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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명 스님 법문-1
【수행한담】덕명 스님<안적사 주지> 현대불교신문 95호 [1996-09-25]

- “ 웃는 얼굴 좋은말 생활속 방생”-
- 자기 방생후 보살의 서원 세워야 -

<약력>
·1926년 울산 生
·49년 범어사서 동산스님 은사로 득도
·해인사 범어사 강원서 이력마침
·조계종 총무원 재무부장 및 중앙종회의원, 범어사 주지(78년) 역임·78년 부산불교연 합회 창립

서호청풍강남래 (西湖淸風江南來)
학비장천철우가 (鶴飛長天鐵牛駕)
한래한거무타사 (閑來閑去無他事)
월조건곤허공무 (月照乾坤虛空舞)

서호의 맑은 바람 강남에서 불어오니
먼 하늘 학이 날고 쇠소와 기러기
한가로이 오고가니 다른 일이 없어
하늘 땅 가득 비춘 달빛 허공에서 춤을 추네.

참으로 오래전에 내가 혈기충만하던 그 시절에 지은 것입니다. 그때 나는 파계사 금당선원의 말석에서 안거를 지내고 있었습니다. 성전(聖殿)에 성철 스님이 계시던 때였고 정진하는 수좌들의 눈빛이 모두 형형하던 시절이었지요. 수좌가 많았던 것은 아니고 다섯명 정도였습니다. 무더운 여름날 밤이면 소나무 숲으로 들어가 선선히 불어 오는 미풍에 몸을 맡기고 선정에 드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무더기 무더기 별빛이 빛나는 밤하늘을 보며 우주의 기운을 호흡하고 들끓는 번뇌를 벗어 던지기 위해 화두를 들고 정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날은 음력 6월 보름이었는데 무척 더웠습니다. 나는 저녁 공양후 정진을 하다가 조용히 밖으로 나가 솔 숲에 앉았습니다. 솔바람이 고요히 불어 오는 그 적막한 시간에 나는 은사스님이 내려 주신 ‘무(無)’자 화두를 들고 호흡을 가다듬었습니다. 유와 무의 양변을 왕래 하면서도 한곳에 치우치지 않으며 무착무애(無着無碍)의 큰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런 적적(寂寂)의 시간에 불현듯 떠 오르는 보름달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가슴가득 들어차는 기쁨이 있어 혼자 일어서 춤을 추었지요.

안거 기간중 그때의 열락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혼자 음미하고 보임했습니다. 그리고 짧은 재주로 그 열락을 표현해 은사이신 동산스님에게 보냈습니다. 편지를 보내고 나니 문득 스승께서 얼마나 가소로와 하실까 하는 걱정이 생기더군요.

해제를 해서 먼저 범어사로 달려 갔습니다. 은사님을 뵙기 위해서죠. 스님은 내가 삼배를 올리는 동안 아무 말씀이 없으시더니 조용히 입을 여시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건방을 부렸다고 호통을 치실 것같아 마음을 조리고 있었고요.

“그놈 제법 도둑질을 하겠어.”

호통이 아닌 조용하고 부드러운 말씀이 칭찬인 것 같다는 생각과 동시에 나는 스님께 절을 하며 “이왕이면 큰 도둑으로 키워 주십시오.”라고 했습니다. 나는 스님에게 열심히 공부하란 말씀을 듣고 물러 나왔는데 아직 그때의 말씀과 그 조용한 모습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서두에 내 얘기가 길었군요. 자랑하려는 것이 아니고 여러분도 열심히 정진하란 뜻에서 옛날 얘기 삼아 한 것입니다.

오늘 법회에서 나는 방생의 참의미를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어느새 가을이 오고 중추가절이 다가왔습니다. 이때쯤이면 많은 절에서 방생법회를 주관하지 않습니까. 방생은 참으로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 의미를 바로 알고 바른 방생을 해야 공덕이 되는 것입니다. 의미도 모른채 잘못된 방생을 하면 악업만 더 쌓는 것입니다.

