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9. 7.27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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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화 스님 법문 2
【수행한담】美서 3년만에 귀국 청화스님 특별법회

-“계율 제대로 지키면 나도 이웃도 편해져”-
-“相을 떠난 도업 쌓으면 대자유의 길 열려”-

성자는 만물을 한생명으로 보고
중생은 천차만별로 나누어 생각


40년 장좌불와로 정진해오며 소탈한 대선지식의 면모를 보여주셨던 청화스님(76). 지난 95년 출국해 미국에서의 3년결사를 마친 스님은 3년만인 9일 일시 귀국했다. 청화스님은 부처님 오신날을 앞두고, 열화와 같은 불자들의 청을 받아들여 광주 성륜사(12일), 청평 반야사(14일), 변산 실상사(25일), 강릉 성원사(28일) 등에서 법문했다.

14일 반야사에서는 먼길도 마다않고 모여든 전국의 불자들이 오랜만에 듣는 감로수같은 스님의 가르침에 귀를 귀울였다. 청화스님의 이날 법문을 요약해 지상중계한다. 스님은 순회 법회를 마치고, 30일 미국으로 다시 출국한다. <편집자 주>

불교를 말할 때 우리는 그 교리가 주로 한문으로만 표현되고, 내용도 이래저래 갈래가 많아서 굉장히 난해하고 어려워 들어가기가 어렵다고들 합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불문에 몸담아 온 나는 불교가 어렵다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부처님 법의 요체는 불자 여러분들이 대체로 아는 바와 같이 청정한 계율, 참선염불하는 선정과 또 인간의 본질과 우주만유의 근본성품인 본체를 아는 지혜, 이 세가지입니다. 이 세가지야말로 우리 마음과 몸을 편하게 하고, 사람 사람과의 관계나 모든 것을 순탄하게 합니다.

우리 인간이 지켜야 할 도덕률 가운데 부처님이 설하신 계율같이 합리적인 것은 없습니다. 계율은 우리사회생활에서 꼭 지켜야 할 우주의 질서입니다. 유교의 인의예지신이나,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십계명, 그러한 세계 종교의 우수한 도덕률도 다 불교의 계율에 들어 있습니다.

계율만 제대로 지키면 자연적으로 우리의 마음도 편해지고 주위도 편해집니다. 우리가 참선 염불을 해서 깊은 명상에 들어가려 하더라도 계율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명상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흉내만 낼 뿐이지 마음이 정화가 안됩니다. 명상이라는 것은 마음의 정화를 도모하는 것인데 계율이 밑받침 안되면 명상을 해서 이루는 마음정화는 올 수가 없지요.

참다운 지혜는 반야의 지혜입니다. 세속적인 분별지혜, 차별적인 지혜, 이런 것은 우리 인간 의식의 범위 내에서 분별하는 것이지, 초월적인 모든 존재 본질의 지혜는 못 됩니다. 따라서 좀 재주가 있고, 학문적인 수련이 깊어서 분별적인 지혜는 어느 정도 익힌다 하더라도 이른바 분별을 떠난 현상적인 문제라든가 초월적인 문제를 통틀어서 제일의 것은 부처님께서 설하신 반야바라밀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이른바 무위법입니다. 또는 무루법이라고도 합니다. 무위법은 인연사이의 모양이 아닌 그 모양을 지양한 생명자체의 가르침입니다. 이러한 것을 다른 종교의 교조가 전혀 모른 것은 아니라 할 지라도 부처님처럼 명확히 구분을 하지는 못했습니다.

가령 우리가 어느 누구에게 물질이라든가 여러가지 것을 보시도 하고, 봉사활동을 한다고 합시다. 하지만 유위법의 범위내에서는 나라는 관념과 너라는 관념을 떠날 수가 없고, 내가 물질을 많이 보시한다 적게 보시한다는 그러한 상을 떠날 수가 없습니다.

해탈이라는 불교의 궁극적인 도리, 동시에 우리인간의 본래적인 도리에 대해서는 상당히 미흡합니다. 상을 떠나는 행위 이것은 그 생각으로나 행위로나 참다운 자유를 보장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재물을 보시한다 하더라도 상을 떠나서 행해야 그것이 도업이 됩니다.

우리 불자들은 도업과 세간에서 착한 일을 해서 쌓는 선업에 대한 개념을 알아야 합니다. 중생이 하는 것은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선업입니다. 욕계, 천상, 무색계와 같은 곳에 가는 것은 선업으로 가능합니다. 그러나 선업만으로는 우리의 번뇌를 모조리 소멸시켜서 영생해탈로 나아가게 할 수 없습니다.

욕계를 초월하고, 색계를 초월하고, 또 무색계를 초월하고, 천상도 다 초월해서 정말로 대 자유인, 참다운 자기인 대아, 진아의 존재까지 올라가기 위해서는 도업을 쌓아야 합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참다운 해탈을 이루는데 있습니다. 그러나 해탈은 커녕, 아직 선업도 못 닦은 이가 많은 것을 볼때 어림도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렇더라도 절대로 비관할 것이 없습니다.

