堅固)하며 그다음 5백년간은 다문견고(多聞堅固)하고 또 다음 5백년간은 조사견고(造寺堅固)하며 마지막 5백년간은 투쟁견고(鬪爭堅固)하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부처님께서 입적하신지 2천5백년도 훨씬 지난 시점이므로 가히 말법시대라 하겠습니다. 주변을 둘러봐도 언교(言敎)는 난무하되 행증(行證)은 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정법시대는 지계견고하고 상법시대는 선정견고하며 말법시대는 염불견고라 하였으니 말법시대에는 아미타의 교법인 염불수행이 수승하여 가통입로(可通入路)라 하겠습니다.
아미타불은 무량수불, 무량광불 혹은 감로불이라고도 하는데 아득한 과거세에 법장비구의 몸으로 있을 때 시방세계 2백10억의 국토중 가장 훌륭한 곳을 골라 이상세계를 구현할 것을 서원하고 48가지 대원력을 세운 분입니다. 아미타불은 근기가 낮은 중생들도 쉽게 성불할수 있는 방법을 제시했는데 이것이 바로 '나무아미타불' 명호를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조건 나무아미타불만 부른다고 성불이 되는 것이 아니지요.
화두드는 참선이나 염불이나 수행자 자신이 궁극적으로 일념이 되어야 합니다. 자나깨나 그것 한가지만 들고 놓치지 말아야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생활해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오매일여가 되고 나중에는 생사일여로 나아갑니다. 화두는 사무치는 분심과 대의심이 생명인데 오늘날에는 좀처럼 되질 않습니다. 생활하다보면 공부하기가 쉽지 않다는 말들을 많이 하는데 응용을 못해서 그렇습니다. 공부 따로 생활 따로 분리시켜 생각하지 않는게 우선 필요합니다. 모든 생활이 곧 공부와 직결된다는 믿음을 가지고 적용시키려 노력하세요.
모든 현상의 원인이 자신으로부터 비롯됐다고 생각하면서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화두를 타파하기 위하여 용맹심으로 치열하게 정진하세요. 지성으로 아미타불을 염송하면 자신의 잘못된 업장도 차츰 소멸되고 번뇌가 사라지고 청정한 자신의 마음자리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일체의 차별이 없는 그 마음자리로 들어가야 합니다. 시기질투가 난무하는 번뇌소굴이 곧 법신불의 전신체(全身體)임을 관(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수행한담】태허스님<횡성 봉복사 주지> [현대불교 214호(1999-03-17)]
-"비록 적게 가졌어도 나눌줄 알아야 보살"-
염불은 부처님 만나려는 수행
불·보살 명호 마음에 채우면
일체 사량분별 끊어집니다
이곳 강원도 골짜기에도 봄이 찾아 오려는지 이른 아침마다 맑고 투명한 새들의 노랫소리가 한결 정겹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경제 한파로 얼어붙은 중생들의 마음에는 아직도 봄이 오려면 멀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때일수록 많이 가진 이들이 적게 가진 사람들을 돌보며 지켜주는 보살행을 펼쳐야 합니다.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가족의 생계 유지에 빠듯하고 여유없는 생활을 하면서도 다른 사람의 고통을 자기 고통으로 받아들여 그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온정을 베푸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그러면 이런 사람들이 펼치는 보살행의 근원은 어디에서 생겨나는 것일까요? 그 힘은 의외로 소박한 곳에서 나옵니다. 우리들의 번뇌가 고통에서 나오듯 보살행도 고통에서 시작됩니다. 도저히 못 견딜 정도의 쓰라린 고통이기에 그것에서 벗어나야 되겠다는 강력한 욕구가 바로 보살행 실천의 출발점입니다.
