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
![]() | ![]() |
이제 완연한 봄입니다. 곧 꽃들이 활짝 필테지요. 자연의 순환이란 참으로 어김이 없습니다. 강원에 있을 때가 생각나곤 합니다. 철원 심원사 강원에 있을 때 방학만 되면 농촌에 나가 밭을 갈아 작물을 심으면서 풍성한 수확을 거두게 해 달라고 빌곤 했었죠. 가뭄 끝에 단비가 얼마나 고마운 존재인지는 가뭄의 고통을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은 잘 모를 겁니다. 이곳 법륜사는 내겐 단비보다 더 큰 은혜를 베풀고 있는 곳이죠. 이곳은 70년동안 중노릇을 무사히 할 수 있게 해주었으니 말입니다.
사실 중노릇이라는게 별거 아니지요. 열심히 공부하고, 부처님 법을 따르면 되는 것이죠. 나는 중이면 중답게 공부나 열심히 해야 한다고 늘 강조해 왔습니다. 글 잘 쓰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이 부럽고, 그림 잘 그리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이 부러웠습니다. 그렇지만 평소 소신대로 공부에만 몰두했지 다른 것은 쳐다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책읽는 것을 빼놓고는 할 줄 아는 게 아무 것도 없어요. 그나마 나이가 드니까 눈이 어두워져 요즘엔 책을 가까이 할 수 없으니 안타깝기만 해요.
우연치 않게 출가해 부처님 공덕으로 85년을 무사히 살아왔음도 다 인연이 닿았기 때문이지요. 태어난 곳은 경북 문경군 농암면 삼송리라는 마을로 지금은 충북 괴산으로 편입되었다고 들었습니다만, 태어나면서부터 병치레를 끼니먹듯 했나봐요.
그때 어떤 이가 이 애는 얼마 살지 못해 죽을 운명이라고 해서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걱정스런 마음으로 인근에 있는 원적사를 찾았다고 해요. 원적사 스님들이 우리 집에 와서 공양도 하고 잠도 자고 하던 때라 그 인연으로 찾았지요. 그랬더니 원적사 석교스님이 출가를 시키면 어떻겠느냐고 권유해 14살 되던 해 원적사에서 머리를 깎았어요. 집안 어른들에 의해 부처님께 귀의하게 된 셈이죠.
30년 금강산 유점사에서 벽산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받고 철원 심원사 화산경원이라는 불교전문강원에서 7년동안 공부를 했습니다. 유점사에 있을 때 벽산스님은 “금강산에서 1년만 살아보면 온 천하의 변화무쌍한 진리를 한 눈에 볼 수 있다”는 말씀을 해주곤 하셨죠. 생각해 보세요. 요즘 세상이 시끄러운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진리를 한 눈에 보지 못하는 탓입니다. 심지어는 무엇이 진리인지도 모르고 사니까 세상이 이 모양이죠. 날씨가 변하듯 세상 역시 잠시도 그대로 머물지 않아요.
진리를 볼 수 있다는 것은 그만한 지혜가 필요하다는 얘깁니다. 우리 정치가들은 어떻습니까. 나라와 국민이 잘되려면 넓고 통달한 지혜를 가진 이가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니까 늘 혼란스럽죠. 유점사에서의 2년여의 수학기간은 세상을 배우고 삶의 경책이 될 수 있는 훌륭한 체험이었습니다.
화산경원에서의 수학은 지금까지 교학에 몰두할 수 있었던 기반이 된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사미과, 사집과, 사교과, 대교과를 차례로 거치면서 세상의 진리가 부처님 말씀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됐으니까요. 그래서인지 선(禪)보다는 교(敎)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됐지요. 중이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부처님 말씀을 읽고 또 읽는 것이라는 확신도 이때 생겼습니다.
경(經)이 무엇입니까. 부처님 되는 길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스님들을 보면 경을 소홀히 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아요. 선(禪)만 해가지고 부처님 말씀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경(經)도 배워야만 부처님 법을 알 수 있습니다. 선을 해서 한소식 한다 해도 경을 모르면 그 깨달음을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경(經)만 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경에 중점을 두었지만 틈틈이 화두를 들고 정진을 했습니다. 지금은 ‘무(無)’자 화두를 들고 있지만 전에는 ‘만법귀일 귀일하처(萬法歸一, 歸一何處)’라는 화두로 좌선에 들곤 했지요.