방생은 글자 그대로 생명을 놓아 주는 것입니다. 뭇 중생을 죽음의 공포에서 병마의 고통에서 천재지변의 고난에서 건저 주는 것이 방생인 것입니다. 우리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들고 사는데 이 방생 하나만 잘 행해도 무량한 성불의 근기를 쌓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방생은 이론도 필요없고 계획도 필요없고 연습도 필요없습니다. 오직 실천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많이 배운 사람이나 적게 배운 사람이나 다 똑 같이 행해야 할 일인 것이지 어떤 이유나 조건이 있어서도 안되는 것입니다. 어떤 반대급부를 바라는 것도 방생의 마음을 해치는 것이고 남에게 피해를 끼치면서 하는 방생은 더욱 안될 일입니다.

물고기를 사서 물에 놓아주는 방생은 이제 그만 둬야 합니다. 오히려 환경을 해치는 방생이 될 뿐이니 무슨 공덕이 되겠습니까. 관광버스를 타고 가서 물고기 몇마리 놓아 주고 소원을 빌지만 그것도 다시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그렇게 해서 복을 받고 공덕이 쌓이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그나마 안하는 것보다 낫지 않느냐는 사람도 있겠지만 진실로 자기와 중생을 자유롭게 하는 방생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축생과 미물을 볼 때마다 “어서 그 축생미물의 탈을 벗고 좋은 세상으로 환생하라”고 축원 한마디 해주는 것이 더 바른 방생일 것입니다. 방생은 조건이 없어야 한다고 했는데 그 무조건의 방생이란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걸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부단한 자기수행이 필요합니다.

가장 먼저 방생해야 할 대상은 자기 자신입니다. 육도를 윤회하는 자신의 업장으로부터 스스로 해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승자박(自繩自縛)이란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긴 윤회의 굴레에서 수많은 업을 지으며 스스로의 생명을 스스로 얽어 매고 있습니다. 그래서 중생고의 사슬은 길기만 한 것입니다. 다른 생명을 해방시키기 위해 무엇보다 자신이 먼저 이 중생의 사슬을 벗는 지혜를 갖추어야 합니다. 물론 그 사슬을 벗는 일은 하루이틀에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끝없는 수행과 선업을 쌓아가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여기서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이치를 되새길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지혜를 구하고 중생을 교화하는 일을 둘로 갈라 놓아서는 안됩니다. 지혜를 구하는 가운데 이웃(중생)의 고통을 돌보는 큰 마음을 갖춰야 합니다. 그 큰 마음이 바로 보살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은 그 큰 마음을 내기 쉬운 곳이 아닌 것 같습니다. 하루를 사는데도 얼마나 많은 사람을 만나고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얼마나 많은 일을 합니까. 그 복잡한 생활 속에서 스스로 사슬을 풀어내는 지혜를 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불자들은 그 어려운 일을 능히 할 수 있습니다. 보살의 마음을 갖길 서원 하면 됩니다. 서원하는 그 순간 이미 보살의 마음은 갖춰집니다. 얼마나 착실히 유지하고 쓰느냐하는 것이 문제이겠지만 말입니다. 보살의 마음은 지혜와 어리석음을 따로 두지 않습니다. 모두 어여쁜 것입니다. 그 마음을 오래도록 갖기 위해 부지런히 수행해야 합니다.

세상을 어여삐 보는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어여쁜 세상이 보이고 흉하게 보는 사람의 눈에는 흉한 세상만 나타납니다. 여기에 중생과 보살의 차이가 있는 것이니 모든 것이 한 마음을 어떻게 갖느냐에 달렸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 방생을 하는데 있어서도 나 자신을 방생하는 것과 다른 생명을 놓아 주는 일을 따로 두고 분별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번뇌의 사슬에 묶여 있는데 어떤 생명을 편케 해 줄 수 있겠습니까. 달마대사가 혜가에게 “그 마음을 가져 오너라”라고 함으로써 제자의 눈을 번쩍 뜨게 했던 일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이미 편안하게 구족된 자신의 마음자리를 찾은 사람은 그 모습 그대로가 이미 방생의 실천입니다. 법당에 모셔진 부처님상을 보고 거북하거나 짜증스럽다고 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부처님의 상 그 자체가 우리를 편하게 해 주는 것은 그분은 이미 생노병사의 굴레를 다 뛰어 넘으신 대각의 상을 스스로 갖추셨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면 여러분이 사회생활을 하며 좋은 낯빛을 하는 것도 이미 중요한 방생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좋은 말 한마디 웃음 띤 표정 하나가 다 방생입니다. 우리가 살아 숨쉬는 이 순간 순간이 다 방생의 과정입니다. 내가 있으므로 이웃이 있고 일체 만물이 있습니다. 나의 한 동작이 죄악이면 법계가 죄에 휩싸이고 나의 말 한마디가 선하면 법계가 착해집니다. 나는 법계의 모습이고 법계는 나의 거울이라 했습니다. 그러니 나의 삶이 방생 그 자체가 되어야 할 것 아닙니까. 이렇듯 방생은 실천인 것입니다. 불자 한사람 한사람이 웃음띤 얼굴을 갖는 방생에서 고통속의 이웃을 돌보는 방생에 이르기까지의 작고 큰 방생을 생활화 한다면 우리 사회는 그대로 불국정토가 될 것입니다. 실천력이 없는 방생이란 있을 수 없으며 조건을 따지는 방생만 하는 사회는 오히려 지옥도에 죄악을 덧칠하는 격이 될 것입니다.

