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5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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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량 가득 화엄세계 조계종 영산재 재현
홍색가사가 아닌 괴색가사를 입은 스님이 바라춤을 춘다. 법고춤을 춘다. 멈춘 듯 이어지는 법우스님의 법고춤에 청중의 호흡도 끊어지고, 법고를 두드리는 춤사위에 청중은 박수로 화답한다. 9월 28일 오전 9시. 이곳은 조계사 대웅전 앞마당. 영산재가 재현되는 현장이다.

불사로 어수선하던 대웅전 앞마당이 오늘만큼은 각종 장엄으로 한껏 멋을 냈다. 대웅전 앞마당은 이미 영산재에 동참하기 위해 자리를 잡은 천 여명의 신도들로 가득하다. 재에 참가할 여러 부처님과 이를 호위하는 신중이 그려진 거대한 괘불과 여러 불·보살의 명호를 적은 당번, 부처님께 바치는 오색 지화(紙花), 죽은 자가 쓸 저승 노잣돈인 대형 지전(紙錢)으로 경내는 이미 야단법석(野壇法席)이다. 야외법회를 의미하던 야단법석이 소란스런 대중모임으로 뜻이 바뀐 것은 과거 영산재와 같은 불교의식이 얼마나 대중적인 행사였는지를 증명해준다.

누군가 정성스레 울린 법고소리가 영산재의 시작을 알린다. 시련(侍輦) 의식. 대중은 연(輦, 가마)을 들고 나무대성인로왕보살의 인도로 절 입구로 나선다. 오늘의 어장(魚丈)인 동주, 동희스님을 위시하여 영산재를 재현할 스님들과 이를 따르는 대중의 행렬이 길게 늘어섰다. 절 입구에서는 게송을 제창하고 바라춤과 나비춤으로 불·보살과 옹호신중·영가를 모신다.

이어 영혼에게 간단한 법식(法食)을 베풀어 대접하는 대령(對靈)과 불단에 나가 법문을 듣기 전에 영혼이 세속에서 탐진치(貪瞋癡) 삼독으로 더럽혀진 업장을 깨끗이 씻는 관욕(灌浴)이 이어진다. 병풍으로 가린 관욕소 안에서 영혼을 씻기는 동안, 병풍 밖에서는 진언에 따라 결수(結手, 손가락을 여러 모양으로 구부려 깨달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형식)를 진행한다.

괘불을 야외로 모셔오는 괘불이운(掛佛移運)과 함께, 신도들의 영단참배가 이어진다. 옛날 보살들은 일생에 괘불탱을 3번만 보면 극락왕생한다 해서 몇 백리 길을 걸었단다. 오늘 참배하려는 신도의 행렬도 그만큼이나 길다. 두 손을 곱게 모은 보살이 괘불탱을 바라보는 표정이 자못 장엄해 보인다.

다음은 영산재에만 있는 식당작법(食堂作法). 재공양의 다른 절차와 달리 철저한 수행을 통해 대중의 공양에 보답하는 마음과 대중구제의 원을 담은 ‘수행의례’다. 공양이 이 자리에 오기까지 시자(施者, 공양을 베푸는 자)·수자(受者, 공양을 받는 자)·시물(施物, 공양물)의 공덕과 불·법·승을 생각하고, 배고픔에 고통받는 아귀중생에까지 공양을 베풀어 부처님의 참된 가르침을 깨닫게 하는 과정이다. 식당작법은 범종, 법고, 목어, 운판의 사물(四物)과 범패, 홋소리, 짓소리, 타주춤 등의 작법이 어우러져, 영산재에서 가장 화려한 의식으로 꼽힌다.

오후의식은 봉선사 조실 월운스님의 법문으로 시작됐다. 월운스님은 “종교에 의식이 없는 것은 군인에게 구령이 없는 것과 같다”며 “오늘 의식을 준비해 온 스님들께 박수를 부탁드린다”는 말로 영산재 재현의 축하를 대신했다.

오후에는 5시간동안 부처님께 공양을 드리고 영가 왕생을 기원하는 불공이 진행됐다. 연향게, 서찬게, 합장게, 복청게 등 부처님의 공덕을 찬양하는 소리와 천수바라, 삼귀, 내림게바라 등의 춤사위는 보는 이에게 영산재의 의미를 되새기게 만든다. 높지도 낮지도 않은 범패 장단은 태풍 매미로 인해 희생된 이들의 영혼을 달래는 마음으로 변해 영산재 도량을 가득 매웠다.

이어 영가에게 마지막 가는 길에 법식을 베풀어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시식(施食)과 의식에 사용된 각종 장엄구와 영가 위패를 사르는 의식으로 영산재는 막을 내렸다.

오늘 영산재는 하루 동안 계속된 의식만큼이나 영산재를 둘러싼 조계종과 태고종의 관계에 관심이 집중됐다. 조-태 갈등의 골을 영산재가 메우느냐, 더 깊이 패느냐하는 언론의 상반된 예측이 분분했기 때문이다.

향후 문제에 대한 예측은 차치하고, 오늘의 행사만을 본다면 갈등의 골을 메우는 모습이다. 동희스님이 바깥소리 가운데 회심곡을 부를 때 태고종 구해스님이 북을 치며, 조계종과 태고종 스님이 영산재로 하나되는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구해스님은 “조계종 스님들이지만, 같은 스승에게서 영산재를 사사한 제자들이다”라며 “종단간의 문제보다는 잊혀져가는 불교 문화을 전승하고 보존하겠다는 움직임을 축하하기 위해 그 자리에 참석했다”고 말했다. 이날 행사를 시작하며 조계종 문화부장 탁연스님이 “지금까지 영산재를 잘 지켜주신 태고종과 스님들께 감사하다”고 건낸 인사말도 같은 맥락이다.

행사를 마친 동주스님은 “영산재를 준비하는 과정과 하루의 재현이 힘들었지만 단절돼 가는 영산재를 살린다는 뜻으로 행사를 끝까지 치뤘다”며 “종단과 사회의 계속적인 관심이 영산재의 가치를 살리는 길”이라고 감회를 밝혔다.

영산재를 지켜 본 신도들은 어떤 느낌을 가졌을까. 이은화(62) 보살은 “불자로서 불교의식에도 관심이 많아, 안산에서 영산재를 보러왔다”며 “오늘 행사가 여법하게 진행돼 기쁘지만, 의식에 대한 설명이 부족해 일반 신도들은 이해가 어려웠다”고 아쉬움을 나타냈다.
오유진 기자 | e_exist@buddhapia.com
2003-10-06 오전 9: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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