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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탱화란?
탱화란 본래 부처님이나 보살의 초상, 혹은 경전의 내용 등을 그려 벽에 거는 그림을 말한다.
탱화는 372년(고구려 소수림왕) 이전에 국내에 들어온 것으로 추정되며 고려 때 그 아름다움이 절정에 달했다. 그러나 조선조 배불정책에 의해 경직되고 도식화된 모습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한국불교의례의 특징상 법당 상단에는 불·보살의 모습을 담은 후불화를, 중단에는 부처님과 불법을 옹호하는 신장의 모습을 담은 신중탱화를 봉안한다. 또 하단에는 감로탱화를 봉안하는데, 감로탱화에는 주로 조상숭배의식을 비롯한 중생들의 속세 일상과 지옥의 고통 등이 그려진다.
▷ 각 시대 중생상을 반영하는 탱화
탱화 속에는 시대상황이나 중생들과 함께 고민하는 불교의 모습이 담겨져 있다.
신장이 휴대전화 등 최첨단기기들을 들고 있는 신중탱화를 봉안한 우학스님(관음사 주지)은 “과거에 신장들은 칼과 도끼, 비파 등으로 중생들을 괴롭히는 악귀와 고통을 쫓아낼 수 있었지만, 미사일폭격과 각종 생태·화학전이 난무한 현시대에 이러한 기물들은 유명무실한 것이 되었다”며 “이런 고전적 형상으로 대중에게 다가가기는 어렵게 됐다”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이러한 탱화의 변신은 그 동안 고답적이고 정체된 미술로 평가받던 불교미술에 대한 인식전환으로도 이어지고 있다.
본존불의 신앙적 성격을 구체화하는 후불화를 제외하고 부처님과 불법을 옹호하는 호법신장 모습을 담는 신중탱화와 제례의식 등 생활풍속을 담은 감로탱화는 수호의 대상과 시대상에 따라 그 내용과 지물이 변화되어 왔다. 특히 조선조에 성행한 감로탱화는 육도중생의 묘사기법과 표현양식에 있어 각 시대의 중생상을 솔직히 담고 있다. 일제강점기 때의 대표적인 흥천사의 감로탱화를 살펴보면 전기와 전철 등 신식문물의 도입과 그로인해 가중되는 중생들의 혼란과 고통이 고스란히 표현돼있다.
탱화는 사회상 반영뿐 아니라 새로운 도상의 창출과 서양화법 도입 등 꾸준히 변화되어 왔다. 최근에는 수원 용주사와 대구 관음사, 광주 선덕사 탱화 등이 그 계보(?)를 잇고 있다.
▷ 엇갈린 평가
관음사 신중탱화를 제작한 박소현 씨 등 많은 불화작가들은 “신중·감로탱화의 경우 삼국시대 때부터 이미 당시대 중생들의 모습을 담아냈다”며 “속세의 번뇌와 중생의 아픔을 고스란히 표현한 현대적 탱화야 말로 신도들의 불심(佛心)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사찰조형연구소 이기선 소장은 “감로탱화의 경우 풍속과 생활상들이 사실적으로 표현된 것은 사실이나 예배의 대상인 신장들의 지물을 휴대폰이나 미사일 등의 현대기기로 바꾸는 것은 성급한 일이다”며 “신장들이 들고 있는 검, 도끼, 비파 등은 단순한 무기를 넘어서 중생의 무명을 끊고 지혜를 구하는 등 불교적 상징성이 있는 것이므로 단순한 흥미로 쉽게 바꾸는 일은 지양돼야 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