자신을 먼저 방생하라는 의미가 무엇인지 잘 아셨을 겁니다. 이제 불자들은 사회를 방생하는데 관심을 가져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부단한 자기수행과 서원 그리고 조건 없는 실천을 통해 사회의 방생은 이뤄질 수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그늘이 너무 많습니다. 그 그늘 속에서는 반드시 가난과 질병과 범죄가 독초처럼 자라나고 있습니다.

보살의 마음을 낸 불자들의 손길은 그런 독초를 제거하는데로 모아져야 합니다. 천수천안의 관세음보살님처럼 우리의 손과 눈을 이 사회의 그늘로 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먼저 스스로 죄업의 사슬을 푸는 수행이 필요하고 서원을 세우는 것이 필요 합니다. 물론 어느 것이 먼저고 어느 것이 나중이란 분별을 해서는 안됩니다. 보살심을 내는 것과 그 마음을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함을 거듭 강조하고 싶습니다. 보살심을 낸 불자 오백명이 모이면 그대로 천수천안이 아닙니까. 관세음보살님은 하늘에 있지 않고 지장보살님은 땅 속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 마음을 내면 그대로 관음보살이요 지장보살인데 그래서 그 원행을 행하면 이곳이 불국토인데 어디 가서 찾고 있습니까.

방생의 궁극적인 목적은 해탈입니다. 해탈은 자유이고 무애자재입니다. 윤회의 사슬을 벗어나 영원한 생명의 실상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과 사회를 방생하는 일을 멈춰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사슬을 푸는 것도 사회를 향해 방생의 실천을 쉬지 않는 것도 다 해탈을 위한 것입니다. 자신이 해탈을 향해 정진하는 가운데 이웃과 함께 해탈의 길을 열어 가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 사회가 해탈한다는 것은 온 법계가 해탈한다는 것이니 그 자리야 말로 불국토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불국토는 커녕 지옥문을 넓히며 살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그늘은 해질녁의 산그림자처럼 넓어지고 범죄 소식은 끝이 없습니다. 지옥이 죽어서 가는 곳인줄 알지만 이미 죄악이 들끓는 이 세상이 지옥입니다. 이 사회가 지옥으로 변해 버리는 이유는 어리석음에 있습니다. 어리석은 중생이 사는 곳이 지옥일 수 밖에 없지 않습니까. 지옥을 벗어나는 지혜가 필요 합니다. 그 지혜는 마음을 닦는데서 시작됩니다. 티끌이 가득한 마음은 지옥을 지을 뿐이니 스스로 짓는 윤회의 사슬을 어느 세월에 벗어던진단 말입니까.

부처님 가르침에 귀의해 수행정진 하는 것은 마음의 티끌을 닦아내고 청정한 법계를 짓는 일임을 새삼 말씀드릴 필요가 없을 겁니다.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 고통의 근본을 모른채 무심히 살다 가는 것은 축생미물의 윤회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여러 불자님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귀의해 자신의 실상과 생노병사의 고통이 왜 오는 것인지를 알고 거기서 벗어나고자 수행정진 하는 사람들이니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이 생을 받아 불법에 귀의 한 것도 무수한 전생의 선덕이 있어서 가능 한 것입니다. 다음생에서는 한 걸음 더 해탈로 나아간 모습으로 태어 날 것을 의심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되는 것은 여러분이 이 세상을 살며 얼마나 많이 닦느냐에 달린 문제이기도 합니다. 스스로 마음을 닦으며 이웃의 사슬을 풀어 주는 보살행을 한시도 쉬지 마십시오.