비록 우리가 지금 세속적인 생활을 하고 있고, 인간의 몸으로 욕계의 굴레 가운데 있더라도 우리의 불성 자체는 조금도 오염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석가모니 부처님이나 달마대사와 같은 도인들과 비교하더라도 우리 마음자리만은 조금도 차이가 없습니다. 똑같습니다.

불지에 오른 유마거사의 말씀을 모은 <유마경> 가운데 입불이법문(入不二法門)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부처님 상수제자인 사리불 목건련을 위시해서 32 아라한에게 유마거사가 설한 법문입니다.

둘이 아닌 그런 수승한 법에 들어가는 법문입니다. 그것은 모든 존재가 둘이나 셋이나 이원론도 삼원론도 아니고 오직 일원론이라는 말입니다. 일원론은 나나 너나 달마 석가 우리 모두가 본체에 있어서는 아무 차이도 없다는 것이지요. 다만 현상에서 차이가 날 뿐입니다.

아니 나같은 중생과 대자대비하신 부처님이 왜 차이가 없다는 것일까 하고 의심을 품는 분도 계시겠지요. 차이가 있는 모양에서 의심을 품을 수는 있습니다. 불교말로 구체화하면 나라는 상, 너라는 상, 또는 중생이라는 상, 또는 우리 수명이나 시간이 짧다고 하는 상을 다 떠나버린 경지에서 본다고 할 것 같으면 조금도 차이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상을 어떻게 여읠 것인가. 상을 여의는 법문이 바로 유마거사의 입불이법문입니다. 천지우주 모두가 다 하나라는 것입니다. 중생과 성자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성자는 모든 것을 하나의 생명으로 보는데, 중생들은 천차만별로, 모든 것을 업장이라는 안경을 쓰고 본다는데 있습니다. 따라서 중생은 평생 분별합니다.

요즘같이 정보가 홍수처럼 몰려들때는 상당히 편리한 점도 있으나, 우리 불자들의 수행에는 걸림이 많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복잡한데, 정보화시대의 정보라는 것이 얼마나 무시무시합니까. 컴퓨터는 문명의 이기임에는 틀림없어 물질적인 편리함을 줄 수는 있어도, 우리 생명 자체에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인류가 차근차근 발전되어 간다고 사람들이 말을 합니다. 사는 모양은 좀 발달돼 가겠지요. 그러나 정작 우리 마음으로 봐서는 발달은 커녕 점점 퇴화한다고 봐야 합니다. 50억 인구가 사는 이 지구상에 참다운 성자가 몇이나 있을 것인가? 하고 생각할 때 참으로 한심스럽습니다.

불자들은 겉을 꾸미는 데 집착하지 말고, 속절있게 모든 일을 해야 합니다. 상에 끄달려 행하는 모든 것은 부처님 법을 자기 것으로 하는데 전혀 도움이 안됩니다. 이른바 상을 떠나버린 모두를 하나의 생명으로 본다는 것은 그냥 하나의 생명으로 본다는 것이 아니라 우주만유의 본체인 불심(佛心)을 깨닫는 것을 뜻합니다.

상으로 보아서는 제아무리 많은 현상이 있다고 하더라도 근본 자리에서는 모두가 다 하나입니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근본자리와 현상의 것을 물과 물결의 비유로 설명합니다. 근본자리는 물에, 현상적인 문제는 바람따라 일어나는 파도에 빗댄 것입니다. 우리는 본질을 보지 못한채 업장의 현상만 볼 뿐 나의 본질도 너의 본질도 못보고, 만유의 본질을 보지 못합니다.

우리 인간뿐 아니라 식물 동물 모든 두두물물의 본바탕이 바로 불심이고, 일체존재의 본질이기에 불성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법성, 실상, 도, 열반, 여래장 등도 같은 뜻입니다. 표현은 비록 다르더라도 근본은 똑같습니다. 모두가 하나라는 것은 불심 자리 불성자리에서 하나라는 것입니다.

성자는 그 자리가 하나된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 중생은 아직 그자리가 보이지도 않습니다. 다행히 우리에게는 부처님같은 성자들의 가르침이 있기에 마음의 본질이 불심임을 믿음으로 아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한국은 여러모로 어려운 시기에 처해 있습니다. 고민도 많이 하고, 더러는 비극적인 일들도 많이 생깁니다. 나 또한 참 마음이 아픕니다. 특히 미국에 있으면서 한국에서 보시를 해주신 그런 분들에게는 더욱 더 가슴 아프고, 죄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원인이 어디 있는 걸까요.

경제학자, 철학자들이 나름대로 분석을 내놓겠지만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사람이 자기의 본바탕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 가도 알 턱이 없습니다. 세속적인 말로 철학의 빈곤입니다. 철학이 없습니다. 칸트, 니체 이런 것에 박식하다고 철학이 아닙니다. 일체 존재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 철학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불경을 통달할 정도로 외우더라도 그 본질 자리를 알지 못하면 소용이 없습니다.

