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
![]() | ![]() |
다음은 전문.
월하 대종사는 1915年 4月 25日 충남 부여군 군수리 파평 윤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노천(老天)은 법호(法號)이고 법명(法名)이 월하(月下)다. 속명(俗名)은 희중(喜重).
어릴 때부터 지혜와 자비가 몸에 익기 시작하여 일찍부터 출격대장부(出格大丈夫)로서의 자질을 보였다.
마침내 1933년 7월 20일 금강산 유점사로 출가하여 차성환 화상을 계사로 첫 사미계를 받고 운수의 삶을 시작하였다. 부모 허락을 받지 않고 출가 득도했다. 그리고 부친과 형님이 세 번이나 절에 찾아왔으나 스님의 의지와 신심이 견고하여 마음을 돌이키지 못하였다.
1940년 통도사에서 비구계를 받고 당대의 고승 구하대선사를 만나 그의 수제자가 되었다.
선사의 수행방법은 사교입선(捨敎入禪)의 절차를 밟지 않고 먼저 선을 통해 돈오(頓悟)의 자내증(自內證)으로 출신활로(出身活路)를 열었다.
선사는 1940년 오대산 방한암 선사 회중(會中)에서 몇차례의 안거를 성만한 후 1944년 철원 심원사에서 대교과를 수료하였다.
또 선사는 천성산 내원사에서 치열한 용맹정진을 통해 제불의 본원과 일체보살들이 수증(修證)한 본각진성(本覺眞性)을 깨닫고 法界의 자유인이 되었다.
선사는 단 한번도 구도자의 길에서 어긋나는 것을 스스로 용납하지 않았다. 어려운 현안이 있을 때마다 이사원융(理事圓融)으로 앞장서서 해결했다. 1954년 효봉 청담 인곡 경산스님등과 함께 사찰정화수습대책위원회에 참가해 전국사찰이 구도도장으로 제 기능을 할 수 있도록 불교정화운동을 전개하여 오늘의 청정비구승단이 있게 하였다.
이후 선사는 종단의 주요직책을 맡으면서 종단이 어려울 때마다 법등(法燈)의 역할을 자임했고 혜등(慧燈)의 맥(脈)을 잇는데 기여했다.
1955년 처음으로 조계종 중앙종회의원에 피선되었고 56년에는 통도사 주지를 역임했으며 58년에는 조계종 감찰원장이 되었다. 또 58년부터 80년까지 통도사 금강계단 전계대화상(傳戒大和尙)으로 승니(僧尼)를 배출해내며 종단의 종장(宗匠)을 키워내는데 힘을 보탰다.
1960년도엔 조계종 중앙종회의장을 역임하였고 75년도엔 동국대학교 재단이사장을 맡아 종립학교로서의 위상을 구축하는 일에 힘썼다.
1978년 조계종 원로의원으로 선임됐으며 그 다음해인 79년도엔 조계종 총무원장에 추대되었으며 조계사와 개운사로 나누어진 종단분규를 오직 스님의 초지일관된 의지로 수습하였고 이로 인해 종단의 정통성과 법통이 확립되었다. 10.27법난이 자행됐던 80년도엔 종정직무대행을 맡아 흩트러진 불심을 추스르는데 전념했다.
1984년 영축총림으로 지정된 통도사의 초대 방장으로 자리한 월하대선사는 정변전에 주석하며 언제나 문을 열어놓고 방문자들을 맞았다.
선사가 늘 보여주었던 수행자의 모습은 늘 일일불작(一日不作)이면 일일불식(一日不食)이라는 백장청규에서 어긋남이 없었다.
손수 자신의 방청소와 빨래는 자신이 하였으며 새벽 3시 반 예불에서부터 대중과 더불어 공양을 하였고 경내청소등 운력(運力)에도 빠지지 않는 등 자오자증(自悟自證)하는 규범을 보였다.
이러한 선사를 가리켜 대중들은 ‘백장의 청규와 조주의 수행가풍을 실천한 분’이라고 입을 모았다.
항상 근엄하면서 쓸모없는 권위를 버리고 노유와 어울리는 친화력을 가진 분이 월하 대선사이다.
오늘날 불지종가(佛之宗家)인 통도사의 가풍은 구하, 경봉, 벽안스님에 의해 이어져 다시 스님이 이를 전수받아 오늘에 이른 것이다. 스님이야말로 근대 통도사의 역사이고 산증인이다.
다시말해 선사는 하심(下心)의 자애(慈愛)가 몸에 밴 분이다.
