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후 이근후 열린마음의원 원장
자살,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인위적으로 마감하는 것을 말하리라. 자살하는 사람을 두고 아웃사이더들은 이렇게 말한다. “오죽했으면 죽음을 택하겠는가” 혹은 “죽을 용기가 있다면 그 용기로 살지”라며 당사자는 죽음을 통해 말이 없고 산자들이 모여 이런저런 시나리오를 만들어 뒤집어 씌운다.
이 두 번외자들의 시나리오를 생각하면서 최근 잇달아 보도되고 있는 자살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본다. 신문에도 나지 않고 생을 마감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사회에 큰 충격을 남기고 자살한 재벌의 총수도 있다.
이름이 있건 없건 간에 자살이라는 행동을 선택한 결과는 동일하다. 선택하게 된 연유는 제각기 인생이 다르듯 다른 의미를 지니겠지만 외형상 우리들에게 남기고 보여주는 모습은 같아 보인다. “오죽했으면 자살을 했을까”라는 반응은 자살이 적어도 자신의 선택이긴 하지만 자신만의 책임은 아니라는 뉘앙스를 풍긴다.
불가에서는 생명존중사상을 바탕에 깔고 가르치기 때문에 자살이던 타살이던 하찮은 벌레의 생명에 이르기까지 살생을 금하는 가르침을 준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살이라고 해도 이런 생명외경사상에 어긋나는 행동으로 와 닿는다.
그러나 “오죽했으면”하는 전제를 우리들은 심각하게 되뇌어 보아야 한다. 아무리 근기가 강한 자아를 지닌 사람이라고 해도 그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적 요인이 그를 압박해 간다면 그는 죽음 이외의 방법을 선택할 여지가 없을 수도 있을 것이다. 같은 환경이라도 이를 극복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에 좌절하는 분들도 있게 마련이다. 따라서 개인은 모두 정서적 면역의 차이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지금처럼 사회가 병들어 있는 정신분열증적 사회환경이라면 이런 압박에도 불구하고 자살하지 않는 사람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이다. 미리 짜여진 미로게임처럼 미로 속에 갇힌 개인은 그 막다른 골목의 좌절에서 죽음으로 내몰리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이다. 내 몰린 죽음이 자살일까 타살일까! 꼭 남이 자신을 살해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내면 속에 있는 또다른 자아에 의해 죽음에 내 몰린다면 이는 분명한 살인일 것이다. 사회적인 살인이란 이름을 붙이고 싶다.
정신분석학에서는 인간의 본능을 죽음의 본능과 삶의 본능이 있다고 말한다. 이 두 본능적 에너지가 서로 조화를 이룰 때 건강한 인격이 성장하는 것으로 가정한다. 사회적 환경의 압박에 따라서 개개인은 자살과 극복을 선택하지만 이는 오로지 압박의 강도가 문제가 된다. 꿈이 없거나 자존감의 손상이나 삶의 가치를 잃는 등 자괴된 자아라면 죽음의 본능이 손짓할 것이다. “죽을 용기를 갖고”라는 말도 산자의 시이야기일 뿐이다. 자살에서의 죽음은 용기와는 다르다. 자신이 자의로 선택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선택이라기 보단 그런 외부 또는 내면적인 압박에 내어 몰려 벼랑 끝에서 추락하는 것이니 어찌 선택이란 말을 쓸 수 있겠는가. 죽음은 선택도 아니고 용기도 아니다.
요즈음 신문지상을 오르내리는 자살을 보도하는 자세가 너무나 이분법적인 논리로 보도된 경우가 너무나 많다. 자살은 그렇게 단순하고 이분법적인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아주 복잡한 마음의 역동성을 이해하지 않으면 풀어갈 수 없는 죽음이다.
우리들은 최근에 와서 생명의 존엄과 자비로움에 대해 너무 무감각해진 것은 아닌지 돌아볼 계기로 삼아야 한다. 나와 남, 나아가 뭇 생명에 이르기까지 생명의 존엄한 가치를 되새겨 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