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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건복지부 조사에 따르면, 2003년 5월 현재 전체노숙자는 4,317명으로 나타났다. IMF 때와 비슷한 수준이다. 쉼터이용자를 제외한 거리노숙자는 2000년 484명, 2001년 694명, 2002년 605명, 2003년 858명으로 3년 새 2배가량 늘어났다.
이 같은 조사결과는 노숙자들이 시설수용을 꺼려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기존 쉼터, 쪽방, 상담센터 등은 단순한 보호시설로서의 기능만 수행하고 있다. 노숙자들의 자활의지를 키워주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여기에 정부는 관련 시설 확충, 쪽방 화재방지 등의 미봉책들만 내놓고 있을 뿐이다.
불교계 노숙자 복지시설은 상황이 더 심각하다. 전국 137개 노숙자 쉼터 중 불교계 시설은 조계종사회복지재단이 운영하는 4곳의 보현의 집과 화엄동산, 자비의 쉼터 등 7~8곳에 불과하다. 더구나 노숙자 무료급식소 운영은 전무하다. 서울역에서 만난 한 40대 노숙자는 “노숙생활 7년 동안 절밥 먹은 것은 단 한번”이라고 말했다.
10월 24~25일 이틀간 서울ㆍ수원ㆍ산본의 지하철 역을 중심으로 노숙자들과 함께 생활하며 현장을 취재했다. ‘내’가 ‘거기’에 있지 않다는 이유로 우리는 그런 현실을 외면해왔다. 취재하면서 느낀 것은 있는 그대로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아무런 편견 없이 ‘낮은 마음’ 그대로.
■“술이랑 밥이 부처고 하나님이지”
노숙자의 삶 속으로
노숙자가 사회문제로 대두된 것은 올해로 7년째. 오늘도 전국 4천3백여 명의 노숙자들이 지하철역과 공원 등에서 알콜에 몸을 내맡긴 채 잠을 청하고 있다. 정신질환자, 복합장애인, 알콜중독자 등이 뒤섞인 이들은 ‘꼬지(앵벌이, 짤짤이, 뺑뺑이 등 노숙자들의 구걸을 총칭함)’와 공공 일용근로직으로 하루하루를 근근이 버텨 나가고 있다.
▲라면박스가 신문지 보다 더 따뜻하다(?)
서울역 지하도에서 4백여 명의 노숙자들 틈에 끼어 저녁을 먹고 회현역에 도착한 것은 밤 11시. 20여 명의 노숙자들이 제각각의 모습으로 잠을 청하고 있었다. 바람을 막으려 머리맡에 라면박스를 세워 놓은 사람, 아예 비닐로 온 몸을 휘감은 사람, 계단을 베개 삼아 누운 사람 등. 그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려는 우리에게 최모씨(42)가 자리 한 켠을 내줬다.
신문지를 깔고 어색하게 웅크리고 있는 우리에게 최씨가 말을 걸어왔다. “어디서 왔어?” 조심스럽기도 했지만 추운 날씨 탓에 말이 더듬거려 졌다. “저기···.” “중국서 왔어? 조선족이야?” 최씨 말에 잘됐다 싶어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측은했는지 최씨가 깔고 있던 뭔가를 쑥 밀어줬다. 라면박스였다. “신문지 보다 이게 더 따뜻해.” 고맙다는 표시로 술을 대접하겠다고 하자 최씨는 흔쾌히 응했다. 소주 몇 잔이 오가자 얼큰하게 술이 오른 최씨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그의 사연은 기구했다. 고아였던 최씨. 3살 때부터 길러준 양부모가 죽자 막노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현실은 만만치 않았다. 가난은 늘 그대로 였다. “돈 많이 벌어서 결혼도 하고 싶었는데···.” 예상외로 최씨의 표정은 무덤덤했다. 밑바닥 삶에 저항조차 하지 못하는 무기력함.
▲IMF, 신용불량···굶주림 가슴이 시리다
최씨에게서 회현역과 서울역 노숙자들의 생활을 들을 수 있었다. “서울역에서 난장까는(노숙자들은 노숙하는 것을 ‘난장깐다’고 표현했다) 사람들은 술 마시고 싸움질만 해. 그나마 여기는 잠 잘만 해. 그래도 살아보겠다고 일 나가는 사람들 때문이지.”
최씨는 회현역 노숙자들의 우두머리 격인 박모(72) 할아버지 이야기를 꺼냈다. 젊은 시절 육군 대위를 지내고 외국영사관에서 무관으로 근무한 박 할아버지. 그가 노숙자로 내몰린 것은 바로 가정파탄 때문이었다. “저 영감, 큰 아들 죽고 나서 부인과 자주 다투다가 결국 이혼했다는구만. 자식들 학대에 견디다 못해 뛰쳐나온 곳이 회현역이야.”