요즘 나라경제나 개인경제나 모두 거품을 걷으라고들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중생 모두가 거품을 가지고 삽니다. 아무리 금붙이를 많이 지녔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림자에 그림자를 붙인 것입니다. 마음찾기에는 하등 도움이 안됩니다. 일체 물질이 사실은 텅텅 빈 것입니다. 반야심경에 왜 ‘색즉시공’ 이라 했을까요. 물질 그대로가 공이기 때문입니다.

과학자같이 물질을 분석해서 아는 것이 아닙니다. 당체즉공이고, 삼계유심이라. 중생이 생사윤회하는 모든 세계인 삼계에 오직 마음뿐이란 말입니다. 마음이란 것은 순수 생명입니다. 순수 생명외에 다른 것은 모두가 헛것이라는 겁니다. 금강경에서 말하는 도리가 모두 이런 도립니다.

초월적인 본래의 자리에 가지 않고서는 절대로 해탈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부처님께서는 일체법이 모두 공이라고 설했습니다. 중생이 보는 모든 것은 꿈이요, 허깨비요, 그림자요, 또는 아지랑이라고 말씀하셨지요. 이렇게 말씀을 드려도 여러분은 여실히 이해가 안 갈 것입니다.

내 몸뚱이가 모두 비었거니, 내 집이나 재산도 내 것이 아니라 잠시 내가 맡아있을 뿐이라고 생각을 해야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죽어서도 가지고 갈 것 같이 집착을 보이지요.

부처님 가르침대로 살아보세요. 그것처럼 편하고, 쉬운일이 없습니다. 그러면 이 세계가 순식간에 극락세계가 되는 것입니다. 성자의 안목에서 본다면 당체즉공이기 때문에 이 세계 그대로가 모두 공입니다. 공의 알맹이가 무엇인가, 그 실체가 무엇인가, 바로 불성이란 말입니다. 광명 찬란한 불성이 이 우주에 충만해 있습니다.

지금은 모양으로 살지만 몇억겁 뒤에는 우주의 법에 따라 모두 파괴 소멸됩니다. 따라서 그러한 참담한 재해를 입지않기 위해서 열심히 정진해 그전에 해탈의 자리에 올라야 합니다.

다행히 부처님 법은 대자대비한 법이기 때문에 우리 중생이 차근차근 공부해서 모두 천상에 올라간 후에 파괴가 됩니다. 기독교의 최후의 심판과 같이 비극적인 최후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파괴가 된 다음에는 다 텅텅 빈 공무변이라. 거기에는 마음만 있는, 식만 존재하는 중생만이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우주가 텅 빈 데서 모양이 이뤄집니다. 이것은 내 말이 아니라 부처님 말씀입니다.

위대한 철인도 학자도 결국에는 부처님법으로 회귀하고 있습니다. 현대물리학도 점차로 증명해가고 있어요. 불교는 가장 투철한 과학인 동시에 가장 궁극적인 철학, 영생해탈의 종교입니다. 해탈의 길로 가기 위해서 우리는 세간법을 지양하고 제법이 비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마음을 가다듬어서 내 행복을 위해서나, 우리 민족의 웅비를 위해서나, 지금 현재 우리가 겪고있는 경제난국 극복을 위해서나 어렵고 힘들수록 부처님 가르침을 지극하게 따라야 합니다. 부처님 말씀은 마음법 뿐 아니라 우리 몸에도 제일 좋은 묘방입니다.

약력
·1923년 生
·1946년 금타스님을 은사로 출가
·40년을 토굴수행 장좌불와 정진
·곡성 태안사 조실 역임
·95년부터 美 팜스프링 금강선원 주석


【수행한담】청화스님<성륜사 조실>

“삼매로 습기 녹여야 무량공덕 나옵니다”
‘나’라는 관념때문에 相이 생기고

삶이 무거워 지니 매일 업장 녹이다보면 치우침 없이 다 포함된 자리 이룹니다
재가불자도 한달에 여섯날은 출가한 셈치고 오계 수행하세요
몸도 정신도 맑아 환희심 얻습니다
“나도 과연 성불할 수 있을까”
선근 깊지 못하면 자꾸 후퇴합니다
성자와 나의 근본성품 같으니
‘얼마만큼 닦느냐’가 중요합니다
“이론없는 실천은 맹종…‘안심법문’ 따르세요”
번뇌의 뿌리 뽑히면 중도실상 생명 체험

양력
·1923년 生
·1946년 금타스님을 은사로 출가 득도
·40여년을 토굴수행 장좌불와 정진
·곡성 태안사 조실 역임
·95년부터 美 팜스프링 금강선원 주석

내가 3년결사를 발원하고 미국에 건너와 이렇게 1년여 살고있자니 많은 사람들이 물어요. 어떻게 미국에 오게됐냐는 겁니다. 달마스님께서는 공부가 다 성취된 뒤에 동토지방을 제도할 원력으로 동쪽으로 오셨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나이도 많고 미숙한 채로 미국불교의 발전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까 해서 왔습니다.