방생은 보살행입니다. 나와 이웃이 함께 해탈하는 실천의 길입니다. 방생법회에 참가 하는 것만 방생이 아닙니다. 남을 이롭게 하는 모든 일이 방생이고 나를 위해 수행하는 일도 방생입니다. 그러니 살아가는 모습 그 자체가 방생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와 일체 중생의 위대한 해탈을 향한 방생의 원력을 굳게 세우고 청정한 마음으로 살아 갑시다.


【수행한담】덕명스님<안적사 주지> 190호 [1998-09-16]

-“스스로를 옭아맨 탐진치의 끈 푸세요”-

-불법은 모든사람에 차별없이 열린 문-
-자신 방생해야 일체법의 실상 알아요-

*약력
·1926년 울산 生
·51년 범어사서 동산스님을 은사로 득도
·해인사 범어사 강원서 공부
·74년 조계종 중앙종회 의원
·75년 조계종 총무원 재무부장
·78년 범어사 주지
·80년 부산불교연합회 창립, 초대회장 맡음
·97년 <범망경보살계본> 엮음.
·現 부산시 기장군 안적사에 주석

이렇게 산중 깊은 곳에 고요히 앉아 있지만 세상소식은 다 들려오는데 요즘 어렵다고들 많이 그러더군요. 경제적인 어려움이 닥치니 마음의 여유마저 잃고 너무 각박해지는 것은 아닌가 걱정이 됩니다. 지금 보다 어려웠던 때를 한 번쯤 되돌아 보면 지금의 경제난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 지혜가 나오리라 봅니다.

부처님께서 제자들과 베살리의 대림정사에 머물고 있을 때 베살리 사람들을 칭찬 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베살리국이 두 개의 큰 왕국사이에 끼여있어서 항상 위협을 받으면서도 정치체제를 잘 운용하고 독립을 유지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비구들이여, 이곳 사람들은 밤에는 짚을 베개삼아 잠자고 아침 일찍 일어나 열심히 자신의 할 일을 다하고 있다. 그래서 다른 나라가 이 나라를 침략할 틈을 찾지 못한다. 비구들이여, 장차 그들이 유약한 생활에 빠져서 푹신한 침소에서 새털 베개를 베고 태양이 솟아오를 때까지 잠을 잔다면 금방 침략의 틈을 주고 말 것이다”고 말씀하셨지요. 이것이 어찌 국가를 지키는 데만 국한되는 말이겠습니까?

우리가 이렇게 어려움을 맞이한 것도 우리의 마음이 푹신한 침소에서 태양이 솟아오를 때까지 잠들어 있지는 않았는지 살펴보고 반성해야 합니다. 특히 일반 서민들 보다는 있는 사람들과 권력을 쥔 사람들이 문제의 원인을 살펴 해결에 앞장서 솔선수범해야 합니다. 서민들은 본래부터 근검절약하고 부지런하며 열심히 살고 있지 않습니까? 오히려 많이 가진 사람들이 좀더 가질려고 하고 편안한 사람들이 좀더 편안하고자 하는 욕심과 유혹을 떨치지 못하는데 원인이 있다고 봅니다. 개인의 욕망보다는 사회, 국가 전체를 위하는 마음을 회복해 나가야 합니다.

내가 출가하던 당시는 해방직후라 여러 가지로 혼란기였습니다. 시대가 어지럽고 먹고 살기도 어려웠지요. 속가 살림살이는 우리집뿐 아니라 누구나 어렵던 시절이었어요. 어머니가 칠남매를 낳으셨는데 의대에 다니시던 큰형님께서 학도병으로 끌려가 돌아가시고 나니 허탈감이 크셔서 나를 절에 보내셨어요. 절에 가면 명(命)도 잇고 공부도 할 수가 있다며 절에 가겠느냐고 묻더군요. 그때 공부라고 하면 책이나 글을 배우는 것으로 알았는데 차차 글이나 교리가 아닌, 부처님 말씀의 핵심을 알아야겠다는 원력을 내게 되었죠.

