平常心是道
道不用修니 但莫汚染하라. 何爲汚染인가. 但有生死心으로 造作趣向함이 皆是汚染이니라. 若欲直會其道인가. 平常心是道니라. 何爲平常心인가. 無造作이며 無是非며 無取捨며 無斷常이며 生凡無聖이니라. 經云하사대 非凡夫行하고 非聖賢行이 是菩薩行이라 하느니라.
도란 닦아 익힐 필요가 없다. 오직 더러움에 물들지 않으면 된다. 어떤 것이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 것인가. 나고 죽는다는 생각을 염두에 두고 일부러 별난 짓을 벌이는 것을 가리켜 더러움에 물든 것이라 한다. 단번에 도를 이루고자 하는가. 평상의 이 마음이 도인 것을 알라. 평상의 마음이란 어떤 것인가. 짐짓 꾸미지 않고, 이러니 저러니 가치 판단을 하지 않으며, 마음에 드는 것만을 좋아하지 않고, 단견과 상견을 버리며, 평상하다느니 성스럽다느니 하는 생각과 멀리 떨어져 있는 그런 마음이다. 경에서도 이르기를 ‘범부처럼 행세하지도 않고 성인처럼 행세하지도 않는 것이 바로 보살행’이라 한다고 했다.
이 말씀은 마조 대사가 어느 날 대중들에게 내린 상당법문이다.
마조 대사의 법문을 요약하면 도 닦을 생각을 하지 말고 평상의 마음을 유지하면 된다는 것이니 이 말을 주의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평상심이란 글자 그대로 보통의 마음, 예사의 마음이란 뜻이니 인간이라면 누구나 현재 그렇게 하고 있는 소박한 마음을 말한다. 이 마음은 조작(造作)과 시비(是非)와 취사(取捨)와 단상(斷常)과 범성(凡聖) 등 일체의 차별적이고 분별적인 작위성이 없는 근원적인 마음이다. 이 마음은 누구라도 본래 구족하고 있는 자성청정심이니 일상에서 이 마음을 유지하면 그것이 바로 도라는 것이다. 마조 화상은 이 평상의 마음이 곧 부처라 했으니 저 유명한 즉심시불(卽心是佛)이란 말이 바로 이것이다.
평상심이 곧 도라는 가르침은 마조 화상이 선(禪)을 특수한 것으로 말하지 않고 인간의 구체적인 일상생활에서 실천할 것을 가르친 것이다. 그리하여 마조 화상의 제자들은 늘 평상심을 일상생활 속에서 구현하기 위해 노력했으니 이를 짐작케 하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얘기가 있다.
마조 화상의 제자 가운데 남천보원(南泉普願)이라는 선사가 있었다. 하루는 그에게 아직 초학자였던 조주종심이 찾아와 이렇게 물었다.
“어떤 것이 도입니까”
그러자 남전 선사는 스승의 가풍대로 일어주었다.
“평상의 마음이 곧 도이니라”
“그렇습니까? 그러면 이 평상의 마음을 어떻게 이끌고 가면 되겠습니까?”
“어떤 방법이나 방향을 미리 정하고 나가는 것은 도에 어긋나느니라.”
“그렇지만 방향을 모르고서 어떻게 도를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화상은 이렇게 일러주었다.
“도는 아는 것에도 속하지 않고 또한 모르는 것에도 속하지 않느니라. 알았다고 하면 그것은 곧 망상이요. 몰랐다고 하면 그것은 바보라 할 것이니라. 참다운 도는 허공과 같거늘 어찌 굳이 시비할 것이 있겠느냐.”
이 말에 조주는 크게 깨달았다고 한다. 이것이 선가에서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라는 법문이 유행하게 된 인연이거니와 사실은 이 법문을 앞서 제창한 사람은 앞의 법문에서 보다시피 남전 선사의 스승인 마조 화상이시다. 마조 화상은 제자들을 가르칠 때 자주 평상심을 강조했는데 이는 저 유명한 즉심시불과 함께 화상이 보여 주신 자비로운 감로법문이다.