보살행의 원천은 책에 있는 것도, 부처님의 가르침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현재 우리들의 치열한 삶의 모습, 바꾸어 말해서 그 삶속에서 겪는 무한한 고통이야말로 보살행의 동력인 것입니다. 사실 고통은 우리에게 한(恨)을 줍니다. 특히 그 고통이 타의로 생긴 것이라면 부처님께서 깨달음에 방해가 된다고 말씀하신 분노와 진심, 개인적인 복수심이 될 수도 있지요. 하지만 뒤집어 생각해 보면 이 한이야말로 보살행을 발심하게 되는 동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말하자면 한이라는 놈은 중생에게는 개인적인 복수심으로 전환되고 보살에게는 서원으로 바뀌어 진다 이말입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똑같은 원인이 두갈래로 나뉘어 지는지 혹자는 의문이 생길 것입니다. 이유를 말씀드리지요. 자신이 아픔을 겪으면서 이제까지 자신이 생각하지 못했던 수많은 사람들의 아픔을 돌이켜 생각하고 이제 다시는 이런 아픔이 없는 사회를 만들겠다는 마음을 낼때는 한이 서원으로 변화됩니다. 자기가 겪는 고통에서 어서 빨리 벗어나고 싶은 욕구에만 빠져 있는 것이 중생의 모습입니다. 반면, 자기가 겪는 고통에서 나와 같은 고통으로 아파하는 다른 사람이 이 세상에는 수없이 많다는 것을 처절하게 느끼고 자기 아픔을 해결하려는 바람 이상으로 타인의 고통도 해결하려는 의지를 갖게 될 때는 서원으로 전환되는 것이지요. 따라서 아픔의 극복을 개인적인 한으로 끝내지 않고, 한(恨)의 사회화로 승화하는 그 밑바탕은 바로 더 아픈 사람의 처지에 서서 그들과 함께 해결하려는 마음, 즉 보살의 서원인 것입니다.
나도 가끔 중생들에게 보살행을 잘 실천하고 살았는지 내 자신에게 되묻곤 합니다만 그때마다 부끄러운 생각이 들때가 많습니다. 돌이켜 보면 이렇게 먹물옷을 입고 불제자가 된지도 60여년이 흘렀습니다. 강산이 벌써 여섯 번이나 바뀔 정도로 긴 세월입니다. 거의 매일 법주사를 다니시며 불공을 드리고 집에 오셔서도 맞이재를 지내실 정도로 불심이 돈독하신 할머니를 보고 자란 영향 때문인지 내 출가는 집안의 반대 없이 자연스럽게 이뤄졌습니다.
행자 생활 때부터 은사스님은 신도들에게 하심(下心)과 올바른 회향을 강조하셨어요. 무릇 중이란 신도들의 시주밥을 얻어 먹고 사는 사람들이니 공양이나 다과도 신도들이 다 먹은 후에 먹도록 가르치셨어요. 또 사찰에 들어온 삼보 역시 신도들의 피와 땀이 묻어 있는 것이므로 근본 마음을 헤아려 어려운 이들에게 나눠 주며 살라고 하셨습니다. 은사스님 또한 항상 이를 실천하셨지요.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추운 겨울이었는데 신도 두명이 은사스님을 마곡사로 찾아 왔어요. 방으로 스님을 찾아오자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시더니 따뜻한 아랫목을 내주시더라구요. 그때 나는 다짐했습니다. 사소한 행동 하나라도 늘 신도들을 살피며 그들 아래에서 살아가겠다고 말이죠. 이 두 가지를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서인지….
출가하고 가장 먼저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복지 사업이었습니다. 무량사 주지로 있을 때 사찰내에 광제원이란 고아원을 만들었지요. 그 당시가 1951년 6·25 난리통이라 먹을 것이 귀했던 시절입니다. 하지만 부처님과 나를 믿고 살아가는 고아들을 위해서 1백리길도 마다하지 않고 탁발을 했지요. 힘들었지만 보람있는 일이었습니다. 사찰 재정이 과거에 비하면 지금은 훨씬 많이 좋아졌다고 생각합니다. 불교계에서도 복지 단체가 꽤 많이 생겨난 것도 사실이구요. 하지만 다른 종교에 비하면 우리 불교는 복지 단체와 사회 시설들이 턱없이 많이 부족합니다. 특히 요즘은 경제 한파로 거리를 해매는 노숙자나 실직자들에게 잠자리나 따뜻한 공양 한끼를 대접할 수 있는 보시행이 절실한 때입니다.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의 입장에 서서 그들의 처지를 이해하고 내가 가진 것을 나눠줄 때 불국토 건설은 따로 외치지 않아도 저절로 이뤄지는 것입니다.
나는 평소 신도들에게 참선보다는 염불을 많이 하길 권합니다.