미국에서 한국불교가 아직 제대로 정착을 하지 못했다는 판단이 서고, 미국의 각국 불교들이 여러 갈래로 분열되어 서로 화합도 안되어 있는 것도 같아서 융합적인 차원에서 누군가가 조절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지요. 또한 미국은 선진국으로 세계의 석학들이 많이 모이고 문화교류가 활발한 곳이기 때문에 불교의 진면목을 세계에 알리는데 효과적이라 생각했습니다.

이곳 미국도 그렇고 어느 사회나 개인에게 있어서 발생하기 쉬운 갈등과 분열은 부처님 가르침으로 극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 중생들이 현상적으로 경험하는 문제들은 모두가 실체가 아닙니다. 자기 몸뚱이나 관념 심지어 대상물 모두가 실제가 아닙니다.

<반야심경>이 가르치는 대로 ‘오온개공(五溫皆空)’입니다. 오온에는 인간이라든가 모든 것이 다 들어가는데, 오온은 본래로 실존이 아니요 가상인 것이고 허망상인 것이기 때문에 공(空)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중생이 인식하는 모두가 허망한 것이요, 잘못 보는 것으로서 실재가 아닙니다.

진리는 반야바라밀인 중도실상(中道實相)입니다. 그래서 중도실상의 생명관을 가지고 사람을 대하고 대화도 하고 행동해야 분열 갈등이 없어집니다. 또 모든 일을 진리의 조명아래서 올바르게 생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중도실상은 어디에도 안 치우치고 모두가 다 포함된 자리입니다. 우리 중생이 보듯이 허망 무상한 상만 있다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텅 비어서 없다는 것도 아닙니다. 조금도 치우침이 없이 모두를 다 초월한 자리이며, 모든 성자들이 체험하는 참다운 생명자리입니다. 일체 가상을 떠나서 인생과 우주의 본래 생명의 실상자리가 바로 중도실상 자리입니다.

중도실상 자리를 아직 체험하지 못한 보통의 사람들은 사실상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업장이 무거운 사람은 도저히 자기 분상에서 납득이 안되니까 아예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수희찬탄(隨喜讚嘆)하는 마음으로 바로 수용하는 마음이 되면 납득하게 됩니다.

‘부처님이나 도인들은 가장 정직하고 총명하고 바로 깨달은 분인데 그 분들이 옳다고 했으니 그대로 옳은 것이 아니겠는가’하고 전폭적으로 믿으십시오. 그리고 염불이나 주력이나 화두나 자신의 근기에 맞추어 다른 생각을 않고서 지속적으로 공부하십시요. 그렇게 공부하다 보면 하루 하루 한 만큼 업장이 녹아짐에 따라서 중도실상의 경계가 점차로 빛나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철학을 좋아했습니다. 출가하기 전에 동 서양 철학서적을 이것저것 섭렵했습니다. 동양철학을 넘보면서 물론 불교서적을 만났지요. 경전도 보고 불교입문서도 보면서 나름대로 불교의 윤곽이랄까요, 겉을 잡았었습니다. 그 후 우리 집안의 6촌 동생이 절에 있으면서 공부하기 좋은 곳이 있다고 해서 그 즉시 “아, 그러느냐?”하면서 따라 나섰습니다.

절에 가서 공부도 하고 수양도 좀 하려고 마음 먹었었는데, 워낙 위대한 스승을 만났기 때문에 그냥 미련없이 그대로 출가했습니다. 바로 은사이신 금타스님이셨습니다. 그 어른은 실로 모든 점에서 자기 개인이라는 생각이 전혀 없으셔서 진정 진리의 불덩이 같이만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 어른의 법문에서 제가 기독교나 현대과학에 있어서 막혔던 문제가 조금도 어긋남이 없이 다 풀리니까요.

오랜동안의 회의가 풀리니까 젊은 사람으로서는 환희용약이 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더욱이 수행이 철저하셔서 ‘스님의 방법을 취하면 꼭 성불할 수 있겠다’하는 생각이 서게되니 다른 길을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 후 40년여년을 은사스님처럼 수행했습니다. 세상에서 얘기하는 일종식하고 장좌불와(長座不臥)의 방식이었지요. 젊어서는 고집을 부리고 장좌불와한다고 했고 근 30년을 토굴생활도 했습니다. 사실상 그렇게 철저한 셈은 아니었습니다만 아무튼 원칙을 그렇게 세우고 살았습니다.

하루에 한 끼니만 먹으면 그렇게 편해요. 그리고 토굴생활을 하다 보니까 혼자 여러 끼니 해 먹기도 귀찮스럽고 하루 한 끼니만 먹으면 몸이 굉장히 가볍습니다. 몸이 가볍다는 것은 그만치 피순환이 잘된다는 것이고 또 피순환이 왕성하니까 병균이 못 침범하겠지요.

사실은 삼세의 모든 부처님께서는 하루 한 끼니 드셨습니다. 그러니까 승가생활에서 아침에 배고플 때는 죽을 먹어도 무방하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원칙은 일종식이지요. 저도 역시 원칙은 지켰으나 어디에 초청되면 애써 대접하는데 안 먹으면 미안스러우니까 더러 먹기도 했습니다.

