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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마을 준공 심포지엄 등 행사 다채
8월 8일 개원한 만해마을 내의 만해사 서원보전에서 불상 점안식이 봉행됐다. 사진=박재완 기자
만해 스님이 26세에 출가한 도량인 설악산 백담사. 이곳에서 8월 8~10일까지 열린 ‘제5회 만해축전’은 올해 2천여평의 부지에 새롭게 조성된 ‘만해마을’에서 성황리에 회향됐다.

이날 행사는 8일 고은ㆍ김남조ㆍ신경림ㆍ황동규ㆍ이근배ㆍ정현종 등 원로ㆍ중진 문학가들을 비롯해 5백여 시인이 함께한 ‘시인학교 입교식’으로 시작됐다. 이 자리에서 고은 만해축전 대회장은 “만해 스님이 남긴 문학과 종교, 민족정신의 존엄성은 국내외 여러지역에서 보편적인 가치로 뿌리내릴 만큼 확고해 졌다”며 “그의 간절한 시혼과 치열했던 민족정신을 다양한 행사를 통해 느껴보길 바란다”고 대회사를 밝혔다.

이번 행사의 하이라이트는 9일 열렸던 ‘만해마을 준공식’과 ‘제7회 만해대상 시상식’이었다. 만해마을의 공식 개관을 알리는 준공식에는 조동룡 만해사상실천선양회 사무총장의 경과보고, 녹원 직지사 회주 스님, 이수성 前 국무총리 등의 축사가 있었다. 이어 법장 조계종 총무원장 스님은 법어를 통해 “우리가 매년 만해 축전을 여는 것은 민족의 앞날을 위해 고민과 선택의 기로에서 택했던 만해선사의 안목과 결단을 배우기 위함이다”며 “비록 힘들고 고통스러운 길이라도 양심과 진리와 정의의 입장에서 결단을 내렸던 스님의 정신을 본받자”고 당부했다.

이어 열린 만해대상 시상식에서 만해대상은 김대중 前 대통령(평화부문), 김윤식 서울대 명예교수(학술부문), 소설가 조정래씨(문학부문), 이애주 서울대 교수(예술부문)가 각각 받았다. 이번 행사기간중에는 문학ㆍ학술ㆍ서예 전시 등 다양한 문화행사가 열렸는데 이중 만해와 불교를 주제로 한 3개의 학술 심포지엄에서는 각계 전문가들이 참여해 열띤 토론을 펼쳐 눈길을 끌었다. 심포지엄의 주요 내용을 정리했다.

■만해학 심포지엄(1)-‘만해의 정치ㆍ사회사상’

△한용운의 정치사상에 관한 연구(윤세원 인천전문대 교수)=만해는 자유를 인간의 본성으로 보았다. 자율적 통일체요 집단적 개인인 민족도 개인의 자유와 같은 의미에서 자기결정의 자유와 각 단위 민족국가가 각기 독립해야 하는 근거로서의 평등을 강조하는 논지를 전개했다. 그의 핵심가치인 자유는 원천적으로 불교적 가치이고, 이 종교적 가치가 정치적 가치로 외연이 확장되는 논리구조의 버팀목은 바로 깨달음과 무아라는 연기론적 인간관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논리구조는 다양한 그의 활동영역과 모든 실천운동을 통합해 주고 내적 일관성을 유지시켜 주는 축이었고, 그의 철저한 자주정신의 탯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사회진화론과 만해의 사회사상(유승무 중앙승가대 교수)=<조선불교유신론>의 분석을 통해 사회진화론과 만해의 사회사상이 어떻게 연관돼 있는 지를 요약해 보았다. 첫째, 만해는 사회진화론을 민족독립과 불교개혁이라는 실천적 목적에서 수용했다. 둘째, 만해의 불교개혁활동의 청사진이라 할 수 있는 <조선불교유신론>은 사회진화론과 ‘많이 그리고 깊이’ 관련돼 있다. 셋째, <조선불교유신론>은 크게 두 가지 한계, 즉 불교사상과 사회진화론 사이의 사상적 모순 및 사회진화론적 불교유신의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었다.

△만해 한용운의 불교적 ‘노마돌로지’에 나타난 근대성과 탈근대성(장시기 동국대 교수)=‘노마돌로지(nomadology)’는 ‘어디로 가든지 당신 마음대로’ 즉 걸림없는 것을 뜻한다. 만해의 삶은 끊임없는 탈영토화와 재영토화의 과정 속에 있었다. 이런 만해의 삶과 문학, 그리고 유교의 국가철학에 의해 변질된 근대초기의 조선 불교를 개혁하고자 했던 그의 불교사상을 우리의 삶과 지식의 인식론적 체계속으로 끌어들이는 작업은 전지구적인 탈근대의 탈식민주의, 페미니즘, 그리고 생태주의가 들뢰즈의 노마돌로지를 그들의 이론과 실천에 끌어들이려는 것과 마찬가지로 서구적 근대로부터 벗어나 전 지구적 탈근대성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만해 한용운 선사의 민족정신에 대하여(전보삼 신구대 교수)=만해의 민족주의 사상의 본질적인 기본 원리는 불교적 인식체계인 대승불교의 보살정신에서 출발해 자유를 인간본질의 기본적인 요소로 파악했으며, 인간은 또한 기본적으로 평등한 존재란 불교의 근본정신에 입각해 동시대의 자강파 지식인들과는 다른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대승불교의 이타행과 자비정신은 단순한 불교개혁론자의 입장이 아니었고, 자주 독립을 위한 실천운동의 선봉에 서서 적극 투신케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만해는 생을 마치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유, 평등, 평화, 구세의 정신 속에서 민족의 자주독립을 염원한 겨레의 큰 스승이었다.