염불은 글자 그대로 부처님이나 보살님의 이름에 마음을 끊임없이 집중 시키는 것입니다. 염불(念佛)이라는 말에서 염(念)은 단순한 생각이 아닌 '집중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지요. 그러니까 부처님이나 보살님의 명호로 마음을 집중시켜 번뇌와 망상을 없애고 일체의 고통을 소멸해 깨달음을 이루는 것이 염불의 참뜻이라 할 수 있습니다. 흔히들 염불은 그저 불보살의 이름을 입으로 부르고 되뇌이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불교 수행의 요전이라 할 수 있는 <능엄경>을 보면 염불에 대해서 석가모니 부처님께 대세지보살이 아뢴 부분이 있습니다. 대세지보살은 염불하는 중생을 극락 정토에 태어나도록 큰 용맹심을 일으켜 주는 보살이지요. "부처님을 기억하고 부처님을 염한다면 현생에나 내생에 틀림없이 부처님을 볼 것이며, 언제나 부처님과 함께 해 어려운 방편을 빌리지 않아도 스스로 참마음이 열리니, 향수를 바른 사람의 몸에 향기가 있는 것과 같으니라"고 말했지요. 이 말은 염불 수행의 특징이 어디에 있는지를 아주 잘 나타낸 구절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을 만나는 것, 이는 우리 모든 불자들이 신명을 바쳐 추구해야 할 과제이며 성취해야 할 목표입니다.
나는 많은 경전중에서 <지장본원경> 독경과 지장보살 염불을 60여년동안 꾸준히 해왔습니다. <지장본원경>은 지옥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성불을 이루고 계신다는 지장보살의 공덕을 찬탄한 경전입니다. 또 지장보살은 도리천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의 부촉을 받고 모든 고통받는 중생들을 구제하신다는 분입니다.
"이 수많은 세계를 다 살펴도 지장 보살이 깨달음에 이르러 구제한 중생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누구든 지장 보살의 모습이나 거룩한 그 이름 단 한번만 불러도 캄캄한 지옥을 벗어나리라"고 <지장본원경>에도 나와 있듯이 나는 지장보살님께 의지하고 염불해 많은 공덕을 입었습니다.
부여 무량사·공주 갑사·원주 구룡사 에서 주지 소임을 맡으면서 많은 불사를 해왔지요. 그런데 불사때마다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어려움이 많이 따랐는데 그때마다 지장보살님께 매달렸더니 마음이 하나로 모아져 불사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습니다.
원주 구룡사에 있을 때 쉰 살먹은 보살이 한 명 찾아와 사는 게 고통스러운데 어떡하면 좋겠느냐고 하소연을 해왔습니다. 이유인 즉, 남편이 술만 먹고 집에 들어오면 가구를 마구 부수고 심지어는 그것을 말리는 자신과 아들한테도 손찌검을 서슴치 않는다는 겁니다. 자식들이 어렸을때는 아이들을 위해 그럭저럭 참고 살았는데 이제는 더 이상 못참겠다는 거예요. 나이 먹어 이혼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창피해서 남들에게 얘기할 수 없는 일이라 이렇게 나를 찾아 왔다고 말하더군요.
제가 그랬어요. 오늘부터 절에도 찾아오지 말고 아침 저녁으로 가족들 보는 앞에서 지장보살 염불을 열심히 하라고요. 그 보살은 108일, 324일 자신이 일정한 기간을 정해 죽기 살기로 2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정진했습니다. 처음에 이런 행동을 하는 그 보살에게 남편은 귀신이 씌웠다고 염불하지 못하게 염주를 집어 던지기 까지 했지요. 하지만 그 보살은 개의치 않고 염불 정진을 묵묵히 계속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부터인가 집안에 들어서면 항상 들리는 염불 소리로 인해 남편 행동에 변화가 옴을 느꼈답니다. 염불 기도를 시작한지 5년째 남편이 밤에 들어와 눈물을 흘리면서 그 보살에게 다시는 술을 먹지 않겠다고 말했답니다. 술을 먹을때마다 부인의 염불 소리가 귓가에 메아리쳐 괴로웠 다는 말을 했대요. 염불의 공덕으로 가정의 행복을 되찾은 가피를 입은 셈이지요.
산에 올라갈때는 하나의 길을 택해 올라가지만, 산 정상에서 보면 모든 길이 다 보이고 다 통해 있음을 알 듯 10만 부처님이 한 부처님이요, 한 부처님이 10만 부처님입니다.