노자(老子)는 말하기를 ‘도를 도라고 말한다면 이미 도가 아니다(道可道非常道)’라고 했다. 왜 그런가 하면 도는 그야말로 평상의 상태 그대로인데 이마 도라고 했으니 도의 참뜻이 왜곡됐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떤 것이 도인가.
옛날 주무숙(周茂淑)이란 사람이 불인요원(佛印了元) 선사를 찾아가 같은 질문을 했다. 그랬더니 불인 선사는 이렇게 대답했다.
“눈앞에 보이는 산과 들이 모두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지 않은가. 이것이 바로 도의 모습이다.”
주무숙은 그래도 잘 모르겠다고 더 자세히 가르쳐 달라고 했다.
이에 선사는 그 자리에서 손뼉을 크게 치며 웃었다. 그때서야 그는 불인 선사가 말한 참뜻을 알았다고 한다. 그러면 주무숙이 깨달은 도란 어떤 것인가. 눈앞에 보이는 산과 들을 있는 그대로 보는 분별없고 차별없는 청정 본연의 마음이 곧 부처요 도라는 것이다.
사실 선이란 한마디로 말하면 인간이라면 누구나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일상의 마음, 즉 분별과 차별 이전의 자성청정심을 회복하기 위한 것에 다름 아니다. 수많은 선사들은 이것을 일깨우기 위해 종종의 방편으로 설법한 것이니 평상심을 주제로 한 선법문이 많은 것은 이 때문이다. 다음 몇 가지 선화(禪話)도 같은 맥락이다.
옛날 어떤 납자가 경잠(景岑) 선사에게 이렇게 물었다.
“평상심이 도라 했으니 우리는 어떻게 마음을 쓰면 되겠습니까?”
선사의 대답은 이러했다.
“배고프면 밥 먹고, 졸리면 잠자는 것이다. 이것 외에 따로 도가 있는 것이 아니다.”
“잘 모르겠습니다. 더 자세히 일러주십시오.”
“더울 때는 부채질하고 추울 때는 화로를 가까이 하라.”
유명한 재가거사인 이고라는 사람이 약산유엄(藥山惟儼)선사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도입니까?”
선사는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면서 물었다.
“알았는가?”
그가 모른다고 하자 선사는 이렇게 일어주었다.
“구름은 푸른 하늘에 있고 물은 물병 속에 있느니라(雲在靑天水在甁).”
이 가르침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도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나 충만해 있어서 온 우주가 바로 도 그 자체라는 것이다. 사실 도란 일상성을 떠나 특별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진리가 현실을 떠나 구름 위나 땅 속에 숨어 있다면 그것은 우리와 아무 상관도 없는 것이다. 우리와 상관 있는 것은 일상성 속에 그대로 드러나는 진리다. 가만히 살펴보면 자연처럼 위대한 도도없다. 만약 물이 거꾸로 흐르거나 여름에 눈이 내린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세상은 큰 난리가 날 것이다. 그것은 도가 아니다. 도란 바로 천지만물이 걸어가는 길이다.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르고 봄이 오면 꽃이 피고 새가 우는 것이다.
花開滿樹紅
花落萬枝空
唯餘一朶在
明日定隨風
꽃이 피니 가지마다 붉은 색이요.
꽃이 지니 가지마다 빈 허공이네.
꽃 한송이 가지 끝에 남아 있으나
내일이면 바람따라 어디론가 가리라.
당나라 때의 지현후각(知玄後覺)이라는 스님이 남긴 개송이거니와 여기에서 일상성의 도리를 알아챈다면 그의 공부는 한참 익은 것이라 하리라. 평상의 마음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평상심이란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는 일상성 속에 내재해 있음을 잊지 말기를 바라노라.
一上月下
山深水寒
해가 뜨면 달이 지고
산이 깊으니 물이 차도다.
