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전 스님(조계종 종정ㆍ해인총림 방장)
백운영리소가가(白雲影裏笑呵呵)하니 양수지래부여타 (兩手持來付與他)로다.
약시금모사자자(若是金毛獅子子)인데 삼천리외견요와(三千里外見?訛)하리라.
흰구름 그림자 속에서 깔깔대고 웃으니 두 손으로 들고 와서 그대에게 전해 주었네.
만약 황금털을 가진 사자새끼라면 삼천리 밖에서도 어려운 곳을 알아차리리라.
금우(金牛)화상이 항상 공양 때가 되면 밥을 들고서 큰방 앞에 가서 춤을 추고 깔깔 웃으며 말했습니다. “납자들이여! 밥을 먹으러 오라.”
뒷날 어떤 납자가 장경혜릉(長慶慧稜)선사에게 와서 물었습니다. “고인이 말한 ‘납자들이여! 밥을 먹으러 오라’고 한 뜻이 무엇입니까?” “마치 재(齋)를 마친 후에 경하(慶賀)하며 축원하는 것과 같느니라.”
나중에 그 납자가 또 대광거회(大光居誨)스님에게 물었습니다. “장경이 재(齋)를 마친 후에 경하하며 축원하는 것과 같다고 한 뜻이 무엇입니까?” 그러자 대광스님이 춤을 추었습니다. 그러자 그 납자가 대광스님에게 절을 하였습니다. “너는 무엇을 보았기에 나에게 절을 하는가?” 이에 그 납자가 춤을 추었습니다. 그러자 대광스님이 말했습니다. “이 앵무새같이 흉내나 내는 멍청한 놈아!”
아침에는 죽을 먹고 한낮에는 밥을 먹는 것이 우리의 살림살이입니다. 이는 해제이건 결제이건 봄이건 가을이건 변함없는 선가의 일상생활이기도 합니다. 조사선(祖師禪)의 생명은 일상성입니다. 그래서 늘 마조선사는 ‘평상심(平常心)이 도(道)’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고인들은 공양을 앞에 두고서도, 또 함께 먹으면서도 서로의 기방(機?)을 겨룰 때는 한 치의 양보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 금우스님이었기에 같은 마조회상에서 공부하고 있던 방거사(龐居士)에게도 한 소리를 합니다.
금우스님이 밥을 나누는 진지를 하면서 방 거사에게 물었습니다, “마음에 경계를 일으켜 밥 받는 것을 이미 유마거사가 꾸짖었다. 가섭존자가 부자를 버리고 가난한 집만 복을 짓게 해주려고 골라서 탁발을 다닌 이 이치를 벗어난 거사는 만족스러운가?” “그것을 꾸짖은 유마가 어찌 본분종사가 아니겠는가?”
이에 선사가 물었습니다. “그 일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그러자 거사가 말했습니다. “밥이 입가에까지 왔다가 다시 남에게 빼앗겼도다.” 이에 금우스님이 얼른 진지를 계속하였습니다. 그러자 방 거사가 말했습니다. “한 마디도 필요치 않구나.”
반야의 보검을 종횡으로 휘두르니 그 칼날 앞에 언어가 끊어지고, 밝은 거울을 높이 걸어두니 언구(言句) 속에서 비로인(毘盧印)이 나옵니다. 평온하고 고요한 경지에서 옷 입고 밥 먹으니, 신통력 부리는 곳에 무엇 때문에 머물겠습니까? 이런 이치를 분명히 알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만약 이 이치를 제대로 밝히지 못한다면 그 때마다 삼십 방망이를 맞아야 할 것입니다.
밥만 축내는 납자가 아니라 공부하는 납자임을 눈 밝은 이는 알아봅니다.
‘금우반통(金牛飯桶)’ 공안의 주인공 금우선사는 마조선사의 법을 이은 대선지식입니다.
그는 점심때가 되기만 하면 공양통을 들고서 승당 앞에서 춤을 추고서 껄껄대며 말하였습니다. “납자들이여! 밥을 먹어라.” 이 같은 소리를 하루 이틀도 아니고 줄곧 20년 동안 하였던 것입니다. 언제나 공양 때가 되면 항상 종을 치고 목탁을 두드리는 것도 밥 때를 알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그 시간에 공양통을 들고 와서 숱한 재주를 피우고 있는 것이겠습니까? 금우스님이 미친 것입니까? 아니면 법문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이렇게 해서 도대체 무엇을 하려고 한 것입니까?