염불하는 사람은 우선 하나의 부처님이나 보살님의 명호를 고집하지는 않을지라도 반드시 그 대상을 정해야 합니다. 한 부처님의 명호에 끝까지 의지하고 명해야만 그 부처님과 만나게 되고, 그 의지한 부처님을 만나게 되면 일체의 부처님을 동시에 친견할 수 있습니다. 모든 불보살은 우열이 있을 수 없으며 불보살이란 결국 '깨달음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염불은 부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끝없는 은혜이시고 걸림없는 의지처이시고 무조건의 대자대비인 것을 굳게 믿으며 이를 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염불 수행하는 사람은 부처님의 한량없는 공덕을 믿고 일심 염불하면 마음에서 일체 형상을 취하지 않고 큰 원을 세우고서 정진하게 됩니다. 정진해 나감에 따라 그동안 자신에게 쌓였던 모든 업장과 미혹들이 차례로 사라져 망념에서 벗어나게 될 때 바로 이것이 부처님의 공덕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망녕된 업의 흐름을 차단하는 길은 원력이 깃든 불보살의 명호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생기고 사라지는 온갖 마음들은 하나의 불보살의 이름을 만드는 것입니다. 불보살의 이름 하나로 모든 마음을 꽉 채우면 번뇌가 일지 못하게 하고 일체의 사량분별이 끊어지게 됩니다.
일체처 일체시(一切處 一切時)에 어떤 사람이 지장보살을 놓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밥을 먹어도 '내'가 먹는 것이 아니라, 지장보살이 먹는 것이고 잠을 자도 내가 자는 것이 아니라 '지장 보살'이 자는 것입니다. 불보살의 모습은 눈이나 귀를 통해 볼 수 있는 감각적 대상이 아니라 오로지 자신의 마음안에서 드러나는 깨달음의 큰 지혜 광명이며 자비이지요. 그래서 참되게 염불하는 사람은 절대로 요행스런 기적이나 신통 등 외형적 가피를 구하지 않습니다. 돈 생각이나 복을 받으려는 생각보다 부처님을 생각하는 마음이 절실하고 간절하다면 부처님은 불자들 앞에 분명히 나타날 것입니다. 부처님 말씀에 의지해 열심히 염불하십시오. 부처님 말씀대로 따르면 안되는 것이 없습니다.
염불도 열심히 해야 되지만 결국 인간은 타인의 고통을 내 아픔으로 여길줄 아는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도와 준다고 할 때 상대가 느끼는 아픔을 자신의 아픔처럼 느끼며 상대의 편에 서서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보통의 경우 자기 생각에 맞춰 행동하기 쉽습니다. 즉 중생은 자기 중심에 집착해 자기 생각대로 상대를 불쌍히 여깁니다. 그래서 상대방은 자신에게 단순한 구제 대상으로 전락해 버리기도 하지요. 만약 이와 같은 형태로 구제를 행한다면 그것은 하나의 지배 형태를 가져 오는데에 불과합니다. 그건 안됩니다. 아픔은 훨씬 더 큰 사랑의 표현입니다. 베푸는 행위는 아픔을 함께 느끼는 사랑에 비하면 좁은 사랑의 표현에 불과 합니다. 아픔을 기반으로 한 사랑야말로 진정한 사랑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직접 아픔을 겪거나 그렇지 않으면 타인의 아픔을 마치 자기가 겪은 아픔처럼 느낄 수 있는 마음이 중요 하지요.
'저런 처지에서 얼마나 아프겠느냐, 내가 여유가 있으면 조금이라도 도와주고 싶은데 참 미안하다'는 마음만 있으면 설령 도와주지 못해도 무량한 자비심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꼭 재물로만 도울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재정 형편이 안될 때는 마음이라도 함께 아파하며, 도와주지 못하는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으면 족합니다. 그것이 바로 큰 수행인 것입니다.
【가까이서 뵌 큰스님】태허스님(본원종 종정) [현대불교 358호(2002-02-27)]
말법시대엔 '바른 염불'이 최선
우선 '나'란 존재부터 없애야
정토사상 몰랐으면
불제자 되지않았을 것
화두 받는사람 근기에 맞게
'마음 정화' 이시대 가장 절실
한 수행자가 있었다. 깊은 산 속 바위 위가 그의 집이었다. 비바람도 굶주림도 그에게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직 수행의 기쁨 속에 살았다. 어느 날 한 벗이 <바가바드기타>를 보내왔다. 너무나 고마운 선물에 기뻐하며 읽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에 책을 보니 쥐가 표지를 갉아 먹었다. 수행자는 그 쥐를 쫓기 위해 고양이를 구했다. 그리고 고양이에게 우유를 먹이기 위해 암소를 구했고, 혼자 돌보기 힘들어 여자를 구하고 그녀를 위해 집까지 지었다. 몇 년이 지나 귀여운 아이가 생겼다. 결국 그 수행자는 더 이상 수행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이처럼 스스로의 욕망에 의해 여러 장애와 마주하게 되는 것이 인간이다. 그렇지만 그 욕망을 딛고 이상향을 추구하는 것 또한 인간이다. 그렇다면 그 이상향은 어디일까. 정토사상에서는 그곳을 바로 극락세계 즉 정토세계라고 말한다. 이 정토세계는 불교에서 말하는 가장 이상적인 세계로 수많은 정토행자들이 태어나서 생활하고자 원하는 세계인 동시에 스스로 건설하려고 하는 불국의 세계이다.