불교지도자의 덕목 열 가지
옛말에 옥불탁(玉不琢)이면 불성기(不成器)요 인불학(人不學)이면 부지도(不知道라 했다. ‘옥은 다듬지 않으면 그릇을 이루지 못하고 사람은 배우지 않으면 도를 이루지 못한다’는 뜻이다. 나는 젊은 나이에 큰 뜻을 두고 출가했으나 그럭저럭 세월만 보내다가 뒤늦게야 겨우 이 말의 참뜻을 알게 되었다. 일찍이 중국 고소(姑蘇:지금의 강소성) 경덕사에 있던 법운천서(法雲天瑞) 화상도 늘그막에 심경이 나와 같았던지 ‘무학십문(務學十門)’이라는 글을 지어 후학들을 경책한 적이 있다. 읽어 볼수록 그 뜻이 간절하고 솔직하니 공부하는 사람은 큰 참고가 될 것이다. 또 여러분처럼 대학교수로서 남을 가르치는 사람도 어떻게 공부하고 가르칠 것인지를 제시하는 내용이니 다음의 열 가지를 새겨들었으면 한다.
첫째는 불수학(不修學)이면 무이성(無以成)이라, 계정혜 삼학을 널리 닦지 않으면 보리를 이룰 수 없다고 했다.
<열반경>에 이르시되 “무릇 마음이 있는 자는 다 마땅히 무상정등각을 이룬다(凡有心者 富得無上正等覺)”고 했다. 이 말은 모든 중생이 다 불성(佛性)이 있는 까닭에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이 불성이란 항상 빛나고 고요한 것이니 있다고는 하나 형상도 없고 이름도 없고 그러면서도 영통한 것이다. 그러나 많은 중생들은 스스로 어리석어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윤회의 삶을 거듭한다. 이를 아신 부처님이 중생을 불쌍히 여겨 해탈의 길을 열어 놓으셨으니 그것이 바로 계정혜(戒定慧) 삼학이다. 계정혜란 바른 행동으로 마음을 고요히 하여 참다운 지혜를 터득하는 공부이다. 불교에 많은 수행차제가 있으나 결국은 이 삼학으로 귀속된다. 따라서 누구든지 만약 능히 부처님의 말씀을 쫓아 배우기를 열심히 한다면 무명의 구름을 걷어내고 본래 청정한 자기 부처를 볼 수 있으리라. 그러므로 불도를 배우는 사람은 반드시 삼학을 닦아 보리를 성취해야 한다.
둘째는 부절아(不折我)이면 무이학(無以學)이라, 나를 꺽지 못하면 도를 배울수 없다고 했다.
<화엄경>에 “범부는 무지하여 자기에 집착한다(凡夫無智 執着於\我).”는 말이 있다. 또 <법화경>에는 “아만 때문에 스스로 높은 척하며, 아첨을 좋아하니 마음이 굽어 참되지 못하다(我○自○高 ○曲心不實).”는 말이 있다. 우리 중생은 이 몸이 오온(五蘊)으로 이루어진 허망한 거짓의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진짜 자기의 실체라고 고집한다. 그래서 지혜가 부족함에도 교만을 더욱 높이고, 선을 보고도 따르지 아니하고, 스승의 가르침이나 타이름도 받지 아니한다. 경의 말씀은 이것을 꾸짖는 것이니 공부하는 사람은 모름지기 ‘나(我)’라는 마음을 꺽고 공손하며 뜻을 굽히고 어른을 공경하라는 가르침이다. 옛날 구마라집(鳩摩羅什)이 처음 불교를 공부할 때는 스승인 반두달다(盤頭達多) 화상에게 정례하고 공경하였다. 그러나 뒷날 구마라집이 대법을 성취하자 스승인 반두달다는 오히려 제자인 구마라집에게 정례하였다는 고사가 있다. 이것은 도를 공부하는 사람은 참다운 가르침을 베푸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든 교만을 꺾고 배워야 한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옛말에 이르기를 경이무실(敬而無失)이라 ‘공경하면 잃을 것이 없다’고 했다.
셋째는 불택사(不擇師)면무이법(無以法)이라, 좋은 스승을 택하지 않으면 법을 받을 것이 없다고 했다.