이에 대하여 장경스님은 ‘마치 재(齋)를 마친 후에 경하(慶賀)하며 축원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고, 대광스님은 그 말을 듣고서 춤을 추었습니다. 그렇다면 장경과 대광이 고인의 뜻을 제대로 함께 밝힌 것입니까?
금우스님이 손수 밥을 짓고 춤을 추면서 사람들에게 밥을 먹으러 오라고 한 뜻이 참으로 무엇인지 알겠습니까?
이번 철의 결제대중은 정진할 때는 말할 것도 없고 발우를 펴고 공양을 하면서도 늘상 이 화두를 놓치지 말고 항상 참구하시기 바랍니다.
대이공양도승당(待伊供養到僧堂)하야 륵하삼권막막교량(肋下三拳莫較量)이어다
보청무시제박수(普請舞時齊拍手)하니 불연과립막승당(不然顆粒莫承當)이리라
밥을 들고 큰 방 앞에 이르렀을 때 옆구리를 세 번 때려 분별치 못하도록 하라.
여럿이 춤출 때 모두가 손뼉을 쳐라. 그렇지 않으면 낟알 한 톨도 얻어먹지 못하리라.
■보성 스님(조계총림 송광사 방장)
오늘은 동안거(冬安居) 결제(結制)날입니다.
당(唐) 나라 때 스님 동안상찰(同安常察) 선사의 게송 한 구절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여러분들이 너무나 잘 아는 ‘장부자유충천기(丈夫自有衝天氣)하니, 불향여래행처행(不向如來行處行)’입니다. 대장부는 누구나 하늘을 찌르는 기운이 있으니, 부처님께서 걸어가신 묵은 길을 향해 가지 말라.
이 송(頌)을 잘 해석하면 기사회생(起死回生)의 묘약(妙藥)이 되지만 잘못 해석하면 상신실명(喪身失命)의 사약(死藥)이 됩니다.
음주식육(飮酒食肉)이 무방반야(無妨般若)하고 행도행음(行盜行淫)이 불애보리(不碍菩提)라고 호언장담(豪言壯談)하는 천불(千佛)이 출세(出世)해도 제도(濟度)받을 수 없는 천제(闡提)도 모두 이 법문(法門)을 잘못 판단(判斷)한 사람들입니다.
이 법문은 초학수행자(初學修行者)를 위해서 한 말이 아니고, 견성(見性)한 사람의 오후보임(悟後保任)을 위해서 한 말입니다.
모든 사람은 저마다 근기(根機)가 다르고 개성(個性)이 다르기 때문에 가야할 길이 다르다는 말입니다. 비유(譬喩)해 말하면 차(車)길은 땅에 있고, 뱃길은 물에 있고, 비행기(飛行機)의 길은 공중(空中)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보조국사(普照國師)께서는 견성(見性)은 내가 가야할 길을 아는 것이니, 길을 안 후에 열심히 닦아서 성불(成佛)한다 했습니다. 그래서 오전수행(悟前修行)은 맹인(盲人)이 눈뜬 사람의 손을 잡고 가는 것과 같고, 오후수행(悟後修行)은 자기(自己)가 눈을 뜨고 가야 할 곳을 향해 가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어떤 길이 금일결제대중(今日結制大衆)이 각각 가야할 길입니까?
(주장자로 법상(法床)을 한번 치고 이르되,)
기조록수암전거(幾條綠水岩前去)오, 일편백운강상래(一片白雲江上來)로다.
몇 가닥 푸른 물이 바위 앞으로 흘러가는고,
한 조각 흰 구름이 강물위로 떠오네.
■원담 스님(덕숭총림 수덕사 방장)
백락퇴중유전신(白浪堆中有轉身)
허공박락무잔흔(虛空撲落無殘痕)
저리시비하변료(這裏是非何辨了)
운단추야월만천(雲斷秋夜月滿天)
흰 파도 속에서 몸 돌릴 곳 찾으니
허공이 부서짐에 그 흔적이 없네.
이 가운데 소식을 그대여 알겠는가.
구름 끊긴 가을 밤 달빛만 가득하네.
여기에 시방세계의 모든 부처님들과 역대 조사들이 모두 이 속에 있는데, 여러분 보았는가! 설사 보았다 하더라도 역시 닷줄을 쥐고 배를 바다에 띄우는 격이니라.
<원각경>에 이르기를 “큰 원각으로 나의 가람(伽藍)을 삼고 몸과 마음이 평등성지(平等性智)에 안거(安居)하라” 하였는데 대중들은 알겠는가!