또 젊어서는 어거지로 상을 내서 잠도 안자고 앉아서 버텼지요. 그러나 지금은 몸뚱이도 쇠약해지고, 이제는 앉으나 서나 공부에 망상도 별로 나올 때가 아니고 해서 될수록 안 눕는 쪽으로 원칙은 세워놓고 고집은 않습니다. 그래도 지금은 피로하면 눕기도 하는 편이기 때문에 장좌불와는 아니지요.

이런 수행이 나에게는 다분히 유익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공부에 힘을 얻어야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앉아 있으면 조금도 몸에 부담이 없고 마음이 절로 고요해지고, 가만히 있으면 있는 만큼 더 맑아지니 말입니다. 혼침도 미처 참지 못하고 망상만 피우고 그럴 때는 에너지 소모가 많이 되니까 지장이 생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철두철미하게 다 바르게 살았다는 것은 아닙니다.

요즘에는 나같이 토굴생활을 하려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권고할 생각은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도 그 사람 근기에 따라서 수행하도록 가르치셨습니다. 기본적인 출가 수행자의 청규가 오후에는 먹지말아야 하고, 병자가 아닌 한에는 한 번 일어나면 취침시간까지 앉아서 공부할 것이지 자리에 눕지 말아야 합니다.

나는 재가불자들도 적어도 한 달에 여섯 날은 오후불식하라고 권합니다. ‘6재일’이라 해서 한 달 가운데 스스로 정해서 여섯 날은 출가한 셈 치고 생활규범으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그 날만은 내외간에도 잠자리에 들지 않고 고기도 안 먹고 허튼 말도 않고 하루 한 끼만 먹고 오로지 부처님 공부만 하라는 것입니다.

하루 한끼만 먹게 되면 사람들이 ‘컨디션’이라고 하는 몸 분위기가 대단히 좋아집니다. 가벼워지는 것이지요. 적게 먹으면 먹는 양에 비해서 체내 흡수가 많아지게 되고 피도 맑아집니다. 많이 먹으면 배설을 많이 하니까 흡수하는 비율은 적어집니다. 그리고 최초의 인간은 음식을 안 먹었습니다.

광명을 몸으로 하였으니 광명은 불생불멸의 생명이기 때문에 먹을 필요가 없지요. 부처님 말씀에 보면 최초의 인간은 식식(識食)이라, 마음으로 음식을 삼았다는 뜻입니다. 환희심나는 행복(法喜禪悅)을 음식으로 하고, 법(法)을 음식으로 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부처님법에 대해서 환희심으로 충만하다면 그때는 안 먹어도 마음이 충만하지만, 마음이 답답하고 막히고 남 미워할 때는 필요없이 자꾸 먹게되지 않습니까.

은사이신 금타스님은 번뇌를 녹여서 성자가 될 때 중도실상의 생명을 체험할 것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어른의 가르침을 잡고 선방에도 몇철 다녔습니다만, 워낙 위대한 분을 스승으로 모신 터라 달리 스승을 찾을 생각을 내지 않고 토굴생활을 했습니다.

40대에는 모범적인 선방을 만들어 사람을 길러 보려고 토굴에서 나와봤지만 그것이 잘 안됩니다. 안되는 것은 내 역량 부족도 있고 인연이 아직 성숙되지 않아서였겠지요. 그래서 다시 토굴로 들어가고 또 나와보고 그러다가 60살 넘어서 온전히 나왔습니다.

우리가 수행하면서 놓치지 않아야 할 것은 생명자체를 중도실상의 생명으로 체험하는 것입니다. 금타스님께서 쓰신 <금강심론(金剛心論)>을 보면 이런 대목이 있어요.

“중생의 육안은 번뇌에 때묻은 오염된 육안이기 때문에 금진의 세계를 알려고 할 때는 중생의 욕계번뇌를 없애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천안통이 나온다”

욕계번뇌의 뿌리를 뽑으면 천안통이 나오는 것입니다. 아직 나도 번뇌의 뿌리가 뽑히려면 천리만리입니다. 평생동안 노력해야지요. 번뇌의 뿌리가 뽑히면 발이 하늘로 뜬다는 말씀이 경론에 있습니다. 전혀 무게를 못느낀다고 합니다.

실로 무게가 있지 않은 것인데 ‘나’라는 관념, 번뇌 때문에 상(相)을 내고 무게를 느끼는 것입니다. 관념이라는 것이 모든 것을 창조합니다.