새도 날개를 접고 쉬려고 할때는 반드시 숲을 가린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법을 배우려는 사람은 스승을 가려야 한다. 스승은 배우는 사람의 모범이다. 스승에는 둘이 있으니 하나는 지혜가 깊고 행업이 훌륭한 사람이요, 또 하나는 비록 아는 것은 많으나 행업이 따르지 못하는 사람이다. 만약 도 닦는 사람이 스승의 이름만 믿고 따르다 보면 평생토록 황당한 일을 당할 것이다. 특히 요사이는 스승의 자격이 없는 사람이 스승의 행세를 하는 사람이 적지 않으니 조심할 일이다.
넷째는 불습송(不習誦)이면 무이기(無以記)라, 외워서 익히지 아니하면 기억할 수 없다고 했다.
모든 착한 말은 읽고 외워서 기억해 두는 것이 좋다. 역대로 훌륭한 도인들은 옛스승들이 남긴 좋은 말씀을 자주 읽고 외워서 기억했다. 무슨 연고인가. 그 말씀을 가슴에 새겨 두면 행실이 산란하지 않고 침착해지기 때문이다. 종종 참선 수좌들은 불립문자(不立文字)라 하여 좋은 글을 외우는 것을 두고 어리석은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이는 불립문자의 참뜻을 모르는 사람이니 선(禪)에서 불립문자라 함은 문자에 얽매이지 말라는 뜻이지 문자로 표현된 가르침까지를 외면하라는 뜻은 아니다. 역대조사가 문자에 의지해 설법하고 그 어록이 전해져 오고 있으니 그 이치를 잘 생각해야 한다.
다섯째는 불공서(不工書)면 무이전(無以傳)이라, 쓰지 않으면 전할 수 없다고 했다.
무엇을 쓴다는 것은 사람의 뜻을 사실과 같이 전하기 위해서다. 부처님의 가르침도 경전이 없었으면 전해지지 않았을 것이요, 조사의 가르침도 어록이 없었으면 배울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뒷날 사람을 가르쳐서 도풍(道風)을 오래도록 남기고자 한다면 공부의 요결을 남기는 일을 소홀히 하면 안된다. 고려청자의 제작비법을 혼자만 알고 후세에 전해주지 않는 것은 사회적으로 생각하면 여간 큰 손실이 아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가지 유의할 일은 오직 진실을 전하여 후세 사람에게 도움을 주기위해 애를 쓸지언정 이름을 남기기 위해 억지로 모양을 꾸미는 일은 본분과는 거리가 있으니 조심할 일이다. 이름을 남기려고 바위에 이름을 새기는 짓은 천박한 일이다.
여섯째는 불학시(不學詩)면 무이언(無以言)이라, 시를 배우지 아니하면 말을 할 줄 모른다고 했다.
새를 배운다는 것은 옛사람이 남긴 게송을 자주 읽고 외워서 그 뜻을 통달하는 것이다. 게송에는 천마디의 말이 한마디로 함축되어 있어서 옛사람의 경지를 짐작케 한다. 이러한 게송을 많이 알고 있으면 말이 난초 향기와 같이 기품이 있게 된다. 도를 배우는 사람은 이를 귀찮고 번거롭게 여겨 소홀하나 두고보라. 젊어서 게송을 많이 읽지 아니하면 뒷날 반드시 후회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제방에서 한 산중을 다스리는 노화상치고 시서(詩書)에 능하지 않은 사람이 없음을 왜 모르는가.
이와 관련해 특별히 여러분에게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다. 여기 오신 교수 가운데 시 한편 외우고 있는 사람 있으면 손 들어 보라. 김소월이나 한용운이나 윤동주나 아니면 누구라도 좋으니 외우는 시가 있는가? 한 사람도 없다니 실망이다. 매 학기마다 강의 시작하기 전에 마음에 남은 시 한 편을 학생들에게 외워 주어 보라. 얼마나 멋진 일인가.
일곱째는 비박람(非博覽)이면 무이거(無以據)라. 널리 보지 않으면 전거를 댈 수 없다고 했다.