위 없는 오묘한 원각심(圓覺心)은 생사와 열반이 없으며 성불함과 성불하지 못함도 없고 망령된 윤회와 윤회하지 않음이 없다.
이것은 또한 관대(寬大)하고 넓고 넓어 바깥 경계가 없이 시방세계에 두루해서 여래(如來)로 더불어 일체평등하여 모든 수행이 진실로 두 길이 있지 않느니라.
대중들은 들어라!
빈심(貧心)과 진에(瞋에)하는 마음, 어리석은 마음을 여의고 네 가지 상(想)의 집착을 여의어 청정(淸淨)한 성품으로 적멸행(寂滅行)에 들어서 꾸준히 정진하도록 하라.
금야명월인진망(今夜明月人盡望)
수지모단탄거해(誰知毛端呑巨海)
오늘 밤 밝은 달은 누구나 바라보지만
한 터럭이 큰 바다를 삼킴을 누가 알리요!
할(喝)
■지허 스님(태고총림 선암사 칠전선원장)
차사본무생(此事本無生)
수연처처명(隨緣處處明)
신료여사지(信了如斯旨)
귀가파문리(歸家罷問裡)
이 일은 본래 태어났다는 것조차 없어
인연을 따라 가는 곳마다 밝을 뿐이네
이와 같은 종지를 확실히 믿으면
집에 돌아갈 길 묻는 것은 끝났느니라.
생사(生死)가 호흡 한 번 하는 데 있고 해와 달이 떴다가 지는 것이 번갯불 같아 덧없고 그지없는 인생을 사는 사이에 오늘이 또 결제라 하니 이번 결제도 한 번 잘 지내봅시다.
결제를 잘 지내는 것은 용맹정진 잘 하자는 것인데 법문한다고 용맹정진이 되고 법문 안한다고 용맹정진이 안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용맹정진은 오로지 자기 스스로에게 있고 마음먹는 대로 촌음을 아껴 공부 지어 가는 데 있습니다.
법문은 아무 말하지 않는 가운데 있고, 법상에 오르기 전에 있고, 법문 듣는 사람이 자리에 앉기 전에 있습니다. 이 도리를 아는 것이 참 법문 듣는 법입니다. 오늘도 결제한다고 대중이 모여 왔으니 뭐라고 하기는 해야겠기에 게송 하나를 읊어 봤습니다.
차사본무생(此事本無生)이라 수연처처명(隨緣處處明)이로다.
이일이 무슨 일인고.
일좌부동경육년(一座不動經六年)하여 세존(世尊)이 견명성오도(見明星悟道)한 일이요.
삼처(三處)에서 가섭(迦葉)에게 전불심등(傳佛心燈)함이요.
소림(少林)에서 구년면벽(九年面壁)한 달마(達摩)의 가풍(家風)이요.
역대전등제대조사(歷代傳燈諸代祖師) 천하종사(天下宗師)가 확철대오한 일입니다.
또 이 일이란 우리 납자(衲子)가 일편단심(一片丹心)으로 행주좌와(行住坐臥)간에 걸림 없어 철저하게 화두일념(話頭一念)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이 일에는 생로병사(生老病死) 같은 것은 근접할 수도 없고 일체의 번뇌망상은 불꽃 위에 눈 녹듯하며 어떠한 부귀영화도 용광로 속에 쇳물 되듯 합니다. 성성적적(惺惺寂寂)한 일념화두(一念話頭) 앞에는 지옥천당(地獄天堂)이 모두 정토(淨土)여서 삼천대천(三千大千)의 어디를 가더라도 무명(無明)이 자취 없이 소멸되어 밝고 밝을 뿐입니다.
신료여사지(信了如斯旨)니 귀가파문리(歸家罷問裡)로다.
이 일을 확실히 믿기만 하면, 우리 종지(宗旨)와 종풍(宗風)을 철저하게 따르기만 하면 고향의 자기 집에 돌아가는 길을 선지식을 찾아 묻는 일은 마쳤다 할 것입니다. 고향이란 본래 부처자리요 진여자성(眞如自性)이요 본래면목(本來面目)이며 무위진인(無爲眞人)입니다. 우리 고향집에는 대해탈(大解脫)이 있을 뿐이며 대자유자재(大自由自在)가 있을 뿐이며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모두 즐거움 밖에 없는 내 집입니다.
여러분 다 아는 어렸을 적의 노래가 있습니다.
