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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그맨 신동엽의 짓궂은 장난도 수줍은 웃음으로 털고,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아이들에게 ‘아빠’를 자청하기도 하는 이창하(47ㆍ이창하 디자인 연구소 소장)씨는 ‘인간미 넘치는 건축가’ 타이틀이 제격인 인물이다. 어눌한 듯하면서도 설계방향을 자분자분 일러주는 모습에선 건축전문가의 후광까지 일어 ‘이 사람은 정말 어떤 사람일까’라는 의문이 절로 샘솟는다.
“설계와 디자인을 업으로 삼고 사는 사람 중 하나일 뿐입니다. 부처님 인연으로 시작한 일, 매순간 부끄럽지 않게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하면서 사는 평범한 사람이지요.”
자신의 일을 부처님 인연으로 끌어가는 이 씨. 그저 불자이기에 내던진 말이겠지 생각했지만, 이어지는 얘기가 점점 깊이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속세에 있는 몸이라고 해도 족보로 치면 금오스님의 손상좌 뻘 됩니다. 조계종 원로의원 범행스님은 은사스님 격이고 전 법주사 주지 혜광스님은 사형 정도 될 겁니다.”
그의 남다른 불연(佛緣)은 금오스님으로부터 시작됐다. 어려서부터 어머니와 누이가 금오스님을 시봉하는 것을 보며 저도 모르게 불심에 젖어들엇다. 그래서 금오스님 상좌인 범행스님을 비롯, 그 문중 스님들과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며 불교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됐다.
그러한 가운데 만나게 된 것이 ‘단청’. 어릴 때부터 굿판에 필요한 그림을 도맡아 그릴 정도로 미술에 뛰어난 감각을 보이던 그는, 고건축에 색을 입히는 ‘단청’에 매료돼 사찰을 드나들기 시작했다. 그러다 단청장 만봉스님에게 사사받으며 단청에 대한 꿈을 본격적으로 키우게 됐다. 남원 실상사를 찾아 행자생활을 자청, 꼬박 3년을 머무르며 단청을 공부했다. 세월을 묻고 세월을 치르는 단청의 미(美)가 그리 좋을 수 없었다. 그러나 3년의 세월 끝에 내린 결론은 허무했다.
“그때까지 그림에 관한 한 제가 최고인 줄 알았는데, 3년을 겪고 나니 그게 아니더군요. 단청 문양 앞에서는 그 어떤 창작도 이루질 못했어요. 기존 문양을 넘어설 자신이 없었습니다.”
내적 한계에 부딪힌 그는 몇몇 스님들과 만행을 떠났다. 그러다 봉암사에 이르러 대웅전 상량식을 보는 순간, ‘건축’이라는 새로운 길을 보게 됐다. 단청으로 나를 풀어내려는 것은 한낱 집착에 지나지 않았음도 깨달았다. 그는 그 길로 절에서 나와 세계의 건축을 공부하러 떠났고, 6여 년의 준비기간 끝에 미국에서 건축가로 정착하게 됐다.
이후 그는 초심을 지키며 특급호텔 등의 굵직굵직한 설계에서 기량을 발휘해 실력을 인정받았다. 외국에서 건축의 기초를 닦았기에 유럽 취향의 호텔과 리조트 설계에 쉽게 발맞추어 나갈 수 있었다. 그리고 불교를 몸으로 느끼던 젊은 날의 체험 역시 디자인 바탕에 오롯이 녹아들어, 여타 건축가와 구분되는 아우라(Aura: 예술 작품의 고고한 분위기)를 생산해 낼 수도 있었다.
“생명을 담은 고건축의 힘을 요즈음 새삼 느끼고 있어요. 자연을 호흡할 수 있는 건축, 자연의 일원이 되는 건축을 생각하다보니 사찰건축과 점점 가까워지더군요. 그래서 부처와 나, 그리고 자연이 하나되는 느낌을 현대 건축으로 풀어내는 것을 새 과제로 삼게 됐죠.”
그의 이 같은 생각은 ‘러브 하우스’ 설계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빛과 바람을 측정해서 건물을 짓는 것은 기본이고, 공기의 흐름도 최대한 자연의 리듬에 맞추기로 했다. 또한 참나를 추구하는 불법을 화두 삼아 ‘본연의 나를 찾을 수 있는 공간’ 설계에도 많은 노력을 쏟아부었다. 이를 위해 공간에 머물 사람들과의 대화 시간을 설계의 중요 과정으로 삼고, 집을 철거할 때도 ‘이곳이 그네들에게 어떤 의미였을까’를 짚어보는 일을 잊지 않는다. 아무리 허술한 공간일지언정 그들의 과거와 현재가 어떤 형태로든 녹아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상주 현정사의 담장을 쌓으며 불연을 되새기고 있다는 이 씨. 대학에서 강의하랴 러브하우스 설계하랴 쏟아지는 건축의뢰에 일일이 응하랴 하루도 편할 날이 없지만, “열일 제쳐두고서라도 현정사 담장은 확실히 할 것”이라고 말한다. 정신적 고향에 언제나 깊은 마음으로 힘이 되고 싶은 것이 그의 몇 안 되는 바람이기에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