그렇게 나를 절에 보낸 어머니께서는 그래도 아들에 대한 정이 그리워 숨어서 공양주하는 나를 지켜보곤 하셨다고 하더군요. 나중에 범어사에 다니러 온 어머니 친구분들께 전해들은 이야기입니다. 그때는 어린 마음에 왜 아는 척을 안하셨나 했는데 나를 몰래 지켜보고는 돌아서 가신 어머님의 그 마음이 얼마나 큰 마음인지 이제는 감사할 뿐입니다. 얼굴을 보게 되면 정에 이끌리게 되고 내 공부에 장애가 될까봐서였지요.

절에 들어와 이제 5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습니다. 은사이신 동산스님의 가르침은 특별하고도 소중한 것이었어요. 스님께서는 범어사 조실로 계실 때 칠십 노구에도 새벽 3시 5분전이면 반드시 일어나 세수하고 모든 법당을 참배하셨습니다. 예불드리고 같이 정진하시고는 아침 공양후 빗자루 들고 마당을 쓰시는 겁니다. 조실스님이 앞장을 서시는데 다른 스님들도 자연 안 나올수가 없는 것이었죠. 조실스님께서 몸소 마당에서 비질을 하시는데 어느 누가 게으름을 피울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리고 스님은 무엇보다 내 상좌 남의 상좌 차별이 없었어요. 누구든 정진하고자 하면 받아들여 함께 공부했습니다.

어려운 시절이라 범어사 살림살이도 예외가 아니어서 때거리가 없을 때도 있었는데 그래도 공부하러 오는 사람들은 무조건 받아 들였어요. 한때는 백5십여명이 공부한 적도 있었지요. ‘하늘이 알아서 식량을 대준다’고 늘상 말씀 하시며 어려우면 어려운대로 수제비나 보리죽을 나누어 먹었죠. 그렇게 넉넉하고 자비로운 스님이셨지만 공부 점검에는 매우 엄격하셨지요. 삼십대 초반 파계사에서 공부를 했는데 5명정도가 같이 용맹정진을 하고 있었죠. 저녁 공양후 자는척 하다가 몰래 좌선하려고 일어나 보면 벌써들 다들 앉아 있곤 했어요. 그렇게들 열심이니 잠을 잘 수가 없는 겁니다. 그렇게 서로를 거울삼아 서로 뒤쳐지지 않기 위해 열심히 했죠.

좌선을 하다 졸음이 오면 잠시 걷다 들어가곤 했는데 그렇게 두달여 지난 음력 6월 보름날쯤이었습니다. 그날도 잠시 나왔는데 솔바람이 불어오고 보름달이 환하게 비추는데 바윗돌에 앉아 있자니 스스로 마음이 고요해지고 전후좌우가 뚝 끊어지는 경지가 되더군요. 바로 무아경이라고 할까요. 그때 게송을 적어 동산스님께 보내드린 적이 있었어요. 공부를 마치고 범어사에 돌아와 문안을 드리고 앉으니 동산스님께서 “싱거운 놈, 뭘 글을 적어 보내고 그러노” 하시더군요. 그래 어떻게 평가를 해 주시나 하고 노심초사하고 있는데 “저 게송은 그만두고 여자출정지화(女子出定之話)를 일러보아라”하시는데 그만 한방 맞은 겁니다. 그래 얼른 삼배를 드리고 물러나왔죠. 그렇게 나오는 저에게 “도적놈”하시길래 “큰 도적놈 되겠습니다”했어요. 그때 스님께서 “공부 잘해”하시던 그 격려를 지금껏 놓지 않고 정진하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 부처님 말씀의 핵심을 알아야 겠다는 마음으로 이곳 저곳 선방을 많이 다녔습니다. 오대산, 도리사, 해인사, 파계사, 강진 만덕사 등지에서 용맹정진했지요. 도반들과 함께 이 몸 받았을 때 성불하리라는 다짐으로 밤잠 안자면서 열심히 했어요.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즐겁고 환희심이 일어납니다. 그렇게 함께 정진하던 많은 스님들중에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도반이 있어요. 인곡스님의 제자였고 혜암스님의 사제였던 혜곡스님은 같이 강원에서 공부할 때 하루에 2장 외우기도 쩔쩔매는 경전 40장을 토도 없이 외워 주위를 놀라게 할 정도로 비범한 분이였죠. <법화경> 7권을 모두 외울정도로 열심이셨던 그런 분이었죠. 나하고는 특별한 인연이 있었는지 부산 금정사에서도 함께 지낸적이 있었는데 나는 폐디스토마에 걸려 있었고 혜적스님은 결핵으로 앓고 있었죠. 서로의 아픔을 위로하며 서로 많은 것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내 병세가 악화되어 각혈이 심해져 그당시 하늘에 별따기 였던 진찰권을 하나 얻어 치료를 받게 되었어요. 그것을 혜적스님이 아주 부러워 했는데 그때 선뜻 그 진찰권을 건네지 못했던 것이 지금도 한이 돼요. 그때 내가 그 진찰권을 줬더라면 혜적스님이 더 살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이 들어요. 아까운 도반을 잃지 않았을 것을... 하며 후회를 많이 했습니다.