“즐거운 나의 집”이라는 노래지요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 뿐이리
내 나라 내 기쁨 길이 쉴 곳 또 꽃 피고 새 우는 내 집 뿐이리
오 사랑 나의 집 즐거운 내 벗 나의 집뿐이리라 합니다.
즐거운 곳은 고통이 없는 곳을 말합니다.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고통이 없고 일체의 사견망상이 없는 오도(悟道)의 경지입니다. 육도(六道)의 윤회가 끊어진 극락정토입니다. 즐거운 곳에 도달한 제불조사가 우리를 오라고 합니다. 삼세의 부처님이 일체 중생에게 모두 불성이 있으니 어서 깨달아서 어서 오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언제였는지 모르는 과거세에 본래 부처의 자리를 이탈하여 무명에 들어와 생래의 업을 받아 윤회라는 타향을 떠돌아다니며 나그네가 되어 모진 고통과 설움을 받으면서도 본래 부처인 고향을 그리워만 하고 돌아가지 못한지 그 얼마입니까. 한 생각만 돌리면 몇 천리를 왔더라도 돌아갈 방향만 잡고 실행만 하면 오늘이라도 금방 고향의 내 집에 돌아가 태평곡을 부르며 덩실덩실 춤추며 살텐데 말입니다.
내가 무량수를 누리며 쉴 곳은 생로병사가 없는 안심입명(安心立命)의 작은 집입니다. 고루거각(高樓巨閣)도 아니고, 사시(四時)가 없는 궁궐도 아니고 소박하고 아름다운 무위(無爲)의 작은 집입니다. 내 나라는, 내 기쁨의 나라는 불국정토(佛國淨土)입니다. 부처와 조사가 사는 나라 한 중생도 없는 나라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부처 아닌 것이 없는 나라가 내 나라입니다.
내 나라는 봄도 없고 겨울도 없이 꽃피고 새가 웁니다. 연화(蓮花)의 나라입니다. 아미타경에 나오는 것처럼 가없는 온 국토에 가릉빙가 울고 바람이 불면 무수한 나무들이 흔들려 염불, 염법, 염승하는 나라의 붉은 연꽃은 붉은 빛을 내고 노랑 연꽃은 노란빛을 내고 흰 연꽃은 흰색을 내는 나라가 부처와 조사스님들의 나라입니다.
오 사랑 나의 집은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한 대각세존(大覺世尊)이 되어 사랑을 베푸는 자비의 집을 말합니다. 이런 집은 오로지 내 집뿐입니다. 진정한 벗은 내 자신이요 내 자성(自性)입니다. 이 벗만이 즐겁기 그지없는 단 하나의 내 진실한 벗입니다.
지주남전보원선사문황벽(池州南泉普願禪師問黃蘗)호대 정혜학등(定慧學等)이 명견불성(明見佛性)이라 하니 차리여하(此裡如何)오
황벽(黃蘗)이 운(云)호되 십이시중(十二時中)에 불의의일물(不依倚一物)이니라
사운(師云)호되 막시장로견처마(莫是長老見處?)아
벽(蘗)이 운(云)호되 불감(不敢)이니라.
사운(師云) 장수가(漿水價)는 즉차치(卽且置)하고 초혜전(草鞋錢)은 교십마환(敎什?還)고
벽(蘗)이 부대(不對)라
지주의 남전보원선사가 황벽에게 묻되 “선정과 지혜 등을 배우면 불성을 밝게 본다고 하니 이 이치가 어떠한 것이냐” 하고 물었습니다.
황벽이 대답하기를 “12시 동안에 한 물건에도 의지하지 않습니다” 하니
남전스님이 다시 묻기를 “장노의 견처가 아닌가” 하였습니다.
황벽이 대답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남전선사가 이르되 “장이나 물값은 그만두고 짚신값은 누구 보고 갚으라 하는고” 하였는데 황벽이 대답을 못했다 합니다.
누가 나에게 짚신 값을 갚으라고 한다면 조계산의 단풍은 화전(火田) 배춧잎에서 붉다 하겠습니다.
진일청향요아치(盡日淸香?牙齒)
일신한재오경다(一身寒在五更多)
준구교인불로아(俊狗咬人不露牙)
단단주요옥산호(團團珠?玉珊瑚)
하루 종일 맑은 향기로 치아를 둘렀더니
한 몸뚱이가 새벽마다 더한 추위 속에 있네.
영리한 개는 사람을 물어도 이빨이 드러나지 않고
구슬 같은 이슬이 구르면 옥과 산호가 된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