우리가 길을 갈 때는 먼저 길목을 알아야 합니다. 실천에 앞서서 이론이 있어야지 이론없이 실천만 있으면 맹종이 되는 것이고 빗나갈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꼭 이론이 앞서야 하는것입니다. 또한 부처님께서 밝혀 놓으시고 무수한 성자가 탄탄대로를 닦아놓으신 그대로 따라가면 되는 것인데 길목도 연구하지 않고서 동서를 헤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편안하게 되어있는 길 환한 길을 인도하는 것이 안심법문(安心法門)입니다. 억지로 이것인가 저것인가 상대적인 의심을 해서는 마음만 피곤할 뿐입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 꿈같다고 했으면 분명히 꿈같다고 보려고 하고 그림자를 그림자로 여겨서 집착을 뿌리치면 몸도 가볍고 마음도 가쁜하고 공부가 잘풀리는 것입니다. 이 몸뚱이 이대로 있다고 인정하고 공부하는 것과 이 몸뚱이가 본래 비었다고 여기며 공부하는 것은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근본 정통선을 익혀야만 참다운 선정의 힘을 얻을 수가 있고 도력도 나오는 것입니다. 정통선으로 해서 사선정(四禪定) 사공정(四空定) 멸진정(滅盡定)까지 못나간다면 우리 자성이 갖추고 있는 무량 공덕을 발휘할 수가 없습니다. 원래 우리 자성 가운데는 삼명육통(三明六通)등 무량 공덕이 갖춰져 있는데, 삼매로써 습기를 녹여야 무량공덕이 나옵니다.

불교가 다시 옛날 도인들처럼 화광삼매(火光三昧)에 들어서 자기 스스로 불을 내어 자기 몸을 태우는 정도의 도력이 나와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현대 물질사회에 젖은 사람들이 따르게 될 것이고, 제도하기도 쉽습니다.

부처님 육성과도 같은 <아함경>을 보면 여러 군데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불교란 결국 기도를 하든지 염불을 하든지 우리 마음이 일념이 되고 업장이 녹아서 삼매에 들어야 합니다. 불교나 기독교나 바른 깨달음, 바른 계시를 받으려면 꼭 그래야만 합니다.

어느 누구나 성자가 되려면 깊은 삼매에 드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 과정이 없이 성자가 되려고 하니까 무리가 생기고 폐단이 생기는 것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나도 과연 성불할 수 있을까’하고 스스로 한계를 의식하며 자신없어 합니다.

잘못된 생각이지요. 누구나가 삼명육통을 다 할 수 있고, 위대한 공덕이 있는 성자와 내가 조금도 차이가 없다고 보는 것이 불법입니다. 달마조사와 내가 둘이 아니란 말입니다. 겉에 형상은 다르다 하더라도 근본 성품은 조금도 차이가 없다고 보아야지요.

다만 우리가 닦고 안 닦고, 또는 얼마만큼 닦을 것인가 이것이 문제입니다. 선근이 깊지 못하면 자꾸만 후퇴합니다. 닦다가도 조금만 피로하면 ‘편히 살
것인데 괜시리 사서 고생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말입니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다른 스님들은 편하게 승려생활을 잘하는데 무슨 필요로 그렇게 까다롭고 옹색하게 하느냐고 해요. 삼매정진을 무시한다면 옳은 말이라고 할수 있겠지요. 또 제자들 가운데서는 내가 잘 돌봐주고 인자하다고 하면서도 너무 계행이 철저해서 시봉하고 싶어도 스스로 포기하고 지키지 못했다는 말을 해요.

그리고 ‘무애행(無碍行)’에 대해서도 잘못 생각하는 이들이 많은것 같습니다. 걸림없네 하면서 짓는 파계는 무애행이 아닙니다. 수행의 적일 뿐입니다. 진정한 무애행은 법기에 끄달리지 않는 것입니다. 계행을 지키고도 걸림이 없는것, 그것이 무애행입니다.


【수행한담】청화스님<태안사 조실>

- “반야는 창조와 행복의 어머니 -
- 부처님 가르침은 만병 통치약”-

만법은 유식이라 모든 존재가 오직 식(識) 곧, 마음 가운데 다 들어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도 동물도 유정(有情)·무정(無情)도 모두가 오직 식(識) 곧 마음입니다. 식 아닌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만법유식의 도리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도 역시 식(識) 덩어리요, 마음 덩어리요, 산도 태양도 별도 식 덩어리요, 우리 지구도 바로 식입니다. 따라서 우리 지구는 바로 그대로 지장보살 입니다. 또는 태양은 바로 그대로 관세음보살이요, 달은 대세지보살 입니다.

그런데, 우주의 도리인 반야바라밀은 대체로 어떤 것인가 우리는 여태 반야에 관해서 여러가지로 생각도 하고 검토해 왔습니다. 반야는 바로 제법공(諸法空) 도리입니다. 그러나 다만 비어 있고 허무하다고만 생각할 때에는 반야바라밀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이 실제로 있다고 집착하는 현상계는 사실은 시간적으로 무상(無常)하고 공간적으로 비어 있어서 허무한 것이나, 모든 허망한 존재의 근본성품인 진여불성(眞如佛性)은 무한 공덕을 갖추고 우주에 충만해 있는 바로 생명의 실상입니다.

