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의도/춘천 교육대학교 교수, 문학박사
우리 겨레는 오랫동안 한자를 빌려 우리 언어를 기록했다. 15세기에 이르러 세종은 ‘우리말을 우리말답게 자유롭게 표기할 수 있는 문자’, ‘온 백성이 쉽게 부려 쓸 수 있는 문자’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1443년 음력 12월에 새 문자를 완성했고, ‘훈민정음’이라 이름 하였다. 뒤이어 해설서 <훈민정음>을 편찬하여 그것과 함께 1446년 10월 9일에 새 문자를 세상에 반포하였다.
그러나 한자·한문에 길든 사대부 중에는 훈민정음을 외면하거나 폄하하는 태도를 취하는 사람이 많았다. 훈민정음이 실용화되고 정보가 공유되면 자신들의 지위가 위협받을 것을 염려한 이유가 컸다. 연산군 때에는 훈민정음으로 된 수많은 책들이 불살라지기도 하였다.
그런 속에서도 우리 언어와 훈민정음으로 소설이 생산되고, 가사와 시조가 지어졌다. 서민은 말할 것도 없고, 유학자와 왕비, 임금도 훈민정음으로 편지를 썼다. 궁체라는 글씨예술까지 생겨났다. 일부의 표면적인 현상과는 달리, 훈민정음은 많은 겨레의 가슴과 생활 속 깊이 자리잡아 갔다.
끝내 일본에게 국권을 빼앗기자 뜻 있는 이들이 조선어 학회로 모여들었다. 한글과 우리 언어를 가다듬고 지켰다. 피나는 노력의 덕택으로, 포악한 왜정 밑에서도 한글과 우리 언어는 살아 남을 수 있었다.
한글은 이렇게 550여 년을 헤쳐 왔다. 그것은 겨레와 다수의 행복을 위한 투쟁의 길이었다. 그러나 투쟁은 끝나지 않았다. 아직도 한자 사대주의가 서성이는 가운데, 서양의 로마자가 한창 기세를 올리고 있다. “A/S, BC, S/W, VJ, H.P, Fax, SALE, coffee, …” 들이 일상에 흘러 넘치고 있다. 또 다른 사대주의의 등장이다.
그것만이 아니다. 컴퓨터와 인터넷 공간에서는 한글 맞춤법을 무시하거나 파괴하는 현상이 확대·재생산되고 있다.
정부부처는 물론 한글교육을 담당하는 교육인적자원부와 문화관광부 조차 인터넷 홈페이지에서 국어를 오용하는 사례가 적지 않아 문제의 심각성을 더해주고 있다. 국립국어연구원의 자료에 따르면, 21개 정부부처 홈페이지의 어문규범 실태를 조사한 결과 무려 116곳에서 오류를 발견했다고 한다. 띄어쓰기는 774곳이 잘못 표기됐다. 또 한글 표기를 병기하지 않거나 영어나 한자어만 표기한 예도 많았다.
뿐만 아니라 공영방송의 국어 오용실태도 심각한 수준이다. 비속어와 국적없는 외래어 사용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으로 조사됐다.
무시와 파괴의 정도도 예사로운 수준이 아니다. 2001년 12월에 발행된 한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인터넷 통신에 등장하는 “안녕하세요”의 표기 형태가 “안냐세염, 안뇽하세욥”을 비롯하여 18개나 더 있다고 한다. 지금은 더 늘어났을 것이다. 이렇게 가다가는 한자 읽기보다 어렵고, 영어보다 더 어려워질지도 모른다.
우리 겨레의 역사는 ‘정보 공유의 확대’라는 가치를 추구해 왔다. 거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한글이다. 한글의 사용을 확대하고 한글 맞춤법을 제정한 것은, 그것이 정보의 공유와 교류를 원활히 하는 바탕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국제화라는 명제하에 입만 열면 국적 없는 영어를 섞어 쓰는 것은 한민족의 글과 말을 망치는 일이다.
오늘날 한글은 어느 때보다 심각한 도전과 복합적인 문제에 직면해 있다. 21세기와 함께 우리 앞에 펼쳐진 정보·지식 기반 사회에서 주체적으로 살아가려면, 이 같은 도전과 문제를 슬기롭게 극복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