한국불교는 원래 선교겸수입니다. 교를 철저히 꿰뚫고 나서 그것을 버리고 선을 해야 합니다. 이것을 ‘사교입선(捨敎入禪)’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교(敎)가 서울에서 선암사까지 가는 길을 가장 바르게 가르쳐 주는 것이라면, 선(禪)은 그 지름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고, 교는 부처님의 말씀입니다. 거기에 한가지 더 계(율)가 필요합니다. 계가 없고서는 선(禪)도 교(敎)도 없기 때문이죠.
부처님께서는 ‘사람이 죽어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기 어렵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극락 세계에 가야만 사바세계를 면할 수 있고, 거기에 가야 사람으로 다시 태어날 길이 열리고, 그래야만 다시 한 번 깨달음을 얻기 위해 도를 닦을 수 있는 기회가 열리는 것입니다.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려면 사람의 씨를 잃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죽이지 말고, 도둑질하지 말고, 음행하지 말고, 거짓말하지 말고, 술 마시지 말아야 합니다.
요즘에는 사람이 사람 죽이는 것을 파리 죽이듯 하고 있습니다. 사실 중생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다름아닌 생명입니다. 아무리 사람의 목숨이 존귀함을 잃어가고 있는 세상이라 해도 함부로 다른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행위는 인과를 모르는 어리석은 짓입니다. 또 없으면 없는대로 사는 것이 진리입니다. 도둑질이 얼마나 큰 죄인지 사람들은 모릅니다. 자신의 그림자를 잘 보세요. 꼿꼿이 서 있는데 그림자가 구부러진 것 보았습니까. 인과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것은 자기가 짓고 자기가 받는 것입니다.
유점사와 철원 심원사 등지에서 불교경전을 공부하고는 이곳 법륜사 포교당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법륜사에 계셨던 대륜스님이 “한 달에 20원을 줄테니 1년간 전국을 돌며 훌륭한 스승을 만나 수행을 하고 돌아오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승주 선암사 김포강스님에게 찾아갔습니다.
그때 금산사, 보석사 두 본산이 연합해 전북불교연합강원을 만들었는데 거기서 김포강스님으로부터 교학과 수행을 배웠습니다. 아마도 대륜스님은 내가 경에 몰두하니까 경을 떠나 훌륭한 스승 밑에서 좀 더 여러가지를 배우라는 가르침을 내려 주신 것 같아요.
예전에는 이처럼 학문도 수행도 철저히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엔 결제철이 돼도 나다니는 스님들이 많아요. 옛날엔 결제철이 되면 밖에서 스님들을 구경하기는 하늘의 별따기만큼 어려웠어요. 심지어 내가 있던 금강산 유점사에서는 결제철에 찾아오는 객승에겐 밥도 주지 않았습니다. 결제철만이라도 제대로 수행하는 풍토를 만들어야 하는데 누가 강제로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스님들 스스로, 절에서 그런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만들어야 합니다.
한국불교가 제모습을 잃어간다는 얘기가 많습니다. 스님이 스님노릇 잘한다면 왜 이런 얘기가 나옵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공부를 안하기 때문입니다. 스님이 뭐 그리 바쁘다고 공부를 안합니까. 아니, 스님이 공부말고 할 것이 또 무엇이 있습니까. 그저 사찰하나 짓고 안주하려고 하는 스님들이 많으니까 한국불교가 이렇다 저렇다 말이 많은 겁니다. 부처님께서는 집도 절도 갖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수행하고 공부하는데 그런 것은 필요없다는 가르침입니다.