이러한 실상(實相)의 도리가 반야바라밀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반야가 있으면 비로소 참다운 수행자이고 반야가 없다면 수행자가 못됩니다. 반야는 어느 고유한 존재가 아니라 바로 생명입니다. 우리가 전도된 몽상만 여의어 버리면 바로 반야의 생명 자체가 되는 것입니다. 반야와 더불어 있어야 참다운 창조가 있고 또는 참다운 수행이 있습니다. 반야가 없다면 모두가 다 범부의 허물을 벗지 못하는 것이고 또는 어떤 행동이나 때묻은 유루행(有漏行) 밖에는 못됩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중생이 보고 느끼는 일체 현상은 모두가 다 허망하고 무상한 것이며, 범부인 한 우리가 보는 것은 다 전도된 몽상입니다. 전도된 몽상을 끊어 버리지 않고는 공부가 될 수 없습니다. 어떻게 끊어야 할 것인가? 이런 수도의 방편이 화두(話頭)요. 염불(念佛)이며, 관법(觀法)이요, 주문(呪文)이며 계율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마음이 아직 반야의 도리를 증명은 못하더라도 우선 이론적으로 바른 이해가 있어야 수행이 바로 되기 때문에 철두철미하게 이론적인 자기 정립이 되어야 합니다. 이른바 선오후수(先俉後修)(먼저 깨치고 뒤에 수행하는 것)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상(相)을 여의면서 체(體)로 돌아가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현대 사조(思潮)는 여러 갈래로 다원적이고 다양한 문화현상들이 하나의 도리, 하나의 근본 체성(體性)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는 전환기에 직면해 있습니다. 따라서 어느 분야에서나 모두가 다 개방적이고 보편적이고 궁극적인 하나의 진리, 포괄적인 본체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상(相)에서 체(體)로 또는 분열(分裂)에서 화합(和合)으로 지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시대를 맞이하여 불교도 내 종파 네 종파의 편견에서 벗어나 불법의 근본이자 우주의 법칙인 반야바라밀로 돌아가는 것이 절실한 때 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도 여러가지 방편이 있는 것인데 우주 자체가 무량무변한 진여불성이므로 불성을 깨닫는 대도(大道)에는 문이 따로 없는 것입니다.

어떤 스님이 조주스님께 ‘무엇이 조주입니까’하고 법을 물으니까 ‘동문(東門) 서문(西門) 남문(南門) 북문(北門)이라’ 진실한 조주는 어느 한 문이 아니라 동문이나 서문이나 남문이나 북문이나 어디에나 걸림이 없는 참 성품이라는 말입니다. 불법은 이와 같이 위대한 길이기 때문에 문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진리에 마음만 사무치면 상을 여의고서 본체를 지향하는 간절한 마음만 있다면, 수도정진하는 과정에서 물(水) 보고 깨닫고 불(火)보고 깨닫고 달(月) 보고 깨닫는 것입니다. 문제는 오직 우리가 체(體)를 여의지 않고 용(用)을 나투고 또는 용에서 본체로 돌아가는 간절한 뜻이 없으면 수행자의 자세가 못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로지 한눈 팔지 않고 근본성품인 진여불성을 깨닫고 진여불성과 하나가 되고자 출가사문이 된 것입니다. 삼천대천 세계도 모두가 체에서 용으로 화현(化現)되었다가 다시 체로 돌아갑니다. 체와 용이 원래 둘이 아니지만 현상적인 세계는 체에서 용으로 온 세계입니다. 현상적인 용(用)이란 본래 본체에 입각해서 용(用)을 나투어야 온전한 바른 통찰과 올바른 수행이 되는 것입니다.

본체란 가명(假名)과 가상(假相)을 여윈 일미평등(一味平等)한 자리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무아(無我)·무소유(無所有)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무아·무소유의 경계는 일체만유 그대로 진여법성의 경지입니다. 어느 것도 진여법성, 부처님 아님이 없는 자리입니다. 한 생각 잘못 비뚤어져서 ‘저것은 부처가 아니다, 이것은 부처다’고 분별하는 마음 자체가 체를 여의고서 상에 얽매이는 미망인 것입니다.

따라서 모두가 부처라는, 일체공덕을 원만히 갖춘 진여불성이라는 생명의 실상자리에다 우리의 마음을 둔다면 우리의 행위인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이 청청해 집니다. 그것이 바로 참다운 도덕률입니다. 공자(孔子)나 노자(老子)나 예수나 그런 성인들의 행위도 모두가 도덕률에 따른 것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 도덕률의 본체는 바로 참다운 철학인 우주의 도리요, 불교에서 말하면 진여불성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도리는 본래 공평하여 사사로움이 없는 생명이기 때문에 말하는 언어나, 행동하는 몸짓이나 조금도 윤리 도덕에 어긋날 수가 없습니다. 말을 함부로 한다거나 또는 음행을 한다거나 또는 음식을 함부로 먹는다는 것은 모두가 다 도덕률 곧 우주의 천연자연(天然自然)한 도리(道理)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철학에서도 인간성의 실존 문제가 가장 중요한 과제이며 어떤 분야에서나 인간성을 탐구하는 문제가 가장 절실한 근본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인간성을 똑바로 깨닫고 가르치는 가르침은 불교 외에는 없습니다. 절대로 아전인수가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 수행자는 인간성을 개발하는선구자 입니다. 현대사회의 선구자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우선 도덕적으로 우리는 완벽을 기해야 합니다. 인간이란 약해서 마음으로 다짐을 해도 미끄러지고 비틀어지고 합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칠전팔기로 즉시 다시 일어나서 나약한 자기를 추스려야 합니다. 땅에 넘어지면 다시 땅을 짚고 일어나듯이 강인한 의지로 다시 바로 일어나서 한사코 법성(法性)자리에 우리의 마음을 붙이고 미망의 그물을 벗어나야 합니다.