경북 예천 연방사에 주석하고 있는 태허 스님은'나무아미타불' 염불수행으로 정토왕생을 발원하고 있는 몇 안되는 노장 스님 가운데 한 분이다. 1927년 김용사에서 정경원 스님의 위패 상좌로 출가한 태허 스님은 "정토사상을 몰랐으면 부처님의 제자가 되지 않았다"고 할 정도로 오랫동안 염불수행을 해왔다. 태허 스님은 90에 가까운 나이에도 불구하고 매일 새벽 4시30분부터 7시까지 신도들과 함께 염불을 한다. 물론 스님에겐 수행시간이 따로 없다. 1일 24시간, 1년 365일 생활 속에서 나무아미타불을 화두삼아 정진하고 계신다. 하지만 염불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하나의 방편이라고 말한다.
"하늘에서 눈이 계속해서 내릴 때 마당을 아무리 쓸어도 계속 쌓이게 됩니다. 그러나 천막을 치고 쓸면 마당을 깨끗하게 쓸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염불을 하는 것은 천막을 치고 수행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지난해 겨울 야옹 스님을 비롯해 젊었을 때 같이 수행하던 몇몇 스님들이 마지막이라며 찾아와 옛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는 말로 화제를 돌린 태허 스님은 "요즘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언교(言校)만 난무하고 행증(行證)은 찾아보기 어렵다. 말법시대에는 아미타 부처님의 가르침인 염불수행이 수승하여 가통입로(可通入路)이다"며 염불수행을 권한다. 부처님께서는 수행의 시대를 정법ㆍ상법ㆍ말법 시대로 나눴는데, 지금이 바로 말법 시대다. 이러한 말법 시대에는 중생들의 근기가 낮기 때문에 이들이 성불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수행방법이 염불수행이라는 게 태허 스님의 지론이다.
"아미타불 정근은 정토삼부경인 <무량수경> <관무량수경> <아미타경>을 근본으로 아미타불의 본원력을 추구하는 공부입니다. 가장 쉬운 공부라 할 수 있지요. 오직 아미타불만 염송하면 되니 누구나 쉽게 들어올 수 있는 큰 문입니다. 부처님께서 출가수행자에게 참선을 권하는 반면 재가불자들에게는 염불수행을 권하는 까닭도 이 때문이지요."
태허 스님은 지난 89년 정토종인 본원종을 창종해 현세정토의 구현과 불국정토의 실현을 위해 염불지도와 수행을 하고 있다. 이는 스님이 조계종, 천태종, 태고종 등 여러 종단의 소임을 맡으면서 내린 결론이다. 불교가 어렵다 어렵다 하는 이 시대에, 중생을 가장 바르게 교화할 수 있는 방법이 염불수행이라고 깨달았다는 것이다.
본원종 총무원장 대화 스님은 "여러 종단에서 중책을 맡으면서 현대에 맞는 불교가 무언가를 늘 고민해 오셨다. 그리고 중생들의 근기에 맞는 교법은 보는 불교, 즉 정토불교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본원종을 창종하셨다"며 "지금도 불교를 이 시대의 중생들에게 가장 필요하고 유익한 종교로 만들기 위해 정진하고 교법을 펴는 스님의 모습은 종도들의 사표가 되고 있다"고 말한다.
염불수행은 참 나로 깨어나는 실천적인 삶의 운동이라고 말하는 태허 스님. 이런 스님께서 염불수행자들에게 항상 강조하는 법문이 있다고 한다.