노숙자 서너 명이 술판에 합류했다. 젊은 노숙자 권모씨(25) 이야기는 가슴을 시리게 했다. 25살에 길거리 생활 7년을 맞는 권씨. 부모가 누군지도 모른다고 했다. 돈이 없어 중학교를 중퇴했지만 지방에서 K자동차회사 협력업체에 근무하면서 학업에 대한 꿈을 키웠다. 그러나 97년 IMF는 권씨의 꿈을 송두리 채 꺾어 버렸다. 18살, 대방역서 노숙생활을 시작한 권씨는 7년이나 계속된 굶주림, 뼈를 파고드는 추위, 다른 노숙자들의 폭행에 이젠 더 이상 삶의 의지가 없어 보였다.
신용불량자 김모씨(38), 중소기업을 경영하던 강모씨(46), 2급 신체장애인 서모씨(54), 중국에서 위장결혼을 하고 온 정모씨(47). 이들도 긴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저마다의 사연을 털어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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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두 시간 잤을까. 요란한 굉음을 내며 올라가는 지하철 개찰구 샷터 소리에 깨어보니 새벽 4시30분이다. 덮고 있던 신문지가 무겁게 느껴졌다.
일어나자마자 이들이 달려간 곳은 화장실. 세면을 위해서였다. ‘좌장’ 박 할아버지가 세면을 마치자 기다리던 노숙자들이 씻기 시작했다. 시커먼 얼굴을 비누로 문질러 보지만 오랜 노숙생활로 찌든 때는 그대로 였다. 세면을 마친 최씨가 라면박스와 신문지를 주섬주섬 챙겼다. 오늘도 이들에 의지해 밤을 나야하기 때문이다.
아침 7시. 수원행 전동차에 올랐다. 최씨가 소개시켜준 박 할아버지를 따라 수원역 근처 교회에 아침을 먹으러 가는 길이다. 손톱 밑을 파고든 새까만 때, 찌든 때로 전동차 불빛에 반짝거리는 옷깃, 구멍 나고 찢어진 바지, 이곳저곳 아무렇게나 눌려버린 회색빛 머리. 승객들이 노약자석 근처에 모여 있는 우리를 보자 코를 막고 저만큼 물러선다.
승객들의 태도에 아랑곳하지 않고 박 할아버지는 노숙자들의 하루에 대해 설명했다. 그는 노숙자들이 주로 아침 6시 서울역에서 무료급식을 먹거나 수원, 성남 야탑역 근처 교회에서 아침을 먹고 곧바로 꼬지를 하러나간다고 했다. “점심도 교회에서 무료급식으로 때워. 그리고 각자 흩어져 다시 구걸로 돈을 번 다음, 밤 8시에 서울역에 모여 술판을 벌이거나 자는 게 하루일과야.”
박 할아버지는 당부의 말도 잊지 않았다. “잘 먹어야 돼. 조금 멀다고 해서 밥 먹는거 게을리 하면 안돼. 올 초에 젊은 놈 하나가 밥 안 챙겨 먹고 술만 퍼먹다가 결국은 얼어 죽었어. 시체는 찾아가는 사람이 없어서 ○○대병원에 해부용으로 실려 갔어.”
수원 ○교회는 아침을 먹기 위해 찾아온 노숙자들로 붐볐다. 컵라면과 김밥. 얇고 가는 김밥은 단무지와 시금치, 계란만이 속을 채우고 있었다. 서울역, 을지로역, 시청역, 종묘공원, 영등포역 등에서 몰려온 2백여 노숙자들은 한끼 식사를 위해 하나님을 찾았다.
두 손을 꼭 모으고 연신 ‘아멘’을 외치는 박 할아버지에게 개신교 신자냐고 물었다. 박 할아버지는 대뜸 “술이랑 밥이 부처고 하나님이지”라며 김밥을 입속에 우겨 넣었다.
▲차 부서진 것에만 속상하겠지
교회에서 끼니를 때운 노숙자들과 함께 간 곳은 금정역. ‘꼬지’를 위해서였다. 노숙자들의 발걸음은 빨랐다. 얼굴에는 비장함 마저 배여 있었다. ‘꼬지’로 돈을 구걸하지 못하면 오늘 하루 생계 꾸리기도 힘들기 때문이다.
절박함은 고스란히 빠른 발걸음으로 이어졌다. 다른 노숙자들 보다 더 빨리 교회와 성당들을 돌기 위해 자동차들이 질주하는 8차선 대로를 그냥 가로질렀다. 보기에도 아찔하다. “위험한 거 알지. 이렇게 다니다 차에 받치면 그냥 죽는 거야. 가족이 없어서 보상도 못 받아. 우리 보다는 자기들 차가 부서진 것이 더 속상하겠지.” 서씨의 말이 서럽게 들렸다.
이들이 꼬지를 통해 하루에 버는 돈은 고작 4~5천원. 이나마도 오전 11시까지 역 주변 모든 교회와 성당을 돌아야 벌 수 있다. 교회는 대개 5백~1천 원을, 성당은 2백 원을 노숙자들 손에 쥐어줬다. 이들은 이 돈으로 소주를 마신다. 이젠 사회도, 떨꺼둥이 자신들도 무감각해진 ‘거리의 삶’. 그렇게 오늘 하루가 다시 시작됐다. 언제까지인지조차 모르면서.
사진=박재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