어떤 분야를 막론하고 자기 스승을 위해서나 부모를 위해서나 친구를 위해서나 어느 누구를 위해서나 이와 같이 생명의 고향인 본체로 돌아가는 그 행위가 가장 수승한 행위요, 가장 진정한 보답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전도된 몽상만 떠나면 모든 것이 한결같이 제법(諸法)이 공(空)이요 5온(五蘊)이 개공(皆空)입니다. 범부 중생들은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로 보기 때문에 고민이 생기고 여러 가지 번뇌가 더욱 더 치성(熾盛)해지는 것입니다. 자기의 본래면목을 바로 참구하는 공덕보다 더 수승한 보배는 없습니다.

우리는 몸이 아프면 약을 먹고 영양분을 많이 섭취합니다만 그것이 필요없는 것은 아니나, 가장 훌륭한 영양분, 가장 완벽한 보약은 부처님 가르침을 여법히 수행하는 일입니다.

부처님 법에다가 마음을 두고 바로 생활한다면 웬만한 문제들은 풀리는 것입니다. 진여불성에 가까울 수록 더 잘 풀리는 것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 무슨 병이나 다 근본은 무명에서 오는 것이며 법성 자리에는 본래 죽음도 병도 없기 때문입니다. 고기를 안 먹어도 단백질을 별도로 안 취해도 그것 때문에 죽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약해서 뒤뚱거리고 넘어지기가 쉽지만 넘어지면 바로 일어서야 합니다. 복잡하고 어려운 것은 조금도 없습니다. 부처님을 따르는 길은 공명정대한 우주의 공정한 길입니다. 사실은 최상의 안락행(安樂行)입니다. 수행자들이 가는 길은 수 많은 성현(聖賢)들이 헤치고 다져놓은 탄탄하고 활짝 트인 해탈의 대도입니다.

전도된 몽상만 떠나 버리면 훤히 트인 마음으로 영생(永生)의 낙토(樂土)를 지향하여 환희용약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도 눈도 열려 버리면 웬만한 병은 침범을 못합니다.

그래서 한없이 틔어 있고 다만 비어 있지 않는 자리, 무량한 공덕을 갖춘 진여불성자리, 이 자리를 생각하고 그 진여불성을 여의지 않는 생활보다 더한 행복은 없습니다. 불경에도 아가타약을 말합니다. 아가타 약은 만병 통치약입니다.

부처님 명호나 화두나, 또는 주문이나 부처님이 말씀하신 불법은 다 한결같이 마음의 병과 몸의 병을 치유하는 만병통치의 아가타약입니다.

우주가 바로 부처님이요 일체의 존재가 바로 불법(佛法)이기 때문에 중생이 부처를 생각하면 부처는 또한 우리 중생을 굽어보고 호념(護念)하는 것입니다. 다같은 부처이므로 부처를 생각해서 부처가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상통하고 감응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바야흐로 무서운 시대입니다. 자기 문중(門中)에 집착하고 자기 종단(宗團)에 얽히고 자기가 공부하는 법, 내 것만이 옳다는 것에 붙잡히게 되면 우리 마음은 바로 어두워지고 그지없이 옹색해 집니다. 이것 자체가 전도몽상입니다.


본래 훤히 틔어서 아집(我執)도 법집(法執)도 없는 마음인 것을 구태여 지어서 ‘나’에 집착하고 법에 집착한다면 공부나 다른 사람한테나 그 무엇에도 도움이 안되며 그것이 또한 우주를 오염시키는 것입니다.

현대는 개방적인 시대입니다. 아무렇게나 방만(放漫)하게 한다는 개방적인 시대가 아니라, 법에 대한 집착을 털고 나에 대한 집착을 털어버리지 않을 수 없는 해탈을 지향한 시대라는 말입니다.

마땅히 번뇌 해탈을 지향하는 시대적인 조류에 맞춰야 첨단 과학에도 뒤지지 않고 우리가 5욕의 수렁에서 헤매는 무량중생을 구제하는 진정한 보살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수행자는 자랑스러운 존재입니다. 과거 전생에 두고두고 공덕을 쌓아서 금생에 영광스러운 법의를 입었습니다. 우리들의 무상(無常)한 금생 인연이 몇 차례나 다시 만나게 될런지 모르겠습니다마는 그러나 내생에 가서도 꼭 우리는 수행자가 되어서 피차 청정한 수행자의 모습으로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다생겁래(多生劫來)로 몇 만 생을 다시 태어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한사코 중생 제도를 위해서 반드시 고통 많은 사바세계에 태어나야 합니다. 그때마다 출가하여 성취하고 본래 없는 무명 다 여의고, 본래 없는 무량한 중생을 제도하여 다 함께 성불하게 할 것입니다.
부디엔스 | buddmaster@buddhapia.com
2003-11-13 오전 8:5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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