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유억불 정책으로 불교가 기를 펴지 못했던 조선시대에 살았던 스님들의 행적은 어떠했으며, 사대부는 불교에 대해 어떻게 인식했을까?
11월 29일 동국대에서 개최된 한국불교학회 제39회 추계전국학술회의에서는 조선시대 불교의 모습을 짐작케 하는 논문들이 발표됐다.
‘조선초 천태종승 고승 행호와 불교계’를 발표한 황인규(동서대 일본문화센터) 책임연구원은 조선시대 마지막 천태종 고승 행호 스님을 통해 당시의 불교계를 고찰했다. 황인규 씨는 “행호 스님은 백련결사의 도량이었던 백련사를 중창하고 선종의 본산이었던 흥천사 주지를 하며 당시 불교계를 주도했다”며 “이 때문에 성리학자들의 행호에 대한 비판이 끊이지 않아, 유생들에 의해 제주에 유배되어 목이 베어졌다”고 밝혔다. 또 “억불기 불법을 크게 일으키고자 했던 조선 초 행호, 조선 중기 나암보우, 조선 후기 환성지안은 같은 운명에 처해진 조선 불교계 수호의 삼성(三聖)”이라며 “신라 이차돈, 고려 말 나옹혜근의 흥법 정신을 이은 숭고한 것”이라고 말했다.
행호 스님과 같이 불교를 부흥시키려다 유명을 달리한 스님도 있지만, 사명당 유정 스님(?~1619)과 같이 다섯 개나 되는 관직이 내려진 스님도 있었다. ‘사명당 유정의 관직’을 발표한 이철헌(동국대 불교학과) 강사는 “유정 스님은 당상관(정3품), 절충장군첨지중추부사(정3품), 동지중추부사(종2품), 가의대부 행용양위대호군(종2품), 형조판서 승지의금부사(정2품) 등의 관직을 선조임금으로부터 직접 내려받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철헌 씨는 “유정 스님이 영의정을 제수한 임금의 뜻을 거부할 수 없어 3일 동안 영의정을 지내고 밤에 산으로 돌아갔다는 ‘삼일정승’ 이야기는 일반 백성들의 존경심이 과장된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했다. 임진왜란으로 의승병의 활약이 두드러지고, 승려들에게 공명첩을 주는 등의 유화책을 쓰기는 했으나 조선시대 전반적인 기조는 억불이었으며, 영의정 제수는 반드시 조선실록에 기록해야 하나 선조실록에 기록이 남아있지 않은 점, 표충사에 전하는 선조 친필이라는 사령기는 후대에 쓰여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한편 조선시대 불교에 대해 적대적인 사대부들의 인식의 틈새에서도, 임진왜란 이후 <어우야담>을 쓴 유몽인(1559~1623)과 같이 불교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는 사대부들도 있었다. 김상일(동국대 국문과) 교수는 ‘유몽인이 본 불교인과 불교’에서 “허균, 이안눌, 유몽인 등은 불교를 바라보는 시각이 당시 일반 사대부들과 다른 면모를 보였다”며 <어우야담>의 ‘승려’조의 내용과 스님들과 주고받은 증서·서신을 통해 불교에 대한 유몽인의 인식을 살폈다.
<어우야담>과 <광해군 일기>에 쓰여진 비구니 이예순에 대한 기록을 비교한 김상일 씨는 “<광해군 일기>에서는 이예순의 사상관과 불교관을 알 수 있는 진술이 빠져있고, 이예순 사건을 윤리를 무너뜨린 사건으로 보는 반면, <어우야담>은 이예순의 불교에 대한 견해와 주장을 충분히 전달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를 엿볼 수 있다”고 말했다. 또 김상일 씨는 “만년에 금강산에서 선불교를 접한 유몽인은 면벽수행 하는 선승들의 모습을 자주 언급하고, 활어, 사어, 자득과 같은 선불교 용어를 빈번하게 사용했다. 그는 유교적 윤리강령이나 규범을 앞세워 스님들의 삶의 방식과 행적을 재단하려 들지 않았다”며 유몽인이 스님들의 삶에 개방적이었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