예전에는 병이 들어도 공부끈을 놓지 않는 납자들이 많았어요. 그 시절에는 변변히 먹지를 못해 병에 걸리기도 했지만 공부를 빨리 이룰려는 욕심이 커서 병을 많이 얻었어요. 은사스님께서는 ‘평상심이 곧 도’라고 늘상 일러 주시며 특별한 것에서 공부를 찾지도 말고 서두르지도 말라고 하셨는데도 왜 그리 마음이 급했는지…. 직녀가 베틀에서 실을 짜듯이 공부하라고 일러주셨는데도 젊은 혈기에 공부 욕심이 너무 많았어요. 참선을 하면 금방이라도 성불을 이룰 것처럼 제방에 다니면서 공부를 했는데 지나치게 욕심을 부리다 병을 얻고는 했죠.

수행자는 무엇보다도 자기가 가는 길, 즉 성불에 대한 믿음을 세우고 결코 쉬지 않으리라는 정신으로 꾸준히 생사를 결단해야 합니다.

경전에 ‘믿음은 도의 근원이요, 공덕의 어머니가 되어 일체의 선법을 길러낸다’고 했습니다. 진각 혜심스님도 확고한 믿음이나 뜻을 세우지 않고 반은 믿고 반은 의심하거나, 반은 나아가고 반은 물러난다면 지혜를 증득하기가 어렵다고 했어요. 출세간의 큰 인물이 되려면 모름지기 척추를 세워 단단한 것은 강철을 녹이고 두들겨서 만들듯이 나약한 마음도 내지 말고 물러설 마음도 내지 않고 진리의 길에 대한 확고한 믿음으로 일체의 시비를 떠나야 합니다.

한때 범어사 주지직도 맡았지만 이렇다 할 무엇을 이룬 것은 없습니다. 다만 열심히 최선을 다했지요. 성격적으로 책임을 맡으면 완수해야 하고 남보다 잘하고 싶은 승부욕이 강해서 개인적으로는 제일 힘들고 어려웠던 시절로 기억됩니다. 그 당시 범어사는 빚도 많았고 중간에 사기꾼들이 끼어들어 절땅을 속여 팔아버려 땅을 많이 잃어 버린 상황이었죠. 그 땅을 되찾아야 겠다는 생각으로 덤비고 보니 10만평 정도의 땅을 되찾는데 피고가 200명이 넘는 어려운 싸움이었습니다.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끝까지 추진해 3만평 정도의 땅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후 좀더 효율적으로 이용하지 못하고 세금만 부당하게 부과되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을 겪었습니다. 또 한 번 삼보를 잃게 된 것이죠.