![]() | ![]() | ||
| |||
![]() | ![]() |
선사는 법을 구하려고 오는 운수납자에게는 격외(格外)의 선지(禪旨)를 보였고 모든 불자들에게는 상불경보살(常不輕菩薩)의 하심과 자애를 베풀어 자신들의 본분을 깨닫게 하였다.
이렇듯 선사의 자상함은 비록 부드러울망정 이사(理事)를 달관(達觀)하고 수처작주(隨處作主 - 어디에 처하든 주인공의 모습을 짓는 것)의 광활한 덕목을 확보하는데 장애가 되지는 않았다. 이같은 선사의 가풍은 상당법문 게송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口裡無嗔吐妙香 (구리무진토묘향)
面上無嗔供養具 (면상무진공양구)
心裡無嗔是珍寶 (심리무진시진보)
無染無垢是眞常 (무염무구시진상)
입 속에 성내고 어리석음이 없으면 향내가 나고
얼굴에 번뇌가 없으면 그 자체가 중생을 위한 공양이다.
마음 속에 삼독이 소멸되면 그대로 참된 부처요
어느 곳에 있어도 물들고 때묻지 않는 그곳이 극락일세.
선사의 얼굴에는 번뇌의 어둠이 숨어있지 않았다. 늘 시골 할아버지같은 지극한 자비심만이 보는 이로 하여금 잔잔한 감동을 던져준다.
통도사가 오늘날의 당우를 건립하여 위용을 자랑하고 있는 것도 선사의 도움 덕분이 컸다.
현재의 박물관과 설법전을 지을 때 선사는 자신의 수중에 있는 돈을 모두 내놓았다. 선사가 법문다니며 한푼 두푼 모아놓은 것과 신도들이 약값하라며 준 돈을 모두 불사금에 내놓았던 것이다.
1992년도엔 정신대 할머니들을 위한 나눔의 집 건립기금으로 아무도 모르게 1억 5천만원을 보시했다. 상좌들이 이 사실을 뒤늦게 알고 언론에 알렸다가 오히려 호된 꾸중을 들었다는 일화는 선사의 기품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선사는 마지막 입적하실 때까지 자신의 다비식 비용까지 다 마련해 놓으셨다. 사중 정재의 혜택을 안받도록 사전에 다 조치하셨으니 평소의 근검절약이 이런 기품을 만드신 것이다.
선사의 이런 기품은 그의 悟道頌에서도 여실하게 나타난다.
本明解月潛水中 (본명혜월잠수중)
無生滅處見有無 (무생멸처견유무)
無心去來西童用 (무심거래서동용)
無一影處顯示行 (무일영처현시행)
본래 신령스런 달빛이 물 속에 담겨있다.
생사 없는 곳에 유무를 보아라.
마음을 비우고 오고 감을 자유롭게 하면 정토의 마음을 쓸 것이다.
그림자 없는 곳에서도 밝은 달은 항상 떠있다.
선사가 밝힌 신령스런 달은 자성을 상징한다. 자성 자체에 생멸이 없지만 항상 유무는 되풀이 되고 있음을 강조한다.
선사는 영축산을 기대어 세상을 관조해왔다. 시대적 변화와 역사적 격동을 체험하면서 늘 당당하게 처신했다.
1994년 선사는 개혁종단이 들어서자 종도들의 염원을 받아들여 제9대 종정직을 수락하게 된다. 그리하여 사부대중이 합심해 개혁종헌을 이끌어내고 종단화합과 중흥을 도모하는데 있어서 정신적 지주역할을 여법하게 이행하였다.
하지만 1998년 승가의 위계질서가 문란해지고 수행풍토가 위협받고 종헌이 준수되지 않을 때 유시를 통해 바로 잡고자 하였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선사의 의지는 금강석같았으나 뜻을 달리하는 사람들에게는 독선으로 보이기도 하였다.
마침내 선사는 모든 것을 버리고 다시금 영축총림 방장의 자리로 돌아와 후학양성과 대중제접(大衆提接)에 여생의 전력을 다 쏟아부었다.
선사는 불기 2547년 12월 4일 9시 15분 영축총림 정변전에서 입적하셨으며 다음과 같은 열반게를 남겼다.
一物脫根塵 (일물탈근진)
頭頭顯法身 (두두현법신)
莫論去與住 (막논거여주)
處處盡吾家 (처처진오가)
한 물건이 이 육신을 벗어나니
두두물물이 법신을 나투네
가고 머뭄을 논하지 말라
곳곳이 나의 집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