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청화 스님과 속가로는 같은 집안이지만 ‘스님은 깨침을 얻어 부처이고 본인은 아직 중생’이라는 의미였는지 스님은 그대로 생불(生佛)이었음을 강조한다.
45년 전, 정신안 보살이 어느 토굴에서 청화스님을 처음 친견했을 때 누가 말하지 않아도 ‘참으로 큰스님을 뵙는구나’하는 환희심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고 한다.
“스님이 세수로 35세 때였을 겁니다. 대흥사 진불암에서 8분의 스님과 함께 정진하시는데 그 모습만 뵈어도 모두들 신심이 절로 일었습니다. 어느날 대흥사 주지스님이 청화스님에게 대흥사를 맡아달라고 했습니다. 스님은 그날 밤 뒷산을 넘어 토굴로 들어가 버리셨습니다.”
전국 제방의 선방을 다니시며 한번도 주지를 맡지 않으셨던 청화스님이셨다.
정신안 보살은 스님은 한곳에 오래 머무르지 않고 정진하셨다고 말한다. 다른 곳으로 옮길 때는 커다란 바랑에 책만 가득 담겨있었다고 회고한다.
속인들은 상상을 초월한 청화스님의 수행에 궁금함이 많다.
“스님이 속가에 내려오시면 집에서 모시곤 했습니다. 눕지 않고 공부하신 것은 알지만 그래도 안타까워서 방 한편에 이부자리를 놓아두었죠. 그러나 다음날 아침에 보면 손도 대지 않은 채 그대로였습니다.” 청화스님의 장좌불와에 대한 정신안 보살의 설명이다.
한번은 월출산 토굴에서 스님이 혼자 생식하며 정진할 때였다고 한다. 생식가루 3되를 가지고 정진을 시작하였는데 100일후에 올라가보니 한 되 가량 줄고 두 되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생식가루 1되로 석달을 난 것이다. 또 어느 땐가는 일종식으로 앉으면 굽어지는 허리를 펴기위해 포대로 기둥에 허리를 묶고 참선하셨다. 아직도 정신안 보살 기억에 생생한 생전의 큰스님 모습들이다.
이렇듯 목숨 건 정진을 하던 중 지금부터 20여 년 전, 태안사에서 청화스님이 대중을 대상으로 법회를 시작할 때 정신안 보살은 한없이 눈물이 나왔다. 스님이 “어찌하여 그리도 눈물을 흘리냐”기에 “스님은 이렇게 중생들을 교화하시려고 그리도 피나는 공부를 하셨는데 저희는 게을러 스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못하고 괴롭혀드려 참회합니다”고 말했다. 실제로는 중생들을 하나라도 더 깨닫도록 하기위한 스님의 한없는 자비심에 감사하는 눈물이었다.
생전의 청화스님은 겸손했다. 어느 누구에게나 경어를 썼고 문밖에까지 나와 배웅했다.
청화스님을 추모하는 불자들이 수없이 찾아드는 신도회 사무실. 이것저것 잔일도 많건만 팔순의 정신안 보살은 귀찮아 하지 않고 불자들을 손수 맞이하며 환한 미소를 잃지 않는다.
마치 청화스님이 그러하셨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