나는 원래 출가하고부터 선보다는 교를 통해 불법을 펼치겠다는 생각을 해왔습니다. 결국 이런 생각이 내 일생을 전법교화로 보내게 하는 동기가 되긴 했지만 아직도 아쉬움이 많습니다. 부처님 곁에서 70년을 살았는데도 아직 부처님을 닮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아쉬움이 더욱 큽니다. 포교는 대중을 감동시키는데 있습니다.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고 언변이 좋아도 성의와 열의가 없으면 중생을 제도할 수 없습니다. 이 신념이 한 평생 짊어지고 온 화두였습니다. 스님네가 자신의 본분을 잊지 말아야 하듯이 신도들도 자신의 생활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오래전 얘기지만 법륜사에서 포교에 온 힘을 쏟고 있을 때 한 신도가 찾아와 “힘든 일이 너무 많아 죽고 싶다”는 하소연으로 상담을 의뢰해온 적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힘들지 않고 살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는데 왜 어려운 일이 없겠습니까. 죽고 싶을 정도로 괴로운 일도 많고, 편안해지고 싶은 욕구도 일어나고, 쉽게쉽게 살고 싶기도 하겠지요. 하지만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그 괴로움은 자기가 살아 있다는 증거니 오히려 기뻐해야 할 일입니다. 죽은 사람이 힘들고 어려운 것을 어찌 알 수 있습니까. 사람 몸 받고 다시 태어나기가 얼마나 어려운데, 지금 사람으로 태어나 고통스럽다고 해서 괴로워 합니까. 사람으로 살고 있는 것을 소중히 여길줄 안다면 이런 불평은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수행하면서 스승들로부터 늘 경계해야 한다고 가르침을 받았던 것이 있습니까. <능엄경> 서문에 있는 ‘설식기부(設食飢附)’란 말이 그것입니다. 배가 고프면 먹어야 배가 부른데, 배고프다는 말만 하고 먹지 않으면 배가 부르겠습니까. 부처님 법이 아무리 좋다 해도 그 법을 실천에 옮겨야지 말로만 믿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란 얘깁니다.
인간은 본래 몸뚱이를 받은 것 자체가 욕심 덩어리로서 살아가도록 돼 있습니다. 내 눈, 내 아내, 내 나라, 내 절, 내 논, 내 돈… 이런 소유욕이 사람들로 하여금 번뇌를 쌓게 하고 그래서 세상이 살기 힘들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심에서 비롯되는 것이지요.
물질문명이 발달한 현시대에서 소유욕을 버리라고 한다면 부처님 법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은 미친소리라고 할 것입니다.
최고의 보시는 모두 주되, 아무 조건없이 주는 것입니다. 다 갖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모두 다 주겠다는 생각으로 살아보세요. 세상 살기가 왜 힘들겠습니까. 세상살이가 왜 괴롭겠습니까.
85년을 살다보니 백년도 잠깐이라는 말이 정말 실감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작은 물줄기라도 쉼없이 흐르면 바위를 뚫는다”고 하셨습니다.
또 “아무리 좋은 약이라도 복용하고 안하고는 병자의 마음에 달려 있다”고도 하셨습니다. 진리를 보지 못하고 방편에 끄달려 세상을 살다 보면 허송세월만 하게 됩니다. 그러나 외곬으로 진실되게 매달려 세상을 살다보면 깨달음을 얻게 되고 곧 부처가 될 수 있습니다. 진실을 작은 물줄기에 비유해 보세요. 모든 것을 다 얻을 수 있습니다. 부처님 중도사상에 의지해 살면 옹달샘처럼 삶의 보람이 샘솟습니다.
불교는 본시 마음쓰는 법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천년만년 살 것도 아니요, 천년만년을 산다해도 그것이 잠시 잠깐인데 마음을 함부로 써서야 되겠습니까. 사는 동안 올곧게 사는 것이 곧 부처님 법을 따르는 길입니다. 우리는 누구에게나 이러한 행을 이룰 수 있는 성품과 능력이 있습니다. 다만 믿음이 약하고 그 믿음을 실천하지 않기 때문에 지혜가 모자라 어려운 것입니다. 마음이 얕은 사람은 진리를 보기가 어렵고 또 그 진리를 본다해도 잘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몸으로 살려고 하지 말고 혼으로 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보람있고 뜻있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평생 허상속에서 허우적거리다 ‘인간의 씨앗’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요즘 양이 복제되고, 그래서 인간이 복제될 날도 머지 않았다고 떠들썩합니다. 그렇지만 인간을 똑같은 모습으로 복제할 수는 있어도, 생명에너지인 혼까지 복제할 수는 없습니다. 과학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과신하는 세상이라도 혼, 즉 사람의 마음을 복제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의 혼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생명의 본체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바로 그 혼의 생명에너지를 모아 부처님 법을 따라 보세요. 부처와 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오래 살아서인지 사람들은 나에게 보람차게 삶을 사는 방법을 묻곤합니다. 그럴때마다 나는 주저없이 부처님의 중도정신에 입각해 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사람들은 나를 원로라 부릅니다. 그러나 이제 막 입문한 행자들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똑같이 계를 지키고, 똑같이 정진해야 합니다. 대중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처님의 마지막 가르침이 “끊임없이 정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모두가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열심히 부처님 말씀대로 정진할 때 이 세상이 불국토가 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