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도 보지 않고 좌선도 않으면서/ 말없이 마주하고 있는 것은 어떤 종취(宗趣)인가/ 바람 흐르지 않는 곳에 바람 넘치고 있으니/ 푸른 산봉우리에 천년 빼어난 고송(古松)이로다”
근대 한국불교계의 큰 스승이었던 한암 중원선사께서 고송 종협선사에게 내린 전법게를 번역한 것이다.
지난 9월 22일 한국 불교계의 거목이 한그루 쓰러졌다. 그 나무는 천년 묶은 고송이었다. 고송은 경망한 마음에 뛰어 넘을 수 없는 시간의 무게를 전달해 준다. 때문에 고송을 보는 것만으로도 3독에 가려 헐떡이는 우리들의 삶을 되돌아보게 한다. 고송은 세월의 풍상을 겪으면서도 지조를 지킬 수 있다는 무언의 가르침을 주기에 어렸을 적 뛰어 놀던 자상한 할아버지의 무릎을 생각하게 한다. 그런 고송이 쓰러졌다.
필자는 십여 년 전 오대산 월정사에서 스님을 뵙고 동해안 낙산사와 신흥사를 함께 여행한 적이 있다. 당시 스님은 눈빛이 형형했으며, 청빈함이 묻어나는 감색물을 들인 승복을 입고 계셨다. 말씀은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말하듯 자상하면서도 간결했으며, 권위의식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박사과정에서 불교를 공부하고 있던 필자에게 무언의 행동으로 지도와 경책을 아끼지 않았다. 껍데기 불교인이 되지 말라는.
조계종 원로의원은 5일장을 하는 것이 관례다. 그렇지만 스님의 장례는 유언에 따라 3일장으로 간소하게 마쳤다. 남을 번거롭게 하지 않고, 태풍으로 실의에 빠진 수재민들의 아픔을 함께 한다는 생각에서다. 마지막까지 출가자의 본분과 보살정신을 보여주신 것이다.
오고가는 것이 없는 것이 법신이지만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해 오고가는 것을 보이는 것 역시 법신의 속성이다. 그래서 보임과 보이지 않음이 둘이 아니다. 이제 형상의 고송은 쓰러져 우리들 곁을 떠나갔지만 무형상의 천년 고송이 미망 중생들을 인도하리라 본다.
차차석(현대불교 상임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