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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승군 영규 대사 업적 재조명 활발
임진왜란 당시 의승과 의병들을 규합해 왜군으로부터 청주성을 탈환했던 의승장 기허당 영규 대사(?-1592) 열반일인 9월 14일(음 8월 18일)을 맞아 추모제 및 재조명작업이 전국적으로 활발하게 펼쳐지고 있다.

조계종 중앙종회(종회의장 지하)는 7월 4일 임진왜란 당시 사망한 승군 800명, 의병 700명 등 1500명을 추모하는 순국충혼 위령탑 건립을 위한 청원서를 국회에 접수했다. 중앙종회의원스님들은 3월 28일 “정부는 국가와 민족의 이름으로 순국충혼 위령탑을 건립하고, 영정을 모시는 사당을 건립해야 한다”는 결의문을 채택한바 있다. 국회의 절차만 남겨두고 있는 순국충혼 위령탑이 건립될 경우 영규대사와 칠백의승에 대한 역사적 의미를 되살리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현재 위령탑은 세종대왕, 이순신 장군, 칠백의총에 건립돼 있다.

임진왜란 직전 영규 대사가 중건했으며 승군훈련사찰이었던 옥천 가산사(주지 지승)는 9월 14일 영규 대사 서거일을 추모하는 추모제를 봉행할 예정이다. 이와 함께 가산사는 약 2만여평의 부지를 매입하고, 영규대사 순국충혼 위령탑 및 기념관, 전시관 건립불사를 계획하고 있다. 가산사는 영규 대사 영정이 안치된 영정각(충북기념물 115호)과 산신각을 해체한뒤 가산사 인근에 영규 대사 사당과 청소년복지시설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계룡산 갑사(주지 장곡)는 11월 2일 영규 대사 추모제를 봉행할 예정이다. 갑사 신행모임 인 영규대사 보존 현창회도 전사지인 공주 계룡면 유평리 묘소에서 9월경 제향을 올릴 계획이다. 이밖에도 옥천사암연합회는 9월 중 옥천 관성회관에서 중봉충렬제의 일환으로 영규대사 추모제를 개최할 예정이다.
영규대사의 영정을 모시게 되면서 호국사찰로 지정된 밀양 표충사(주지 혜오)도 10월 1일 표충서원에서 추계향사를 지낼 예정이다.

또 청주성탈환추모사업회는 23일 공주 갑사, 유평리 등 영규 대사 전적지 순례행사도 마련할 예정이다. 이에 앞서 사업회는 9월 6일 청주 중앙공원 전적비 앞에서 청주성 탈환 411주년 추모대제를 열고, 금산전투에서 순국한 영규 대사와 승병들의 뜻을 기렸다. 사업회는 부대행사로 사진전, 기념공연, 경로잔치 등을 개최했다.

청주청원사암연합회는 6일 무심천체육공원에서 불자가수 정태춘, 박은옥 씨 등을 초청, 영규 대사 청주성 탈환 기념 산사음악회를 개최했다.

0 기허당 영규대사는?

기허당 영규대사는 조선시대 고승으로 속성은 박씨, 속명은 영규, 호는 기허당. 공주시 계룡면 봉명리에서 태어난 영규대사는 공주 갑사에서 서산대사의 제자로 출가했다. 대사는 갑사 청운암에 주석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승군 800명을 규합하여, 청주성을 탈환하는 등 공을 세웠으나 선조 25년(1592) 금산성 전투에서 전사했다. 스님은 입적후 종2품 당상관 중추부사의 직위를 하사받았다.

스님의 영정은 해인사 영자전, 갑사 진영각, 표충사 표충서원, 보석사 의선각등에 모셔져 있다. 보석사에는 또 기허당 영규대사의 충혼을 기리는 위병승장비가 세워져 있다.

0 역사에 묻혀온 영규대사와 800 의승은?

영규대사와 800 승병의 이야기가 일반국민들에게 알려진 것은 2000년. 계룡산 갑사(주지 장곡)가 기허당 영규대사(?~1592) 열반이후 처음으로 대제를 지내고, 학술회의를 열면서 부각됐다.

임진왜란당시 승병이 전투에 참여한 것은 영규스님의 부대가 최초이다. 영규대사를 비롯한 승병 8백여명은 의병장 조헌의 700의병과 함께 일본군이 차지한 청주성을 공격했다. 이후 금산성으로 진격했다. 이 과정에서 영규스님은 중과부적임을 알고 조헌에게 전라감사 권율에게 편지를 보내 1592년 8월 17일 금산성 공격을 결정하였음을 알리고 협조를 당부할 것을 말했다. 그러나 조헌은 권율의 회답을 기다리지 않고 또 영규스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금산성을 섣불리 공격했다. 이 전투에서 조헌이 들판을 결전장소로 결정하자 영규스님는 병법에 맞지 않는 곳이니 산등성이로 옮기자고 요청했다고 한다. 그러나 조헌은 속내로 자신이 순절하면 이곳이 사당을 지을 명당터라고 생각하고 말을 듣지 않았다 한다.
조헌이 적군의 칼날에 쓰러지자 휘하 장수가 영규스님에게 후퇴를 권유하였으나 뿌리치고 분전하다 전사했다. 영규스님는 “젊은 선비와 함께 전투를 벌여 죽게 되었다”고 한탄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스님을 천대했던 조선왕조의 숭유억불정책으로 인해 영규대사와 800명의 의승은 제대로 조명을 받지 못했으며, 오늘날에도 스님들의 공적은 거의 묻혀져 왔다. 금산의 7백의총에서도 조헌과 700 의사만 있고 영규대사와 800 의승의 흔적은 찾아볼 길이 없는 현실이다.
김원우 기자 | wwkim@buddhapia.com |
2003-09-05 오전 8:4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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