"불교의 목적은 성불에 있어요. 그러한 결과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자력과 타력이란 두 가지의 수행방법이 있지요. 쉽게 이야기하면 참선은 자력이고 염불은 타력입니다. 한국불교에서 참선만 강조하다보니 이것만 가장 수승한지 알아요. 하지만 이 두 가지는 우열이 없습니다. 오히려 일반인들에게 있어서는 자력적인 방법보다는 아미타부처님의 본원력에 의지해 깨달음을 증득하는 타력적인 방법이 더 효과적입니다. 왜냐하면 수행에 있어 수시로 선지식들의 지도를 받을 수 없는 재가불자들이 아미타불의 본원력에 의지해 수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정토라는 진리의 문을 활짝 열어 놓고 친히 맞이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크게 자력문(自力門)과 타력문(他力門)으로 나눌 수 있는데, 출가 수행자가 아닌 일반인들이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깨달은 자에 의한 타력이 더 효과적이란 것이다. 타력문은 자력문처럼 이해를 근본적인 줄기로 하지 않고, 믿음(信)이 중심을 이루기 때문이다. 이러한 타력문의 가르침 가운데 아미타불과 그의 정토인 극락세계에 대한 신앙이 크게 발전하여 불교 가운데 큰 세력을 차지하는 하나의 유파를 형성하였다. 이를 정토교라고 한다.
불교의 신행에 있어 정토사상이 가장 수승하다는 스님은 염불 수행자들은 무엇보다 염불 수행의 의의를 잘 알아야 올바른 수행을 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아미타불은 무량수불 무량광불 혹은 감로불이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아득한 과거세에 법장 비구의 몸으로 있을 때 시방세계 2백10억의 국토 가운데 가장 훌륭한 곳을 골라 이상세계를 구현할 것을 서원하고 48대 서원을 세운 분입니다. 이 서원은 정토의 설계도인 셈이지요. 염불수행은 이 설계도를 가지고 정토의 집을 짓는 것입니다. 그 완성은 염불왕생이라고 합니다. 염불 수행자는 자신을 부정하고 오직 아미타불 존재에 의지해야 합니다. 즉 몸과 음성 그리고 생각까지도 아미타불과 하나가 될 때 참다운 염불수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태허 스님은 모든 수행이 마찬가지이겠지만 염불수행도 '나'라는 존재를 먼저 없애야 한다고 강조한다. 염불하는 순간부터는 부모님이 주신 육신과 음성 그리고 마음까지도 아미타불이 주신 것으로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또 스님은 무조건 '나무아미타불'만 부른다고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화두를 참구하는 참선이나 '나무아미타불'을 염하는 염불이나 수행자 자신이 일념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48원 가운데 십념왕생원(十念往生願)이란 서원이 있어요. 이는 누구라도 지극한 마음으로 10번만 아미타불 부처님께 귀의한다는 '나무아미타불'을 염송하면 극락정토에 태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일념으로 염하면 오매일여가 되고 궁극에는 생사일여가 되는 법입니다. 그 어떤 수행도 마찬가지이겠지요. 참선의 경우 화두가 항상 마음머리에 있어야 합니다. 시심마라는 생각, 그 생각만이 홀로 높아서 다른 생각이 없어야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생각마저 사라질 때 무여열반이 되어 활연대오하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오매일여가 되지 않고 화두만 붙잡고 망상만 부린다면 검은 산 밑의 마귀굴에 빠지게 됩니다."
태허 스님은 염불수행에서 경계해야 할 것 가운데 하나로 '나무아미타불'을 염송할 때 크든 작든 세속의 바람을 가져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아미타 부처님은 우리들이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어떤 바람을 갖고 있는지 이미 다 알고 있기 때문에 지심으로 아미타불을 믿고, 염관, 염불, 염사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정토경전을 공부하는 것도 게을리 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아미타불을 부르는 것이 염불수행의 전부가 아닙니다. 경전공부는 염불수행의 보조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염불 정근은 근본자성을 덮고 있는 망념의 먹구름을 조금씩 제거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또한 숙세의 업장들도 조금씩 소멸시켜줍니다. 만약 경전을 보지 않는다면 이러한 자신의 마음을 옳게 관찰할 수 없습니다."
염불수행으로 평생을 일관해 온 태허 스님은 요즘 선지식이 없음을 안타까워한다. 참선이든 염불이든 수행자의 근기를 알고 가르쳐 줄 수 있는 선지식들이 많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전생에 뱃사공이었던 사람에게는 물과 관련된 화두를 주어야 할 것이고, 대장장이였던 사람에게는 불에 대한 화두를 주어야 공부가 수월할 것입니다. 이렇게 받는 사람의 근기에 맞게 화두를 주어야 하는데 요즘에는 화두를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모두 캄캄하니 화두가 성성하게 살아 있을 리가 있나요."
태허 스님은 이 한 가지만 더 알고 가라며 마음의 정화를 강조하신다.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것은 마음의 정화입니다. 정화된 마음 하나하나가 모여 온 국토가 청정할 때 그것이 극락세계가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