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8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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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암사지 나옹 지공선사 부도 '조선말 조성'
나옹선사탑 및 석등
경기도 양주 회암사터(사적 128호) 북쪽 능선에 남아 있는 지공(?~1363)선사와 나옹(1320~1376)선사의 부도는 조선후기인 19세기에 조성된 것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두 선사의 활동시기와 연결시켜 고려시대로 조성연대를 추정해오던 것들이다.

경기도박물관이 회암사 특별전(~10월 5일)의 일환으로 7월 29일 개최한 학술강연회에서 ‘회암사지의 석조유물’을 발표한 국립중앙박물관 소재구 학예연구관은 “나옹, 지공선사의 승탑(고승의 사리나 유골을 모신 탑, 부도)은 두 선사의 입적시기에 맞춰 그 조성시기가 고려시대 말기로 비정되어 있다”며 “양식적인 면에서 이 승탑들은 조성시기가 19세기로 재고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소 연구관은 먼저 여말선초 회암사의 주역이었던 지공-나옹-무학 스님의 부도 위치를 그 근거로 제시했다. 회암사터 위쪽, 즉 현재의 회암사 동쪽 능선에는 위쪽부터 나옹선사탑과 석등(경기도유형문화재 50호), 지공선사탑과 석등(경기도유형문화재 49호), 무학대사탑으로 추정되는 회암사지부도(보물 388호, 1407년 추정)가 자리하고 있는데, 상하의 계보를 중시하는 선문에서는 보기 드물게 제자인 나옹선사탑과 스승인 지공선사탑이 위계상 그 위치가 뒤바뀐 것이다. 이는 최초에 무학대사의 부도가 세워지고 나머지 두 스승의 탑은 먼 후대에 나옹, 지공의 순서로 세워지면서 탑 자리에 대한 상하의 위계가 흐트러진 것으로 보여진다는 것이 소 연구관의 설명이다. 나옹선사의 행적을 기록한 선각왕사비(보물 387호, 1381년)가 부도ㆍ석등의 맞은편 언덕에 떨어져 단독으로 세워진 사실 역시 애당초 이 석비가 세워질 당시에는 부도를 동시에 건립할 계획이 없었음을 짐작케 한다.

지공선사탑 및 석등
양식적인 면에서도, 형식적으로는 무학대사의 탑과 석등으로 추정되는 회암사지부도와 석등을 본뜨고 있지만 거의 장식이 생략되고, 조형감각도 매우 단순화되어 극단적으로 형식화된 특징을 보여준다. 소 연구관은 “이는 순조 28년(1828)에 중건된 무학대사비, 지공선사비 등의 치석기법이 그대로 승탑조형에 적용되고 있는 점이나 조선후기 왕릉의 귀유석(鬼遊石)을 본뜬 상석(床石) 등에서도 확인된다”며 “지공, 나옹선사의 승탑과 그 부속물들은 입적 당시의 제작물이 아니라 훨씬 후대의 조성물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이어 소 연구관은 “고승의 사리탑은 후대에 얼마든지 세워질 수 있다”며 “19세기에도 무학대사비, 지공선사비, 나옹화상탑과 석등, 지공선사탑과 석등 등 일련의 석조물들이 대거 조성되었다는 것은 회암사가 명종~선조(1566~1595) 대에 완전히 폐사된 것이 아니라 원래의 회암사 터에서 지금의 회암사 쪽으로 자리를 옮겨 소규모나마 명맥을 유지해 왔을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권형진 기자 | jinny@buddhapia.com
2003-08-06 오전 8: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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