뒷날 공부하는 사람은 반드시 거울이 있어야 비춰볼 수 있다. 불조(佛祖)의 말씀에는 다 근거가 있으니 그것을 모르면 들어도 알 수 없고 말하고자 해도 더듬게 된다. 그래서 <고승전>에서도 이르기를 “널리 보지 아니하면 말이 의거할 바가 없다.”고 했다. 그러므로 삼장교해(三藏敎海)에 걸림이 없도록 널리 열람하여 거짓됨이 없도록 해야 한다. 불교의 진리가 비록 훌륭하기는 하나 어떻게 휼륭한지를 말하려면 동서고금의 철학과 사상에 비교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이는 요컨대 무식하면 안된다는 뜻이니 특히 수많은 정보가 공개된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는 유념할 일이다.
여덟째는 불역사면 무이식이라, 일을 겪지 아니하면 아는 것이 없다고 했다.
이는 가급적 많은 경험을 쌓으라는 것이니 요즘으로 말하면 세상 돌아가는 사정이나 문물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출가자에게 이것이 어째서 중요한가. 출가자는 삼계를 이끄는 도사요 불조를 대신하는 스승이다. 남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방편이 필요하니 쉽게 말하면 신세대 불자를 가르치기 위해서는 컴퓨터니 인터넷이니 하는 것을 모르고서는 안된다. 수행자가 언제 이런 것까지 다하고 공부를 하느냐고 하면 이는 게으른 것이다. 부처님이 천백억 화신으로 중생을 제도하듯이 축구나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과는 운동을 주제로 가르침을 펴고 노래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그가 좋아하는 것으로 방편을 삼아야 한다. 이렇게 다방면으로 깨우쳐야 한다.
아홉째는 불구우면 무이성이라, 벗을 구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고 했다.
옛말에 이르기를 ‘나를 나은 것은 부모요 나를 성공하게 하는 것은 벗’이라 했다. 부처님도 말하기를 ‘좋은 벗과 사귀는 것은 수행의 절반이 아니라 전부’라고 했다. 이는 벗의 소중함을 단적으로 일깨운 말씀들이다. 예로부터 왜 이렇게 벗이 중요하다고 했겠는가. 두말할 것도 없이 벗이란 같은 것을 좋아하고 도리를 논하고 인격을 탁마해 주기 때문이다. 실로 사람은 누구나 벗에 의해 그 인간됨이 완성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어떤 일을 하든지 성공을 하려면 반드시 좋은 벗을 사귀기에 힘써야 한다. 옛날부터 도 닦는 사람이 좋은 도반을 스승으로 여긴 것도 다 이런 까닭이다.
열째는 불관심이면 무이통이라, 마음을 관하지 않으면 도를 통할 수 없다고 했다.
<화엄경>에 “심여공화사하야 조종종오음하나니 일체세간중이 무불종심조”라는 말씀이 있다. ‘마음은 그림을 그리는 화가와 같아서 여러 가지 오음을 만드나니 일체 세간이 마음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는 것이없다’는 것이다. 실로 모든 일은 마음에서부터 시작된다. 큰 빌딩을 짓는 것도 그렇게 하려는 마음을 내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그러므로 이 마음으로 어떤 그림을 그리느냐가 중요하다. 미운 그림을 그리면 미운 모양이 나오고 아름다운 모양을 그리면 마음이 그린 그대로 나온다. 이 마음의 속성을 바로 관하고 바로 안다면 안되는 일이 없다. 해탈을 이루는 것도 마음에 의해서다. 세상이 청정해지는 것도 마음이 먼저 청정해야 한다. 따라서 불교를 믿는 사람은 마음을 관하고 다스리는 일에 게으르지 말아야 한다.
이상이 ‘법운화상무학십문’의 가르침이거니와 여러분이 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교수로서나 또는 불교지도자로서 역할을 하자면 여기에만 충실하면 된다. 끝으로 오늘 절에 온 기념으로 옛스님이 지은 게송 한 가지를 일러줄 테니 마음이 심란할 때는 가끔 한 번씩 외워 보라.
是非窟裏莫回頭
聲利門前高着眼
但於自己覓慾尤
肯與時流較長短
시비굴 속으로 머리를 돌리지 말고
명리의 문 앞에서는 눈을 높이 뜨라.
다만 자신에게서 허물을 찾을지언정
어찌 시류와 더불어 장단을 비교하랴.
출처=정대선사 법어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