그리고 또 하나 기억에 남는 것은 부산불교연합회를 창립한 것입니다. 그때 까지만 해도 종단별로 활동을 하는 것 외엔 협의기구가 없었거든요. 가만 생각해보니 불교의 힘을 결집하려면 연합 기구가 하나 필요하겠더라구요. 그래서 종단별로 어른 스님들을 찾아뵙고 인사를 드리고 뜻을 말씀드렸죠. 다른 종단 어른들이 참 기뻐하셨어요. 먼저 찾아 와서 인사를 하는, 하심하는 마음을 기특하게 여기지 않았나 싶어요. 그리고 최종적으로 부산시장에게 종단 책임자와 실무자를 초청해 달라고 부탁을 해 모임을 갖게 되었지요. 부산시장은 자리만 만들고 슬그머니 빠지고 내가 시장님이 우리를 모아 준 것은 불교발전을 위해 연합기구가 하나 필요하지 않겠느냐며 자연스럽게 분위기를 만들었죠. 그래서 참석했던 사람들이 발기인이 되어 부산불교연합회를 창립하게 된 것이죠. 이후 불교의 공동 관심사를 같이 의논하고 힘을 모아 부산시의 불교행사를 같이 치를 수 있어 불교단합에 톡톡히 역할을 하고 있어요.

얼마전 백양사에서 무차선회를 열어 세간의 관심을 끌었지요 그것은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일입니다. 본래 불교자체가 무차대회를 실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은 본래 차별이 없고 모두에게 다 열려 있기 때문이지요. 지식이 많든 적든, 돈이 많든 적든 상관치 않고 모두를 향해 열려 있는 것이죠. 요즘 출가자의 학력을 제한하고 있는데 그것도 엄격히 따지면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제대로 하려면 종단차원에서 학교를 만들어 어릴 때부터 원하는 이들을 교육하고 평가해 승려의 자질을 높여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밖으로 보이는, 고졸이다 대졸이다 하는 학력보다는 인격적인 내면이나 승려로서의 신심이나 각오가 얼마나 깊은 지가 먼저 평가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물질위주의 교육에 물든 이들이 갑자기 승려의 길을 간다고 해서 참다운 스님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지요.

또 어떤 이들은 스님이 되어야만 깨달을수 있는가 하는데 그것도 아닙니다. 정진에는 장소구별이 따로 없고 승가 재가가 따로 없습니다. 영화관이나 자동차 안이더라도, 자신의 내면을 참구하는 힘을 잃지 않는다면 가능한 것입니다. ‘나는 재가자니까 할 수 없다’고 주저앉는 그 마음이 바로 자유로운 본래 마음을 가로막는 것입니다. 스스로 태어났으니 스스로 당당히 걸어갈줄 아는 그것이 바로 참선이고 불법입니다. 일상생활중에서도 ‘나의 불성을 밝히겠다’는 각오로 참구하고 마음을 닦아 나가야 합니다.

우리 절에는 ‘방생회’라고 4백5십여명이 가입한 모임이 하나 있습니다. 방생이라 하면 흔히들 잡은 고기를 놓아주는 것쯤으로 생각하겠지만 전혀 다릅니다. 방생된 삶이란 원융무애한 참다운 삶을 말합니다. 탐진치로 인해 자신이 스스로를 결박하고 있는 것이 우리 현실입니다. 그러므로 탐진치만 없앤다면 스스로를 옭아맨 괴로움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자신이 스스로를 묶고 있고 자신이 자신을 괴롭히고 있는 그것을 푸는 것이 바로 방생이고 해탈입니다. 자신의 마음이 탐욕으로 흐려 있지 않을 때, 노여움으로 끓고 있지 않을 때, 어리석음으로 덮여 있지 않을 때, 무엇이든 있는 그대로 올바로 볼수 있는 상태를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부처님 가르침의 기초가 되는 정견(正見)이며 일체법의 참다운 실상을 아는 지혜를 얻는 길입니다. 그 여실지견(如實之見)을 얻을려면 우선 탐욕, 노여움, 어리석음으로 흩어져 있는 마음을 가다듬고 맑고 고요한 마음가짐을 되찾아야 합니다. 자신의 심성을 밝히면 바로 부처라 했으므로 자기 자신의 탐진치만 방생하면 바로 해탈이 되는 것이죠. 모든 불자들은 스스로를 방생하고 해탈을 얻는 참공부를 하시기 바랍니다.

정리=천미희 기자(mhcheon@buddhapia.co.kr)
강지연 기자 | anitya@buddhapia.com
2003-12-02 오전 11:4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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