■만해학 심포지엄(2)-‘조선불교유신론의 21세기적 의미’

△‘조선불교유신론’ 집필의 배경과 개혁방향(정광호 인하대 명예교수)=조선왕조시대의 억불정책속에서 불교는 매우 심한 차별과 수모를 당하고 있었다. 이 차별대우의 가장 큰 상징이 승려들의 도성출입을 막아 놓고 있던 조선 사회의 금령이었다. 이렇듯 땅에 떨어진 조선 말기불교의 위상과 인권을 회복시키고자 쓴 글이 바로 <유신론>이다. 내용은 왕생극락을 목표로 하는 가짜 염불을 시정할 것, 불교의 침체성을 포교의 부재에서 찾을 것, 미신적 요소가 많은 탱화를 일체 없앨것, 승려의 생활을 신도의 보시에만 의존할 것이 아니라 자립할 것 등을 골자로 한 총 17장으로 구성돼 있다.

△‘조선불교유신론’의 소회 폐지론과 선종의 정체성(서재영 동국대 강사)=선종의 입장에서 볼때 수많은 소상을 모셔놓고 밤낮으로 기도하는 것을 불법의 대의로 생각하는 것은 왜곡된 불교상을 반영하는 것이다. 중생의 사표로서 소회의 기능이 큰 역할을 담당하지만 그것이 길흉화복을 비는 대상이 되고 그와 같은 의례가 불법의 본질로 인식될 때 소회의 기능은 불교의 본래성을 전복하는 미신이 되고 만다는 것이 만해의 생각이다. 따라서 만해는 소회를 폐지하는 대신 선(禪)의 사상적 내용성을 회복해 선종의 정체성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선불교유신론’과 현대 한국불교(김광식 부천대 교수)=<유신론>이 현대 한국불교에게 주는 의미를 정리해봤다. 첫째, <유신론>에서 비판받았던 당시 불교 현실을 수용하기 이전에 그 당시 불교사를 복원, 재구성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둘째, <유신론>을 이해함에 있어서 만해가 이를 집필하기 이전에 일본에 다녀온 경험에 대한 총체적인 분석을 가해야 한다. 셋째, <유신론>의 잣대로만 현대 한국불교를 바라보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유신론>을 수긍하기 이전에 현대 한국불교의 제반 양상을 성찰하는 것이 우선돼야 한다. 넷째, <유신론>의 정신은 재평가 돼야하며 현대 한국불교를 <유신론>과 같은 잣대로 분석하고 평가할 수 있는 제2, 제3의 <유신론>이 집필, 간행돼야 한다.

△근대계몽철학과 ‘조선불교유신론’(허도학 경남신문 논설위원)=사회진화론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제기된 것이 곧 애국계몽론이다. 만해의 불교가 무엇인가에 대해 한마디로 답하라고 하면 그것은 호국 불교라고 할 것이다. <조선불교유신론>을 비롯해 1919년 3ㆍ1운동 참가와 1920년대의 불교청년운동이 그런 맥락이다. 만해는 사회진화론을 중심으로 자유ㆍ진리ㆍ진취ㆍ파괴 등의 정신을 갖는 근대계몽철학의 제요소를 받아들여 불교유신론으로 발전시켜 나갔으며 동시에 전통적 호국불교사상도 받아들이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조선불교유신론’과 만해의 문학관(고명수 동원대 교수)=모든 문자 행위를 기본적인 문학으로 봤던 만해의 광의적 문학관 때문에 만해는 일정한 장르에 구애받지 않고 자기 나름의 독자적이고 다양한 문필활동을 지속할 수 있었다. 이와같이 만해는 본래부터 좁은 의미의 문학개념인 ‘문예’에 집착하지 않았다. 또한 자신의 기량면에 있어서 그다지 관심을 갖고 있지는 않았으면서도 일제하의 역사적 현실을 좌시하지 않고 어떻게 하든 기울어만 가는 민족적 현실을 직시하고 국민들로 하여금 자주 독립정신을 고취하고자 했다.

△‘조선불교유신론’에서 근대적 세계관 읽기(이도흠 한양대 교수)=만해는 중도(中道)의 사유를 하면서도 이분법적 사유를 하고, 승려로서 진여(眞如)의 불가사의함을 인정하면서도 진리의 확정성을 옹호하였으며 부처와 중생과 마음이 하나임을 알면서도 인간 중심의 사유를 전개한다. 이분법, 진리의 확정성, 인간중심주의 등은 근대성을 형성하는 원리들이다. 이는 만해가 단순히 근대적 요소를 부분적으로 수용한 계몽주의자가 아니라 근대적 세계관을 굳게 형성하고 있었던 근대적 지식인이었음을 의미한다.
김주일 기자 | jikim@buddhapia.com
2003-08-11 오전 8:4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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