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양주 회암사터(사적 128호) 북쪽 능선에 남아 있는 지공(?~1363)선사와 나옹(1320~1376)선사의 부도는 조선후기인 19세기에 조성된 것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두 선사의 활동시기와 연결시켜 고려시대로 조성연대를 추정해오던 것들이다.
경기도박물관이 회암사 특별전(~10월 5일)의 일환으로 7월 29일 개최한 학술강연회에서 ‘회암사지의 석조유물’을 발표한 국립중앙박물관 소재구 학예연구관은 “나옹, 지공선사의 승탑(고승의 사리나 유골을 모신 탑, 부도)은 두 선사의 입적시기에 맞춰 그 조성시기가 고려시대 말기로 비정되어 있다”며 “양식적인 면에서 이 승탑들은 조성시기가 19세기로 재고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소 연구관은 먼저 여말선초 회암사의 주역이었던 지공-나옹-무학 스님의 부도 위치를 그 근거로 제시했다. 회암사터 위쪽, 즉 현재의 회암사 동쪽 능선에는 위쪽부터 나옹선사탑과 석등(경기도유형문화재 50호), 지공선사탑과 석등(경기도유형문화재 49호), 무학대사탑으로 추정되는 회암사지부도(보물 388호, 1407년 추정)가 자리하고 있는데, 상하의 계보를 중시하는 선문에서는 보기 드물게 제자인 나옹선사탑과 스승인 지공선사탑이 위계상 그 위치가 뒤바뀐 것이다. 이는 최초에 무학대사의 부도가 세워지고 나머지 두 스승의 탑은 먼 후대에 나옹, 지공의 순서로 세워지면서 탑 자리에 대한 상하의 위계가 흐트러진 것으로 보여진다는 것이 소 연구관의 설명이다. 나옹선사의 행적을 기록한 선각왕사비(보물 387호, 1381년)가 부도ㆍ석등의 맞은편 언덕에 떨어져 단독으로 세워진 사실 역시 애당초 이 석비가 세워질 당시에는 부도를 동시에 건립할 계획이 없었음을 짐작케 한다.
양식적인 면에서도, 형식적으로는 무학대사의 탑과 석등으로 추정되는 회암사지부도와 석등을 본뜨고 있지만 거의 장식이 생략되고, 조형감각도 매우 단순화되어 극단적으로 형식화된 특징을 보여준다. 소 연구관은 “이는 순조 28년(1828)에 중건된 무학대사비, 지공선사비 등의 치석기법이 그대로 승탑조형에 적용되고 있는 점이나 조선후기 왕릉의 귀유석(鬼遊石)을 본뜬 상석(床石) 등에서도 확인된다”며 “지공, 나옹선사의 승탑과 그 부속물들은 입적 당시의 제작물이 아니라 훨씬 후대의 조성물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이어 소 연구관은 “고승의 사리탑은 후대에 얼마든지 세워질 수 있다”며 “19세기에도 무학대사비, 지공선사비, 나옹화상탑과 석등, 지공선사탑과 석등 등 일련의 석조물들이 대거 조성되었다는 것은 회암사가 명종~선조(1566~1595) 대에 완전히 폐사된 것이 아니라 원래의 회암사 터에서 지금의 회암사 쪽으로 자리를 옮겨 소규모나마 명맥을 유지해 왔을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의미를 부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